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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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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으로(6부)


BY 로렐라이 2003-09-19

  6부

 

  어느 사이...  밤이 새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을 듯  했던 연인들은 사라진 지 오래고 거칠고 음산한 분위기를 물씬 풍겨대는 세남자가 우릴 쳐다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사람은 담배를 피우는 듯 했고 또 한사람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서 매만지고 있었고, 나머지 한사람은 팔짱을 끼고서 우릴 쳐다보며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어이. 이 시간에 잠 안자고 뭐하는거야. 여기가 당신네 안방인줄 알아? 우리 구역에서 허락도 없이. 낄낄.. 우리 구역을 사용하려면 사용료를 내야되는데 어때? 우린 돈은 필요없구... 하하.. 거 물 한번 좋네. 같이 놀아보자구..."

  그 사내는 서서히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은아. 어서 빨리 차로 뛰어."

  안 우석은 내 손을 잡고 뛰려 했다. 그러나 우린 이미 세남자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각. 가로등만이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기에 사물 하나하나를 구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중 한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그저 손장난하기엔 위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날카로운 칼은 광기를 부리듯 가로등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몸전체가 떨려오기 시작했고, 안 우석은 나를 그의 등뒤로 몰아붙였다.

  "이봐요. 우리 조용히 갈테니 비켜주시죠."

  "하하. 이 양반이 무슨 소릴 하는거야.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불장난하다 걸려놓고서 응. 뭐 할말있어?"

  "이봐요. 아저씨. 여자도 있는데 이 무슨 행팹니까? 자 제발 비켜주세요."

  안 우석은 세사내의 사이를 벌리려는 듯 손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사내가 그를 발로 찼다. 안 우석의 손은 내게서 빠져나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아... 오빠. 제발... 왜들 이러는거예요. 오빠..."

  "오빠 좋아하시네. 야. 우리도 오빠동생 하자구.. 응?"

  한 사내가 나를 뒤에서 끌어당겼다.

  "아... 나줘요.. 제발"

  "하하하..."

  그들은 날 농락할 듯한 기세였다. 그때.

  안 우석은 어디선가 길고 두툼한 막대기로 처음 자신을 공격했던 사내에게 덤벼 들었다.

  그래. 안 우석은 검도부였지.

  이럴때 그가 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려나...

  첫번 사내가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두번째 사내가 안 우석과 맞붙었다. 안 우석이 맞을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둠속에서 벌어지는 사내들의 격투라니...

  나를 농락하려던 사내는 상황의 돌아감이 긴박함을 느꼈는지 나를 끌고 가려 했다.

  "아... 나줘요. 아..."

  나는 난간을 붙잡고 그 사내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내는 막무가네였다. 두려웠다. 비록 안 우석이 날 구해주러 오겠지만 그러나, 그가 올때까지는 내 나름대로 나 자신을 지켜야 하건만 내 손가락은 서서히 난간에서 빠져나가고... 다행히도  그때, 안 우석은 두 남자를 쓰러뜨리고 지친 몸으로 나와 세번째 사내 앞에 섰다.

  "에잇!"

  그 사내는 나를 난간으로 밀치고 안 우석에게 덤비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밀림과 동시에 난간에 부딫혔는데 설상가상으로 허술한 난간은 나의 몸을 지탱시켜주지 못하고... 결국 나의 몸은 난간을 넘어 바닷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

  풍덩...... 난 전혀 수영할 줄 몰랐다. 이대로 죽는건가...

  점점 기억이 혼미해졌다. 아... 답답하다. 아... 살고싶다. 아... 힘이 빠진다. 아... 오빠...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이대로... 보고싶은 이가 있었는데... 그리운 이가 있었는데... 사랑하고픈 이가 있었는데...

  무언가가 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점차 혼미해져가는 내 기억속으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내 뺨을 여러번 스치는 듯 했고 내 입술도 스쳐갔다. 순간 나를 농락하려던 시커먼 사내가 다가왔다. 날 겁탈하려는것인가...

  "아... 안돼!"

  아... 나는 안 우석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정은아. 괜찮아? 괜찮아? 어디 다친데 없어?"

  그는 내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난간에 부딪칠때 생긴 건지 블라우스 소맷자락이 조금 찢어져 있었고 팔꿈치에선 약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픔보다는 현재에 대한 안도감과 안 우석에 대한 감사함, 아까전 일에 대한 사그라들지 않은 두려움으로 내 시야는 다시 흐려져갔다.

  그는 날 끌어 안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이젠 괜찮아. 이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불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그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자꾸 안 우석의 얼굴을 쳐다보면 10년전의 인물과 클로즈업되는 걸까..

  그의 입술은 핏물을 머금고 부어있었다. 손등도 터져 있었고 옷에는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부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는 부끄러운 듯 내 손바닥에 그의 얼굴을 비볐다. 나는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다시 그를 바라봤다. 안 우석의 눈은 너무나 선량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나는 서서히 그의 목에 내 팔을 걸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내 입술이 차서였을까... 그의 입술에 닿자 뜨거운 무엇엔가 감전된 듯 나의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그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차 문을 열어 날 시트에 앉혔다. 그는 차의 히터를 켰다. 금새 차안은 따스해졌다. 하지만  옷이 물에 젖은 상태라 여전히 나의 몸은 심하게 떨렸다.

  "이런.. 옷이 물에 젖어 감기 걸리겠다. 자..."

  그는 뒷자석에 있던 겉옷을 나에게 건내주며 말했다.

  "자. 웃옷이라도 벗고 이걸 걸쳐. 그 편이 한결 나을거야. 앞으로 집에 갈려면 좀 걸릴테니까..."

  그는 내게 옷 갈아입을 시간을 허락한 듯 차 밖으로 나갔다.

 등지고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훔쳐야 했다.

  "민주 오빠... 날 이해해줘요... 내가 오빠를 잊더라도..."

  안 우석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옷을 다 갈아입은 후 그는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나의 집으로..

  생각하고도 싶지않은 일들이었지만 그로 인해 나에게 안 우석이란 인물은 가까워 질 것이다.  삶의 앞날을 어찌 쉽사리 판단할 수 있을까만은 그러나 어쨋든 안 우석과 나 사이의 고리가 쉽게 풀려 나가진 않을 듯 싶다.

......

  어느덧 차는 나의 집앞에 다다랐다. 오는 동안 우린 그다지 말을 하지 않은 듯 했다. 경험한 일에 대한 무언의 금기 약속인 듯...

  "정말이지 미안해. 하지만 한편으론 정은이랑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 감사한 면도 없진 않다.  우습지.. 자 들어가서 잠 좀 청해봐. 아까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말고.."

 그는 살며시 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리곤 나비가 사뿐히 꽃잎위에 내려앉 듯 그렇게 그의 입술은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운전 조심해서 가요. 안녕..."

  나는 조심스레 차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곤 대문으로 다가갔다.

...... 이럴수가...

  집열쇠가 없어졌다. 아까 물에 빠졌을때 잃어버린 건가... 어쩌지?  초인종을 누른다면 부모님이 깨실테고 내 지금의 모습을 보신다면... 몸서리가 처졌다. 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 뒤돌아 보니 안 우석이 차 밖에 나와 있었다.

  "왜 그래? 안들어가고?"

  그가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린 차 안에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그는 차의 좌석을 뒤로 눕혀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고 우린 그렇게 의자를 이불삼아 누웠다.

  "지금 나... 무슨 생각했는 지 알아? 훗.. 고등학교 국어에 그런 소설 나오지. '별'이란 소설 말이야. 목동소년과 주인집 아가씨가 같이 보내는 그 밤, 그리고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의 원두막에서의 장면들... 지금 정은이랑 내가 그런거 같다. ...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자. 내가 지켜줄께..."

  안 우석과 나. 우린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고... 그렇게 나의 스물 두해는 지나가고 있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