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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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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서 길을 잃다.


BY 빨강머리앤 2005-08-02

그날도 더울 모양인지 북한강 주변이 부옇게 흐려 있었다. 물안개도 아닌, 연무도 아닌 딱히 뭐라 규정을 지을수 없는 뽀얀 수증기 덩어리가 강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무심결에 '오늘도 무척 더울 모양이야' 중얼 거렸다. 아침부터 열에 잔뜩 달궈진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그것은 북한강가에서 희미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어쩌지 못하는 더운 열기였다.

청평대교를 건넜다. 강 건너편에 파도 치듯 이어진 산들이 보였다. 그 산들중 하나를 오를 예정이었다. '뾰루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 해발 709미터. 산은 산이되 유난히 뾰족한 봉우리를 가졌으므로 이 산은 ㅇㅇ산, 이 아닌 '뾰루봉'이 된 모양이었다.

차를 큰골이라는 동네에 세워 두었다. 이번엔 좀 색다르게 산행을 할 예정이었다. 산을 오르고 다시 오른 길을 되짚어 내려와 차를 세워둔 곳으로 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산행 방식이었다. 이번엔 차를 세워둔 큰골에서 산행을 한 다음에 뾰루봉 입구쪽으로 내려올 예정이었다.큰골에 들어서니 완연한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다. 산 아래 제법 넓다란 평야지대를 이룬 논배미에서 초록 물결을 이룬 벼들이 풍요로움을 전해주고 논가에 호박덩굴이 잘 자라 더러는 열매를 매달고 더러는 아직 꽃을 피운채 여름을 익히고 있었다.

찻길이 나 있었고 산 입구쪽에 주차장이 있었지만 일부러 차를 아래쪽에 세워 놓고 시골길을 걸어 보았다. 아이들과 더불어 함께 볼 만 한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호박꽃과 반딧불이 얘기도 들려 주고 노란콩꽃이 얼마나 예쁜지도 보여주고 예전엔 나도 몰랐던 가지가 피운 보라색 꽃도 함께 감상하며 시골길을 걸었다.

간간히 느티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서 부채를 부치며 더위를 식히고 계시는 촌로들이 있는 시골 정경이 참으로 정답게 느껴졌다.

산입구에 도착하자 마자 매미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우렁차다. 아침일찍 부터 물가에는 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산이 좋아 물도 좋은곳, 이런곳에 이런 별천지가 있었구나 싶었다. 차고 맑은 물을 풍성하게 흘려 보내는 계곡은 꽤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산 아랫쪽 계곡은 저곳에서 놀면 참 좋겠다 싶은 곳에 어김없이 가족단위의 물놀이 피서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위로 올라 갈수록 사람이 드물어 진다.

비로소 숲엔 정적이 깃들고 산 속의 작은 암자 '운곡암' 즈음엔 아예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듯 고요하기 까지 했다. 운곡암, 지금은 옛 모습을 하나도 간직하지 못했지만 이 절의 창건연대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고 한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지나가는 목마른 길손들 맘껏 목을 축이라고 절 앞에 약숫물이 콸콸 흘렀다. 약숫물을 한사발 들이키며 돌아보니 암자 여기저기 봉숭아가 만발했다. 봉숭아꽃이 피어 있고 장독대가 고즈녁하게 들어 앉아 있는 모습은 이곳이 절집이라기 보다 어쩐지 여염집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길을 재촉해 절집을 돌아 산길을 가다 산신각 정도 되는 절집옆 커다란 바위에 핀 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나리꽃 두송이, 아득한 절벽 바위위에서 자라는 주홍빛 저 꽃송이는 어쩌자고 그리 높은 곳에서 꽃을 피웠는지.... 비상하고 싶은 꿈이라도 지녔는지...

인적이 드문 깊은산속, 계곡물은 여전히 힘차게 흘러가고 징검돌을 지나 계곡을 건너곤 하는 평화로운 길이다.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아이들과 노래를 흥얼 거렸다. 계곡가 징검돌을 건너며...

계곡도 끝나고 화야산과 뾰루봉이 갈라지는 갈림길, 그곳에 묘하게도 인가가 하나 있다.뽀루봉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보면서도 인가쪽에 대고 물어 보았다.'뾰루봉 가는 길이 맞나요?'

'예, 그리로 올라 가세요'  비탈진 산길이 만만찮아 보인다. 벌써부터 딸아이는 힘들다고 하고 아들녀석은 늘상 그랬던 것처럼 앞장을 섰다. 사람들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았는지 좁은 산길에 풀들이 우북하다.특이하게도 산길 초입에 양쪽으로 풀들만 무성했다.나무는 저만치서 저희들 끼리 몰려 있고 메밀꽃도 아니고 고마리도 아닌것 같은 풀들이 발길에 채일 정도로 그득했다. 이런산 또 첨이야... 아득한 벼랑길 같은 비탈길을 오르고 올라도 어디 한군데 편안하게 쉴 만한 공간이 없는 길을 '좀 쉬었다 가요'하는 딸아이를 달래 가며 오르고 올랐다.

그렇게 7부 능선 즈음까지 쉼없이 올라 서 보니 평원지대 같은 넓고 평평한 등성이가 나타났다. 등성이를 올라 서니 아랫쪽 아득한 벼랑같은 산속에서 쏴아,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마치 '올라 오느라 수고했다'고 칭찬이라도 하듯이...

'힘들었지, 이 바람 너무 시원하지... 고생한 만큼 보람있단말 이렇게 쓰는말 아닐까?' 딸아이한테 들여 주는 말은 내 자신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일 만큼 그 길이 멀고 힘들게 느껴졌다.

그곳에서 부터 줄곧 평탄하게 산을 오를수 있었다. 머잖아 곧 당도할수 있을 것 같은 봉우리도 손에 잡힐 것 같았다. 평원같은 산길을 걸어 1.6킬로, '뾰루봉'이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가져온 물과 사과에 비스킷을 나눠 먹었다. 그 산을 오르는 동안 딱 두사람을 만난 것 말고 사람이 없었다.

뾰루봉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니 천길 낭떠러지.. 왜 이름이 뾰루봉인지 정상에서 보니 고개가 끄덕여 질 정도로 산이 가파르고 험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올라온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침, 그곳으로 올라오고 있는 중년부부에게서 내려가는 길이 있음을 확인했다. 내려가는 길이 올라온 길보다 코스가 짧았다. 금방 산을 내려가서 계곡물에서 놀자는 말에 아이들이 환호를 한다. 내려가는 길은 자신있다며 생기를 되찾은 딸아이, 하나도 지쳐보이지 않은 아들아이, 산에 관한한 이젠 베테랑(?) 이라고 자신만만한 남편, 이정도는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하는 나ㅡ, 하산을 시작하는 지점부터 길이 만만치가 않았다. 올라오는 길 못지 않은 비탈길, 하지만 올라온 길이 흙길이었다면 하산길은 암벽으로 둘러처진 더 위험한 길이 이어졌다.

이러다 말겠지 하는데 아득한 벼랑이 바로 발 아래 내려다 보이는 위험천만한 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몇번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순간을 맞딱뜨리다 보니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조심해라' 라는 말을 입에 달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하산을 해야 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그런길을 얼마정도 지나다 보니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룬 평평한 산길이 나타났다. 아, 이제는 고생 끝이다 했는데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다시 한번 암벽을 타야하는 위험천만한 길인 나타난다. 사람은 아니보이고 그길 아닌 다른 길이 없나 샅샅이 뒤져보아도 더 위험한 낭떠러지만 있을 뿐 다른 길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길이어도 언젠가는 끝이 있겠지 싶은 곳에 갑자기 길이 없어져 버렸다. 송전탑이 앞에 떡하니 있고 그 주변은 땅이 산성화 되었는지 어린 아카시아 나무들이 무성하게 길을 막고 있었다. 다른 길이 있나 사방팔방을 돌아다녀도 딱히 내려가는 길이 없는 거였다. 문득 겁이 났다.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절벽이요, 앞쪽은 송전탑과 길이 어딘지 모르게 무성하게 자라있는 아카시아 나무들과 관목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할수 없이 오른쪽으로 빠져 길이 아닌 길로 들어서 가기로 했다. 길없는 길을 나아가는 남편을 믿는 마음 한편으로 위험한 길위에 놓인 아이들이 걱정스러워 불안한 마음을 가눌길이 없었다.낙엽이 덮혀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것 같은 길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막막했다. 길이 될 만한 아무런 단서도 없고 무작정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제멋대로 길게 뻗은 관목의 가지에 걸려 넘어지기를 몇번, 아이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내가 아이들 보다 오히려 겁을 먹고 어쩔줄 몰라 했다. '우리 119에 연락하자' 나의 제안에 '조금만 더 내려가 보자'고 하는 남편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어쩌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남편은 더덕을 발견했다고 땅을 파고 있었다. 한뿌리의 더덕이 쌉싸한 향기를 진하게 전해 주었다. 그 향기가 어쩐지 새로운 희망 같기도 했다.

남편이 잠깐 나와 아이들을 세워두고 길을 찾겠다고 내려가다 혼비백산하여 다시 돌아왔다. 그때 말을 안했지만 나중에 산을 내려와 하는 말이 그랬다. '그곳에서 커다란 뱀을 봤는데 그말을 하면 다들 더 놀랠 까봐 아무말 못했다'고.

점점 지쳐가는 아이들, 노출된 팔과 다리가 나뭇가지에 쓸리고 가시덤불에 찔려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계곡물 소리가 들려왔다.물소리를 따라가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남편의 말을 따라 계곡을 찾아 아래로 내려가 보았지만 여전히 길은 없었다. 계곡을 건너고 다시 아래로 아래로 내려 가면서도 무서운건 마찬가지... 연이어 이어진 산들이 생각났다. 이 길에서 다른 산으로 들어설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현실은 더욱 끔찍하게 다가오고 길을 더욱 무성하게 관목으로 감싸여 있어서 아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했다.

무슨 나무였을까?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긁적였다. 어떤 나무 근처를 지나가니 한꺼번에 모기들이 달려들어 문 것처럼 따갑고 가려웠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울어댔다. '저 놈의 까마귀는 왜 울고 난리야?'  보이기만 한다면 까마귀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싶었다. 어느 나라에서는 까마귀를 길조라고 한다지만 적어도 산속을 헤매다 듣는 까마귀 소리는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계곡옆을 바싹 붙어서 아래로 내려가기를 얼마동안이었을까, 드디어 희미한 길이 보였다. 이젠 살았구나 싶었는데 거짓말 처럼 다시 길이 끊기고 무성한 잡목이 길을 막고는 했다. 그렇게 몇번이나 숨바꼭질 하듯 길을 만나고 다시  길을 잃고를 반복하다 자동차 경적소리를 들었다. '삑' 그 소리가 그렇게나 반갑게 느껴지던 일은 아마 두번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과연 나무 사이로 산아래 도로가 보였다. 그 즈음에선 누군가 야영을 했는지 계곡가에 버려둔 모기장과 프라스틱 의자가 뒹굴고 있었다. 감격의 포옹. 그렇게 힘든 길을 빠져 나오고도 가시나 나뭇가지에 쓸리는 상처 말고는 별탈없이 산길을 내려와준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꼭 안아 주었다. 정작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눈물이 나왔다.

딸아이가 놀렸다. '엄마, 아까 엄마 얼굴 하얗게 질려 있었어. 알아?'

산길과 인접한 도로엔 피서객들의 차량들이 이어지고 도로아래 청평호수엔 시원하게 물을 가르며 보트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사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긴 또 오랫만이었다.

나중에 뾰루봉에 관한 산행기를 찾아보니 우리와 같은 코스를 탔다가 길을 잃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제는 그 송전탑과 근처의 아카시아 나무였다. 무성한듯 보여도 그 길을 지나쳐 가다 보면 뾰루봉 입구라고 쓰인 길을 만날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아무리 찾아도 길처럼 보이는 길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가평군청 게시판에 항의라도 해야 겠다.

지금도 남편이 나를 놀린다.'너 그때 얼굴빛 한번 보여 주고 싶다. 하얗게 질려 있던 모습이 가관이 아니었지' ... 사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일, 악몽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