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달 남았구나. 호주라구?!
나라이름을 자주 접하는데도 네 입에서 '호주로 떠나'했을 때 그 곳이 참으로 낯설게만 느껴졌지.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로 기억되는 나라, 환경이 정책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가는 나라...
혹은 뉴질랜드라는 미지의 나라와 맞닿아 있는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던 그 나라.
아, 호주 청정쇠고기도 있구나. 고기를 싫어하는 너와 별 상관이 없겠다만.
사실은 호주가 가진 그런 점들이 다 맘에 들어.
다른 나라가 아닌 호주를 선택했다는 너희 부부의 결정에 나도 기꺼이 박수를 쳐주고 싶어.
그리고 영어 한마디 제대로 구사할수 없는 네가 가서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지만, 나는 너를 믿어. 충분히 잘해내리란 걸 .
너는 유난히 체구가 작은 편이지. 두 아이의 엄마, 그것도 이젠 너를 넘어선 키와 몸무게를
가진 아들 둘을 가진 엄마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뚱어리를 이루는 뼈대위로 누군가 대강 붙여 놓은것 같은 살점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럽게
보일 만큼 너는 작고 여린 여자처럼 보여.
하지만 너는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지.
너를 첨 만난 날 나는 너의 겉모습이 아닌 네가 가진 내면을 들여다 보았지.
첫날부터. 그때가 아마 장마를 앞둔 유월 어느날이었지.
장마가 오기 전에 대청소를 하겠다고 온 집안을 마구 헤집어 놓고 아이둘을
아파트 복도로 내쫒았던 모양이었어.
걸치적 거린다고 쫒겨난 아이둘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복도를 왔다갔다 해서 안그래도 심심하던
우리집 아이들이 현관문을 빠꼼히 열고 밖을 내다 보았지.
너희 두 아들이 어찌나 신나게 복도에서 자전거를 타던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우리 아이둘도
나가 놀겠다고 그랬지 않겠니?
사실은 그때 아이들을 말려야 했는데 아이들이 복도에서 놀면 가만 두지 않은 옆집 아줌마의
고함소리가 날아올걸 예상하면서도 아이들을 복도로 내 보냈지.
옆집 아줌마 생각나니? 딸이 호텔에서 야간근무를 해서 낮에 잠을 자야 한다고 복도에서 아이들
노는 걸 질색하던 그 아줌마 말이야. 첨엔 멋모르고 아이들도 복도에서 자전거 타며 놀다가
아줌마 한테 몇번인가 혼나고는 복도에 나갈때마다 조심스럽게 내게 묻고는 했지.
그날, 비가 오락가락해서 아이들은 집안에 갇혀 심심했을 거야.
그러니 옆집 아줌마네 딸한테는 정말 미안했지만 그날 만은 아이들을 복도에서
조금만 놀게 하고 싶었거든. 그런 중에 너희집 두아들이 복도에서 자전거 타는 걸 몸이
근질거리는 우리 아이들이 봤으니
그냥 집에 두었다간 무슨 난리가 났을지....
복도에서 놀던 너희 두 아들과 우리집 아이들은 곧장 어울려 놀았지.
이사온 지 얼마 안되어 서로 낯설었을 텐데 말이야. 십여분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나 다를까 옆집 아줌마네 현관문이 열리고 얼굴을 잔뜩 찌뿌린 아줌마가
'조용히 하라'고 하는 거야.
그때서야 청소하던 네가 복도로 나왔지.
체구는 작고 동안에 착한심성을 가졌으되 강단이 있을 것 같은 다소 복잡한 얼굴로...
나는 그런 네가 어쩐지 낯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거였어. 함께 피자 시켜 먹자고
네가 제안을 했을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따라 나섰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어.
청소를 덜 끝낸 너희집은 엉망이었지. 베란다 유리문이 닦이다 만 상태였고, 안방의 유리문을 통째로
뜯겨져 화장실에 겹쳐 있었고 거실은 아직 정리가 덜된 집기들로 어지러웠지.
혼자서 그 많은 것들을 다 치우기엔 너무 벅차 보였는데 의외로 너는 씩씩하게 대답을 했어.
까짓거 문제없다'고. 겉모습과 다르게 너무 씩씩한 너의 대답에 피싯 웃음이 나오더구나.
피자를 기다리며 아이들 방에서 어울리는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우리는 차를 마셨지.
'무슨차를 마실 거예요? 커피 녹차 대추차 둥글레차 국화차에 쌍화차도 있거든요?'
가정집에 무슨 차가 그리 많아요? 라고 대꾸를 했지만 내심 반가웠어.
즐겨 하지 않지만 '차'라는 말에 괜히 마음 따뜻해 지는 사람에 내가 속했으니까.
'아침이니까 커피로 할까요?' 마침 너도 커피가 마시고 싶다고 커피메이커에 가루커피를 넣고 커피를 내렸어.
그 사이로 도자기로 만든 접시에 쿠키를 내오는 센스를 보며 혀를 내 둘렀던 걸 너는 아는지.
대청소를 한다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확실히 손님을 챙기는 너의 손길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던지
놀랍기 까지 하던걸.. 비가 부슬 거리는 날이어서 커피향기가 은은하게 우리 주변을 감싸며 흐르고 있었지.
아이들은 저희들 끼리 잘 놀고 우리는 단번에 마음이 맞아서 커피를 두잔째 들이키고도 모자라
쟈스민차를 더 끓여 마셔야 했어. '향기가 참 좋을 거예요'라며 내온 쟈스민차.중국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차라고 설명해 주는 너를 바라보며 차에 대해 관심이 많은 네가 다시 보이기도 했지.
차라면 커피나 녹차정도만 생각했던 내게 너의 다양한 차에 대한 관심은 매우 신선해 보였어.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피자처럼 쫀득하게 그리고 커피향 처럼 은근하게 쟈스민처럼 향기롭게 이루어 졌지.
너와 얘기를 나누며 우리가 참 많이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작은 체구도 그렇지만 생각의 방향과 세상을 보는 시선까지도.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가까워 지지 않을수 있었겠니?
가운데 805호를 사이에 두고 804호인 우리집과 806호인 너희집은 서로 왕래하기 참 좋았지.
더운 여름밤, 어쩌다 신랑들이 늦게 오는날은 맥주 마시며 영화를 보던 일도 좋았지.
시원하게 재워둔 캔맥주 하나씩 들고 구운 쥐포와 땅콩 을 안주 삼아 영화를 보면
열대야도 저만치 달아나고 우리의 수다속에 영화내용이 먹힐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상관없었어.
내가 차를 좋아하던 너를 보며 차(茶)에 대해 관심의 영역을 넓혔듯이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서 너는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어.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교류의 영역을 넓혀 갔었지.내가 이곳에 이사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전화로는 교류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 쉽지가 않았어.
그래도 마음은 늘 여전함을 전화를 통해 확인할 때마다 그곳에 네가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이국행이라니... 사교육 열풍이 식을 줄 모르는 우리나라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건 비인간적이라고 한 네 남편의 생각에 나 역시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 나라 안에서 부딪히면서 뭔가 대안을 찾는 노력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결국 너는 남편의 의견대로 아이둘 데리고 호주로 갈 결심을 굳혔지.
그 결심을 한게 불과 한달 전이었고 이젠 떠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몇년만 있으면 올텐데..
너는 쉽게 얘기 했지만 한 번 가면 쉽게 나오지 못하는 곳이
그곳이라니 몇년이 몇십년이 될지 어떻게 알수 있겠니?
비행기표만 끊어서 호주로 여름휴가 즐기러 오라고 너는 그랬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될지 어떨지도 장담하지 못하겠는데....
어찌되었든 너의 결정을 믿어 의심치 않아. 그리고 네가 잘 해 내리란 것도.
떠나는 날을 앞둔 너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어. 몇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너무 힘이 들고 견딜수 없으면 빨리 돌아 오되 몇십년이 흘러도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곳을 터전삼아 일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너의 행복을 빈다는 뜻이지.
우리가 한 약속 지키면서... 보고 싶을 때마다 메일 주고 받기로...
항상 건강하렴. 두 아이를 책임지고 있으니 어깨가 한결 무겁게 느껴질 테니.
그리고 고국에서 항상 너를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네엄마와 남편
그리고 친구들이 있음을 항상 기억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