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난 후 이번에 처음으로 2박 3일 동안 딸아이와 떨어져 지내는 중이다.아니, 예전에 딱 한번 유치원 캠핑때 하룻밤을 밖에서 자고 온적이 있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전의 일이고,벌써 열두살이나 된 딸아이는 집 이외의 다른데서 잠을 자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는 공식적인 일 빼놓고 말이다. 그건 결코 자랑할 거리는 못되는 거지만...
예전부터 2박 3일 정도의 캠프를 생각하곤 했었다. 게으른 성격 탓에 너무 늦게 신청을 했다던가,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해서 원하는 캠프를 놓치고는 한 탓에 아직까지 이렇다할 캠프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한편으론 우리 가족끼리 가끔씩 여행을 가는것으로 위로 받는 측면도 있었을 거였다.
아무튼 딸아이는 지금 가족과 떨어져 숙소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단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내일이면 만날 것인데 갑자기 딸아이가 지금 보고 싶다. 그것은 정말 갑자기였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한놈이 없어서 얼마나 여유로운가,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했으니까. 혼자 놀아야 하는 아들 녀석이 '누나, 보고 싶다'라며 그리운 표정을 지어 보일때도 '너는 그러니?, 나는 괜찮은데'했던 나였다.
한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살을 더 먹을 수록 딸아이는 말이 많아졌다.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말이 많아진 것이나 거칠게 말하자면 엄마 말에 사사건건 대꾸하는 일이 잦아 졌다는 뜻이다. 나는 그럴때마다,'요즘 아이들 하고는...'하며 혀를 찼었다. 텔레비젼과 컴퓨터의 영향으로 혹은 방대한 독서량으로 요즘 아이들이 아는게 너무 많은 탓이라 생각했었다. 아닌게 아니라 아이는 읽는걸 좋아한다.
딸아이가 아주 특별한 아일 거라는 착각을 했던 적이 있다. 아이가 30개월을 갓 넘었을 때였는데 어느날 혼자 책을 읽어 내던 때였다. 그렇다고 내가 일찌감치 사교육 열풍에 휩싸인 것도 아니요, 따로이 한글공부를 시킨 것도 아니였다. 다만, 공부한번 시켜보라며 학습지 회사에서 놓고간 '가나다 포스터'를 방 벽면에다 붙여 두었을 뿐이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었을 뿐이었다.
아이는 말이 유난히 느렸다. 30개월이 되어가도록 아이는 기본 단어만 말했다. 책을 읽어 달랄때도 그저 손에 책을 들고와 '책, 책'이라고만 말했다. 아이가 말이 느렸던건 타고난 것도 있을 것이지만 아이에게 살갑게 말을 붙이는것에 소홀한 엄마인 내 탓이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런 면에서 절대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책, 책 이라며 내 치맛자락을 붙들고 다닐때도 갓 태어난 제동생을 돌본다는 핑계로 아이가 원하는 만큼 책을 읽어 주지도 못했다. 되려, 엄마 귀찮게 하지 말라며 저리가 있으라고 야단을 놓고는 했었다.
또 지금 생각하면 그 얼마 안되는 얄팍한 분량의 책은 또 얼마나 아이를 목마르게 했을까 싶을 만큼 책 또한 많이 안겨 주지 못했었다.그 부분은 참으로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아이는 별수 없이 얼마 되지 않은 책을 몽땅 머리맡으로 옮겨놓고는 잠잘 준비를 하곤 했다. 그 책들을 다 읽어야 잠을 자겠다는 태세였지만 간난 아기였던 둘째때문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아이가 원하는 만큼 책을 읽어 줄수 없는 날이 다반사 였다. 어쩌다 제 이모가 와서 아이가 꺼낸 책을 다 읽어 주면 아이는 행복하게 잠이 들곤 했었다.
그런 아이가 어느날은 혼자 글씨를 읽길래 '얼마 되지 않은 책을 하도 여러번 읽어서 다 외웠나 보다'고 생각했었다. 텔레비젼에 나온 글씨를 읽고 밖에 데리고 나가면 간판을 읽어서 '얘가 벌써 한글을 뗐구나' 비로소 알았다.
그 작은 아이가 한글을 읽는 모습은 엄마인 나 뿐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신기해 했다.( 지금이야 일찍 부터 한글 공부시켜 더 일찍부터 한글을 떼는 아이들이 수두룩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습성은 꾸준히 지켜졌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한 학습지 회사에서 일년치를 계약하면 책을 준다고 하여 학습지를 계약한 적이 있었다. 그 계약건으로 과학동화 서른권 짜리가 생기던 날, 딸아이는 책을 읽느라 꼼짝않고 방안에 틀어 박혀 있었다. 하도 집에만 있길래 내가 마당으로 ( 그때는 마당이 있는 빌라 주택에 살았다) 쫒아 보냈는데 글쎄 책을 한권 들고서는 마지못해 밖으로 나가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니 결국엔 화단가에 앉아 들고간 책을 다 읽고서야 아이들 틈에 섞여 노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책을 참 좋아하는 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참 흐뭇했던 그런 기억이었다. 아이는 결국 이틀만에 서른권짜리 과학동화를 다 읽어 냈고 그 후로도 여러번 반복해서 같은 책을 읽고는 했었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은연중 기대를 걸었던가 보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책읽는걸 지켜보는 일밖에 아무것도 한게 없으면서...
학교에 들어 가서도 여전히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내 기대에 부응할 만큼 공부에 전력투구하는 모습이 아니였다. 그냥, 이 아이는 책만 좋아하는 아이만 같았다. 더군다나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구조의 유치원을 졸업하고 말그대로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학교 생활을 버거워 하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이렇다할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 아닌데도 아이는 학교생활을 힘들어 했고 그걸 바라보는 나도 힘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책만 읽은 아이에게 조금은 딱딱할수도 있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이 조금 길었던 탓인것 같았다. 또 책이라는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아이가 자신과는 조금 다른 친구들과의 교유 관계도 힘겨워 했던것 같았다. 실제로 같은 반 아이가 같은 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한마디로 딱 부러지고 조금은 건방지다 싶을 만큼 영악한 아이로 우리 아이와 여러모로 대조가 되는 아이였었다. 게다가 이 아이는 자신이 보기에 한없이 어설프기만 한 우리 아이를 놀림감으로 삼기도 했었다.
그래서 한때 나는 대안학교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었다. 책을 좋아하여 창의성과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아이, 흙을 좋아해서 친구가 놀리던 어쩌든 퍼질러 앉아 흙놀이에 몰두하는 아이,밖에 나갔다 오면 그것이 나뭇잎이든 꽃잎 한장이든 손에 뭔가를 들고 오는 아이... 그런 아이가 우리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가 힘겹게 학교라는 조직생활에 익숙해 지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지켜보며 나는아이에게 힘이 되어 주기 보다는 강해지라는 채찍을 가하곤 했다. 아이는 나의 그런 태도에 상처를 받곤 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책은 여전히 가장 좋은 벗이었다. 나는 그런 딸아이를 위해 여덟살 크리스마스 선물로 '빨강머리앤' 양장본 세권을 선물했다. 일찌감치 책읽는 버릇을 들인 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에게도 버거울수 있을 두껍고도 글씨가 전부인 책을 쉬지 않고 읽어 냈다. 너무 재밌다며 몇번이고 그 책만 끼고 살았다. 겨울 내내.. 이제 그만 읽으라니 내 눈을 피해 읽었고, 몰래 옷속에 숨겨 화장실에서 읽기도 했었다. 나는 한동안 두꺼운 그 세권의 책을 숨겨 놓았던 적이 있었다.내 아이가 빨강머리앤 처럼 총명하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길 원했으면서 말이다. 아이는 정말이지 빨강머리앤 같았다. 무엇보다 앤처럼 수다 스럽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엉뚱하기로 앤에 비할바가 없을 정도다. 그 엉뚱한 상상력이 지난 여름 한동안 '인터넷소설'을 쓴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져 한번은 된통 혼이 나기도 했었다. 천박지축인 것도 앤을 닮은 듯하고...다만, 한가지 아쉬운건 앤만큼 마음이 깊지 못하다는것. 그것까지 바란다면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일이 될 터이지만 ...
지난 4학년을 종강하면서 선생님의 칭찬을 듬뿍 받고난후 아이는 상당히 고무 되어 있다. 선생님이 의견중 '다양한 읽기와 글쓰기를 바탕으로 이해력, 사고력 논리력이 우수하고 상식이 풍부합니다'라는 소견에 나와 아이는 상당히 흡족해 했다. 이런 의견은 선생님의 긍정적인 사고가 한몫한 결과일 것이다. 예전 2학년때 선생님의 의견이 그랬었다. '책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다른 일에 소홀할때가 있습니다' 2학년 선생님과 4학년 선생님이 보여준 소견에서의 작은 차이가 아이의 의욕에는 상당한 차이로 작용하는것 같다.
우리집의 수다쟁이 딸아이가 빠진 지난 이틀동안 우리집은 대체로 조용하기만 하다. 심심한지 아들녀석은 누나를 찾고 하나가 빠지니 허전하다고 아빠도 드러내놓고 딸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눈치다. 그런 반면 엄마 말에 꼬박꼬박 대꾸를 놓는 얄미운 딸이 안보여 룰루랄라,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던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귀찮은 녀석이 안보여 이 얼마나 한가로운가 싶어 그 마음을 적으려 컴앞에 앉으니 컴책상에 아이의 화분이 가만 나를 들여다 본다. 아이가 심은 해바라기씨앗이 심어진 화분이다. 씨앗이 발아한지 며칠이 되었고 아이가 가기 전날까지는 떡잎끝에 껍데기가 찰싹 달라 붙은 상태였다. '엄마, 나 없을때 껍데기 빠져 나가는지 잘 봐둬요' 당부하고 아이는 캠프를 떠났었다. 그 화분에 오늘은 떡잎끝에 위태롭게 껍데기가 붙어 있다. 금방이라도 툭, 하고 떨어뜨릴 태세다. 아마도 내일 아침이면 껍데기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아이가 돌아올 즈음이면 껍데기를 떨어뜨린 떡잎이 살포시 날개를 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분명 아이는 떡잎이 반듯하게 날개를 펴고 있는 제 화분을 바라보며 좋아라 소리를 지를 것이다.그런 장면을 상상하며 딸아이를 생각한다.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이는 것 같다.
딸아이가 돌아오면 두팔벌려 꼭 안아 주리라. 그리고 사랑한다고, 아끼지 않아도 되었을 그말을 꼭 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