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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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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산으로 놀러 오세요.


BY 빨강머리앤 2003-11-02

우리엄마는 '빨강머리앤'이라는 아이디를 쓴다.

빨강머리앤은 내가 더 좋아하는 책이름인데 왜 엄마가

그 이름을 훔쳐 갔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8살때, 엄마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빨강머리앤시리즈 3권으로 된 양장본을 사주셨다.

친구들은 내가 그림은 별로 없고 책은 두껍고 글씨만 잔뜩 있는

그책 세권을 여덟살때 읽었다는걸 믿지 않지만,

나는 그책을 읽자마자 단박에 빨강머리앤이 좋아져 버렸다.

그래서 그책만 줄곧 읽다가 엄마한테 여러번 혼이 났었다.

그책 말고 다른책좀 보라고 잔소리를 해대시니 엄마가 없는틈에

몰래 혼자서 몇번이고 읽은 책이다.

 

우리 엄마는 잔소리 꾼이다. 그래도 뭐 말로만 야단을 치시는게 아니고

나름대로 열심히 실천하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할말은 없고 엄마가 하는

잔소리 치고는 옳지 않은게 하나도 없으니 나는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잔소리꾼인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건 아마도 '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만

산에 가는걸 좋아한다.

일요일인 오늘은 느즈막히 일어나시더니 우리가 좋아하는 어린이 프로가

끝나자 마자 텔레비젼을 끄라고 하신다.

 

아침밥도 느즈막히 먹고 아빤 오늘도 출근을 하셨다.

엄마는 설겆이를 끝내고 커피를 끓이더니 책을 집어 드셨다.

나도 책이나 읽어야지 싶어 소파에 뒹굴면서 책을 읽었다.

어제 오락기에 붙어 있느라 밥먹을 시간까지 놓쳐 엄마로 부터

된통 혼이난 말썽꾸러기 동생도 웬일인지 밖에 나가겠단 말도 없이

얌전히 책을 읽고 있다.

막 책에 빠지려는데 커피를 다 마셨는지 엄마가 갑자기 외쳤다. '산에가자~~'

그 한마디를 우린 거절할 아무런 힘이 없다.

일요일엔 재밌는 텔레비젼 프로도 많고 난

이렇게 뒹굴거리며 책읽는 것도 나쁘지 않는데 엄마가 산에 가자니

순순히 옷을 갈아 입을 수밖에...

 

지난주에도 유명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왔으니 이번주엔 그냥

쉬었으면 좋겠는데 가까운 산이라도 가자고 갑자기 바삐 서두는 엄마를 이해 할수가

없다. 그래도 막상 밖에 나오니 공기가 시원해서 나쁘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를 빠져나와 산으로 가기전 낮은 둔덕을 걸어갔다.

엄마가 무슨 꽃인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내가 먼저 꽃으로 달려가 보았다. '엄마, 이건 하얀 미역취 맞지?'

하고 선수를 쳤더니 엄마가 맞다며 웃으시더니 미역취 틈새에 까맣게

익어가는 씨를 받아 조금전 먹은 사탕봉지에 담으셨다.

나중에 산에 가서 뿌려 주면 내년엔 아마 산에서도 하얀 미역취를 볼수 있을거라고

하시면서. 나도 꽃씨 따는걸 조금 도와드렸다.

 

산에 올라가기 전에 아파트 놀이터가 보이자 동생은 부리나케 그쪽으로 달려갔지만

난 엄마 옆에 붙어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몇개 모았다.

산엔 나뭇잎이 떨어진 빈가지인 나무들이 더 많아 보였지만 아직도

단풍든 잎들이 꽤 아름다웠다. 나는 줄곧 재잘대면서 엄마를

앞서갔다. 엄마가 그만 얘기하라 그랬지만 나는 아무래도 언어제어장치가

어디 한군데 고장이 난것이 아닌가 싶다. 자꾸만 얘기가 떠오르고 그걸 얘기

하지 않으면 답답하니 말이다. 엄마는 늘상 그것을 지적하셨지만 오늘은

숲에 들어 왔으니 더욱 할말이 많다. 산 중간쯤 도착하니 엄마가 진짜 조용히

하라고 하시니 나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산에 왔으니 숲이 내는 소리를 들어

보자고 하셨다.과연 내가 조용하게 입다물고 있으니 숲이 내는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새가 내가 앉아 있는 숲을 마주하고 서로 노래를 주고 받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새냐고 엄마한테 물으니 '개똥지바귀'나 '멧새'일거라고 하셨다.

개똥지바귀'라는 새이름은 조금 우스워서 생각나는데 지난번에 '오세암'이라는

슬픈 영화에서도 길손이가 물어본 바로 그 새였다.

 

새소리를 듣다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다. 누군가가 오는것 같았는데

아무도 없고 나무잎이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커다란 굴참나무 잎새가 지는 소리가

마치 사람의 발자국 소리 같았던 모양이다. 잎이 지는 소리와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 지는것 같은게 때로는 조용히 있는것도 괜찮은 일이란

생각을 했다. 산길을 걷다보니 지난번에 왔던 것보다 훨씬 낙엽이 많이 밟혀왔다.

엄마가 낙엽 밟는 소리를 흉내내 보란다. 동생과 나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낙엽이 발밑에서 부셔지는 소리를 만들어 보았다. 바사삭, 사그륵, 사륵 사륵,,,,

낙엽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니 마치 음악소리 처럼 느껴져서 재밌었다.

 

어느새 산정상에 다 올라왔다. 우리동네 산은 지난번 올랐던 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엄마 말마따나 참나무 잎에 노랗고 갈빛이 든 모습은 똑같이 아름다웠다.

그때 동생이 갑자기 궁금한듯 물었다. 산이름이 뭐냐고... 엄만

잘 모르겠다고 하시더니 벤치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계시는 할머니세분을

(할머니도 수다를 떠신다는게 재밌었다) 을 보더니 우리에게 제안을 하신다.

그 할머니께 가서 산이름을 알아 오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선듯 나서지 않자

엄만 비겁하게도 가서 산이름을 알아오면 산을 내려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준신다고

우리를 꼬드기기 시작했다.그러자 아이스크림에 눈이 먼 동생이 낼름 할머니들께로

 뛰어가서 산이름을 물어 보았는데 할머니들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자 동생이 그랬다. 그러면 '우리들의 산책길'이란 이름을 붙여주자고..

엄만 그런 동생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갤 끄덕이신다. 그리곤 산이름은 못 알아 왔지만

모르는 할머니께 가서 물어본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나...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숲엔 상쾌한 가을 바람이 머물고 있어서

내 기분을 조금 씻겨 주는듯 했고, 잠시후 산의 가장자리께에 왔을때 가져온 미역취씨앗을

뿌리는 일을 엄마가 해도 된다고 하셔서 기분이 완전히 나아졌다.

 

그곳에 동그랗게 땅이 패인곳이 있었다. 왜 이렇게 패였을까 궁금해서

우린 동시에 그곳에 뛰어들었다. 동생이 그랬다. 조선시대때 최무선이

화약을 실험한 자리가 그렇게 된거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아마 6.25전쟁때 그렇게 된듯 싶어 엄마한테 그렇게 얘길

했더니 그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나는 뻘쭘해져서 한편에 핀 이끼를 만져 보았다.

난 이끼가 좋다. 이끼가 있다고 하니 엄마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내가 이건 솔이끼고 이건 우산이끼라고 가르쳐 주니 그런걸 어떻게 알았냐고

하셨다. 엄만 나를 한참 어리게만 보신다 .그점이 못마땅하다.

 

산을 오를때면 늘상 앞서던 동생을 이번엔 내가 앞질렀다. 그곳에

저번에서 처럼 훌라후프가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훌라후프가 저번엔 두개 있어서 엄마랑 하나씩 돌렸는데 오늘은 한개 뿐이다.

누가 그걸 가져가 버렸을까. 두개의 훌라후프중 모래가 잔뜩 들어서

무거운것만 남았다. 누군가 살뺄려고 훌라후프에 모래를 집어넣은게 분명한

그 훌라후프로 나는 겨우 다섯번을 돌리고 그만 두고 말았다. 배에 닿을때마다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프다고 하면서도 오십번을 동생은 열다섯번을

했다. 그것 돌리고 싫증이 났는지 동생은 산비탈을 달리기 시합을 하잔다.

나는 싫었지만 녀석을 이길수도 있을것 같아 엄마가 초침을 세는 동안

죽을힘을 다해 산비탈을 달렸다. 역시나 동생이 이기고 의기가 양양하게

나를 돌아다 보았다. 나는 힘이 들어 씩씩거렸는데 엄마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고는

조용히 하라고 하시면서 한곳을 가리키는 거였다.

 

거기에 청설모 한마리가 내려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너무 귀여워서 꼭 한번만 청설모를 안아보고 싶었다. 까맣고 꼬리가

복슬복슬한게 정말이지 한번 안아보고 싶게 만들었다. 엄마의

가만 있으라는 말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청설모 한테 접근을 해보았다.

청설모는 아마도 겨울양식용 도토리를 찾고 있는듯 했다. 내가 한참이나

다가갔는데 모르고 있다가 동생까지 내쪽으로 오는 바람에 깜짝 놀란 청설모가

소나무 줄기를 타고 위로 올라가 버렸다. 녀석이 방해하지 않았으면 청설모를

한번 만져볼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어 버렸다.

 

산을 한바퀴 돌아 다시 산정상 벤치에 닿았다. 미리 준비해온 빵과우유를 꺼내

숲에서 간식을 먹었다. 낙엽이 떨어지면서 내 머리위에도 한개 떨어뜨려 놓았다.

난 내게로 온 낙엽한장을 작은모자라 생각하고 가만 있으려니 엄마가

나뭇잎이 머리에 붙었다며 떼어내 버렸다. 빵을 조금씩 떼먹자 엄만

빨리 먹으라고 하셨다. 내 취미는 천천히 먹기인데 여기서도 엄만 서둘러 먹자고

하시니 엄만 참 너무하신다. 바로앞에 하얀 수피(나무껍질을 이렇게 부른다고

엄마가 알려 주셨다) 를 한 나무 한그루는 마치 산신령이 꽂아둔 지팡이 같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내옆에선 아직 연두색과 노란색 나뭇잎을 많이 달고 있는

참나무는 마치 예복을 입은것만 같았다.

 

엄마가 산에 가자고 할때는 안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막상 숲에 와서 보니 좋은것들이 참 많은것 같아 산에 오길 잘했단 생각을

한다. 또 이렇게 쫄깃한 깨찰빵도 먹을수 있고, 평상시엔 못먹게 하시는 초코렛드링크도

마실수 있으니 더 좋은것 같다.

이젠 산을 내려가는 순서다. 벌써 간식을 다 먹은 동생은 앞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그러더니 두발로 나무기둥을 감싸고는 얼굴을 거꾸로 돌리고선

자신이 침팬치라는데 정말 작은 침팬지 표정하고 똑같아 보여서 엄마랑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산 아래로 퍼져 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오늘 일기에 오랫만에 시를 적어 볼 생각을 한다.가을이나 산을 제목으로 해서

말이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시를 지으면 엄마 정말 기뻐하실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빠르게 산아래까지

내려왔는데 엄마는 뭔가를 들여다 보느라 정신이 없다. 풀색도 물이 드는구나.고 엄마가

내려오며 중얼거렸다. 정말, 풀도 빨갛게 노랗게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가을은 참 신기하다. 나뭇잎도 풀도 모두 물이 들게 하니 말이다. 내손엔 어느새

가을이 한웅큼이 모아져 있다. 늦게핀 민들레 한송이 제일 예쁘게 물든 노란잎하나

빨간 단풍잎 하나 그리고 벼이삭처럼 낟알이 촘촘히 박힌 강아지풀 몇개,

그리고 연분홍 코스모스까지... 이걸오늘도 일하시느라

우리동네 산에 함께 오르지 못한  아빠에게  드려야지 생각한다.

다음주에도 엄마가 산에 가자고 하면 냉큼 따라 나서야지?

그리고 그때도 초코렛드링크를 사달라고 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깨찰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