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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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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산, 억새밭에 깃든 순수.


BY 빨강머리앤 2003-10-27

몇해전이었을까? 가을이면 으례 단풍과 함께 억새밭 사진을 실어 신문들은 그것들을 보러 갈 때라고 부추기곤 했던 가을풍경 속에서 '유명산의 억새밭'정경을 보게 되었다. 지는 햇살을 역광으로 하얗에 여울지던 억새밭의 풍경을 보고는 숨이 막히는줄 알았었다. 그 사진속에서 보는 유명산, 억새밭에 깃든 순수가 내 맘속으로 담박에 들어온 날이 있었다.

그후,가을이 되면 단풍으로 유명하다는 내장산도 아니고 등산객이 어찌나 많은지 등산로를 따라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찰 정도라는 설악산도 아니고 산정상에 호젓하게 가을바람을 맞고 있다는 유명산의 억새밭이 그리웠었다.

유명산의 억새밭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던 일요일아침,하늘은 파란잉크를 풀어놓은듯 맑고 깨끗하게 푸르렀다.  그 깨끗한 파란하늘을 담은 북한강은 아침햇살에 반짝이며 수많은 은빛비늘을 만들어 냈다. 강을 끼고 살아가는 강촌사람들의 작은 집과 그들을 감싸 줄듯 펼쳐진 산능선은 단풍잎으로 치장을 하고 가장 아름답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가을햇살에 반짝이는 아침강, 강가의 작은마을과 그리고 단풍든산이 오래 오래 따라왔다. 그 평화롭게 아름다운 풍경그림같던 정경이 끝날즈음에 시야를 막아서던 청평댐. 청평댐의 무작스러운 풍경이 가을빛 물든 주변환경과 안 어울린다며 주절거리는 사이 차는 청평호수에 섰고,,, 청평호수가 바라보이는 전망대에 서서 모닝커피를 마셨다. 시린호수에 비춰든 산영 또한 빨갛고 노란 산빛 그대로다. 아직 유명산은 멀었는데 호수에 비춰든 단풍든 산그림자에 취해 감탄사가 연발이다. 따뜻하게 데워진 캔커피도 호수로부터의 찬 기운에 금새 식고 다시 차를 달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산자연휴양림이란 이정표가 보였다.

직진해서 달려온 길을 오른쪽으로 꺽어 유명산으로 가는 그길부터는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고즈녘한 시골마을길이었다.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은행나무  가로수 건너 이제막 벼를 베어낸듯한 지푸라기 깔린 하얀 논들 그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마다 가을빛이 한창이었다. 아, 이런곳에 사는 사람들은 평화라는 단어와 뒹굴며 살겠다 싶은 곳이었다. 앞개울엔지난여름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전히 졸졸 흐르고 알맹이는 다 내주고 노란잎새만 햇살을 튕기고 있는 밤나무가 몇그루 서있는곳.

그런것들에 마음을 주면서 유명산에 도착해보니 주차하기 위한 차량행렬이 끝이 안보였다. 김밥과 음료수 귤몇개 그리고 사진기를 들고 867미터 정상을 향한 장도(?)에 오르는길.조금전 보았던 차량행렬 만큼이나 많은 인파가 끝도 없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그리고 나이든 부부끼리 정답게 산을 오르는 모습을 본다. 앞서가던 한무리의 사람들의 행렬이 사뭇 달라보여서 자세히 보니 장애인들이다. 수녀님들을 따라 가을산행을 나온 모양이었다. 그중 한사람이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 앉아 있었다. 수녀님과 자원봉사자인듯한 학생이 주저앉은 장애인을 향해 힘을 북돋워 주고 있었다. 못가겠다고 몇번이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수녀님의 '너도 할수 있다'라는 말에 손에 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자 같이온 일행들이 박수를 쳐주었다.(나중에 길을 다내려와 보니 수녀님 몇분을 포함한 그 일행들이 무사히 산행을 마쳤는지 산아래 야영장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무사히 산행을 마친 그들의 얼굴에 서린 당당함이라니..)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산정상에 있다는 억새밭이고 뭐고 그냥 내려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전 그 장애를 가진 사람이 수녀님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던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발끝에 힘을 주곤 했었다.그리고 아들녀석의 말마따나 '핫브레이크'가 있었으니... 녀석이 그랬다. 힘들어서 어찌 올라갈까 란 엄마의 말에 주머니에 든 초코렛을 가리키며'핫브레이크가 있잖아?^^..

 멀리서 보면 바야흐로 단풍이 한창인 산능선은 색색의 나뭇잎으로 풍성했는데 산을 오를수록 가지를 떨군 잎들 사이로 휑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미 가을은 그렇게 가고 있던 것이었다. 벌써 입을 다 떨군 쪽동백나무, 물푸레나무, 층층나무가

월동준비를 다 끝마친듯 무연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며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층층나무라는 이름을 큰소리로 읽던 딸아이가'아파트나무네?'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도 웃어 보고 산길에 떨어진 참나무 잎새가 내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귀도 귀울여 보며 산중턱 즈음에 다다랐을 때.중년의 한아주머니가 색다란 눈요기를 해주시고 지나갔다. 손자였을까, 늦둥이였을까? 아이를 업고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를 업고 산정상을 올랐다가 아이를 업고 내려오는 길이었던 모양이었다. 산에서 볼수 있는 흔한 정경이 아니었기에 산을 오르던 등산객들이 일제히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에게 눈길을 돌렸던건 당연지사. 그런데 아이를 업고 산을 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그아주머니 발걸음 한번 가벼워서 한번더 놀라 쳐다보다 풋, 뒤에 업힌 아이 옷을 단단히 입히고 손이 추울까봐 어른용 흰장갑을 아이손에 씌워놨네? 아이는 장갑이 떨어질세라 두손을 위로 들고 허수아비한테 장갑을 끼운 모양새가 되어 있어서 아이 때문에 고된 산행이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영차영차, 지팡이 짚고 오르고 또 오르니 드디어 손에 손에 억새를 들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얗게 억새가 일렁이는 정상이 보이자 감개가 무량해졌다. 유명산정상 이란 팻말앞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섰다. 기념사진을 찍기위해. 좀 촌스럽다 싶지만 우리도 여기온 기념으로 한장 찰칵!! 억새밭에 자리를 펴고 가져온 김밥에 산정상에서 팔던 사발면 국물을 마셔가며 맛난 점심을 먹었다. 갈대밭 사이사이에 마치 숨바꼭질하듯 함께온 사람들 끼리 점심을 먹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벌써 점심을 먹고 오수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순도순 이야기 보따리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점심한번 푸짐하다 싶은 번듯한 상차림으로 성대한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결같이 갈대밭이 실어다 주는 가을서정에 취한채 말이다. 점심을 먹고난 아이들이 갈대밭속을 헤집고 다니며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올커니 둘이 놀라고 하고 우리도 오수한판 즐겨볼까 싶어 밤나무아래 억새가 하얗게 울타리를 쳐준 곳에 자리를 펴고 잠을 청했다. 가을햇살로 온몸을 샤워하는 기분이랄까? 오랫만에 정통으로 쏟아지는 가을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억새가 하얗게 핀 산정상에서의 오수... 신선이 따로 있대도 부럽잖은 일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은 고난도의 길을 택해 보았다. 그길은 아이들과 가기엔 대단히 위험하고 했던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길... 잎진 나무사이로 단풍이 곱게든 당단풍나무 주홍빛이 한들거리다 한개씩 잎새를 떨구는 길. 돌돌돌 계곡물 소리가 차고 시리게 들리는 길.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둥근잎을 할랑거리던 생강나무가 기다리는 길.. 생강나무 잎새를 따서 코에 갖다대니 여전히 알싸한 생강냄새가 나던길. 반쯤은 돌이 섞여 조심조심 내려오게 되던길.

두어시간 단조로운 계곡물 흐르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게 하던길..  다리아프다고 아빠한테 업어달라 조르던 여자아이가 울던 길... 어디 다른길이 없을까요? 묻던 고달프고 끝이없을것 같이 지리하게 이어지던길.

 아이들이 노래를 줄창불러댔다. 최근에 유행한다는 '숫자송'을 계속해서 부르고 또 불렀다. 목이 아프지도 않았을까? 겨울잠 자러간 산새가 깨어 다시 나오지 않을까 싶게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눈으로 아이들을 보며 한마디씩 칭찬을 하자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더욱 높아져 갔고..'일, 일초라도 안보이면, 이 이렇게 허전한데, 삼 삼초는 어떻게 기다려~~' 그노래 나도 외울지경이 되었을때 이젠 아예 길이 없어져 버렸다. 흙도 보이지 않고 그저 돌, 돌,,, 계곡을 지그재그로 건너가며 어렵게 내려오는 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잠시 비켜서서 내려오는 이들을 기다려주는 길. 돌틈 사이로 생강나무 노랗게 아름답고 주홍빛 단풍나무 설핏 해가 기우는 가운데 더욱 고고하던 길.너무 험해서 저아이들 괜찮을까 싶은 길,계곡물을 손을 잡아 건네고 건네주던 길이 이어졌다.

몇번인가 넘어지고 다리를 비끄덩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고 내려오던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그길 못지나갈것 같은 바위투성이길을 내려와 보니 이미 해가 지려는지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 내려왔구나. 나도 남편도 무엇보다 노래를 불러가며 산속에 메아리 가득 남겨두고온 우리 아이들 대단하구나 생각이 들어 서로를 마주보며 흐뭇한 웃음을 공유했던 행복한 순간.

벼가 베어진 논가, 밤나무잎새가 떨구어놓은 낙엽진 길을 사북사북 걸어가 산에서 떠온 물을 끓여 사발면을 먹는 기쁨도 가을여행 그 한자리에 적어 두어야 할것 같다. 유명산 그 억새밭에 깃든 순수를 오늘 보았기에... 가을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