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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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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떠난 여름휴가.


BY 빨강머리앤 2003-08-11

황금같은 여름휴가를 나흘 남짓 얻어서 친정으로 가기로 한건,

명절이면 당연히 시댁으로 출동을 해야 하기에 기껏해야 여름휴가가 아니면

일년에 한번을 제대로 다녀올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정이 있는 목포의 주변에 일찌기 유홍준 교수님이 '남도답사 일번지'라 일컬은

강진이며 해남등이 가까이 있는 까닭에 그곳에 겸사겸사 다녀오는 맛이 색다른

여행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중부지방에 비가 많이 내릴거라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길을 나서는 아침, 아니나 다를까,

비가 한방울씩 떨어지면서 하늘이 먹장구름으로 가득차오르고 있었다.

차창에 빗줄기가 그어놓은 선들을 바라보며 조금은 걱정스런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다행히 중부고속도로가 시작되려는 지점에서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이고 있었다.

 

번잡한 도심을 빠져 나오자 비로소 여행의 설렘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검은천막이 씌워진 인삼밭이 인상적이던 충청도와 낮은 구릉사이에 넓은 평야을 끝간데

없이 펼쳐보이던 김제평야를 지나오는 동안, 어디서나 그리 험하지 않은 산이 펼치고

들판에 벼들이 출렁이는 걸 볼수 있었다.

시야를 시원하게 씻어 주는듯 온통 초록색 물결로 세상은 평화로움을 연출해 주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오자 진홍빛 꽃들이 산들거리는 바람에 부드럽게 날리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드디어 고향 가까이에 온것이다. 목백일홍을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곳,

그래서 온통 초록빛인 세상에 진홍색 고운 점을 찍어놓은것 같은 목백일홍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서 오랫만에 고향을 찾는 방문객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오후 4시, 서둘러야 했다. 일정대로라면 목포의 중심가에 있는 식당에 가서 콩국수로 점심을 먹고 아이들 외할머니가 기다리시는 곳으로 들어가는 배를 4시 30분에

탔어야 했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점심으로 굳이 콩국수를 먹고자 했던건 그곳에서 먹는

콩국수 맛은 특별나기 때문이었다. 직접 갈아서 상에 내온듯 그 진하고 구수한 맛을 내 일찌기 서울 그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을 들르는 누구든 콩국수를

한번 드셔보기길....

아쉽게도 그맛도 구경못하고 서둘러 선착장이 있는 목포항 여객터미널로 직행해야 했다.

 

지금이야 통통배도 아니고 흔히 여객선이라 불리는 그런 배도 아니고

자동차도 싣고 트럭까지도 실을수 있는 철선으로 바뀌었지만 아이들은 배를 타게 되었다는

사실에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십여분, 그러니까 목포앞바다에 펼쳐진 수많은 다도해 섬중 가장 가까운

섬인 친정으로 가는 길. 바람에 날리는 옷깃을 붙잡고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뒤로 갈매기가 요란스럽게 울어댄다. 책에서 본 대로라면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끼룩, 끼룩인데,

실제로는 '끼약, 끼약'하고 운다며 아이들이 한참이나 갈매기 울음소리를 따라 하는 동안

곧 배는 선착장에 닿아 있었다.

뱃고동 소리대신 선장이 확성기로 '여기는 00입니다'라고 설명을 해주는 모습 또한

예전 내가 본 그정경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었고,

선착장에서 집까지 결코 만만치 않을 삼십여분의 거리를 이젠 오분여만에 차가 데려다 주는

모습 또한 예전과 달라진 풍경이었다.

 

노인들만 남은 농촌풍경은 고즈녁하다 못해 쓸쓸했다. 어디나 우리 농촌의 모습은 비슷하게

퇴화해 가는 중이리라. 그래서 어쩌다 만나게 되는 아이들이 더욱 반가운 법이고,

오랫만에 만난 손주손녀는 또 얼마나 반가운 존재겠는가.

대문을 열자 아버지가 함박웃음으로 아이들을 반겨 안아 주셨다.

벌초를 하셨노라고 씻고 계신 엄마는 벌초를 해야 할곳이 한곳 더 있다시며

저녁먹기 전에 얼른 다녀 오마고 손녀딸과 손주녀석 볼을 한번씩 부비시곤 다시

대문을 나섰다.

 

일년만에 와본 고향집이다. 달라질것도 없지만 어딘가 허전해서 둘러 보니

늘상 봄이면 씨를 뿌려서 여름 그맘때면 화단가득 꽃들이 만발하곤 했었는데

꽃을 대신해 여러해살이 식물들이 푸른잎만 무성히 달고 있었다.

일기예보도 필요없이 날이 궂을라 치면 온몸이 안쑤시는데가 없다시는 엄마는

꽃을 가까이 하고는 싶지만 몸이 예전같지 못하시다 하셨다.

 

봉숭아 채송화 백일홍이 화단을 화려하게 장식하곤 했던 작년까지의 화단에 비해

깨진 항아리나 못쓰게된 그릇을 이용해 다년생 식물을 키우시는 엄마의 마음이

쓸쓸하게 읽혀져 오는 것이었다.

화단과 창고지붕을 연결해 심어 놓은 포도가 막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뒤로 감나무에 아이들 주먹만한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아직 일렀는지 감나무 아래 상사화는 이제야 꽃대를 키우고 있었다.

 

이른저녁, 마당에 멍석을 깔았다. 하늘엔 희미하게 반달이 떠오르고

마당앞에서 가장 잘 보이는 금성은 벌써 저기 앞산 나무 꼭대기에 달려 있었다.

마당에 벽돌을 세워 아궁이를 만들고 넓다란 돌을 구웠다.

푹푹 찌고 더웠던 날, 저녁까지도 후텁지근한 더위가 따라왔으나

그건 자꾸만 달겨드는 모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랴,

모기향을 군데 군데 피워놓고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를 모깃불삼아

고기를 구워 먹었다. 텃밭에서 막 뜯어온 풋고추랑 깻잎이 맛난 때문인지,

아니면 시골의 정취속에서 먹는 때문이었는지 아이들이 달게 밥을 비웠다.

 

사위 먹으라고 일부러 생선찌게를 끓이셨던 엄마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풋고추에 된장찍어먹느라 생선찌게는 뒷전이다.

고기를 구워먹고,아궁이에 남아 있는 잉걸불이 아까워 고구마를 구웠다.

고구마를 한개씩 호일에 감고 불속에 던져 넣고는 온 마당을 헤집고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예뻐서 사진기를 꺼냈다.

 

'아빠, 저 달도 찍어가자'

마침 서쪽하늘에서 돋아난 달이 노랗게 밝혀지고 있는 모습을 본 아들녀석이 그랬다.

 '이 카메라로는 저 달을 찍을 수가 없을거야.

특수 카메라야지 저 달을 사진에 담을수 있는 거거든' 하는 아빠의 말에

' 달이 저렇게 맑게 빛나는데 왜 찍을수 없는데...'라고 말하는 아들녀석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잠시 머물다 간 사이 고구마가 익었다는 엄마의 말에 아궁이 앞으로 몰려드는

아이들은 다시 신이 났다.

얼굴에 숯검댕이를 묻혀가며 호호 불어 군고구마를 먹었다.

'정말 맛있다'며 달빛아래서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 먹었다.

달빛은 점점 환해져 오고 밤하늘 한가운데서 북극성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북극성을 보여주고 북두칠성을 보여주고 그옆 카시오페아 자리를

보여주는 사이 여기저기에서 풀벌레들의 합창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밤이 깊어가면서 더욱 도드라지던 별빛을 바라보는 동안은 다음날 비가 오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시작된 비가 하루종일 내렸다.

 

남부지방에 호우주의보가 내렸단다.바닷가에 가서 소라도 잡고 고둥도 잡을 생각에 부풀었던 나와 아이들,그리고 내내 낚시를 할 생각에 부풀었던 남편도 하릴없이 비가 오는 밖을

바라보았다. 빗속을 가르며 지지배배 거리며 빨랫줄에 앉은 제비를 보았다.

한동안은 시골에도 제비가 찾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식량증산을 위해 농약과 비료를

많이 사용한 때문에 농촌도 많이 오염된 탓이었는데 그렇게 한동안 볼수 없었던 제비가

처마밑에 집을 짓고는 아기제비를 돌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할일없이 마루에 앉아 장하게 비오는 양을 보다가 어른제비가 아기제비를 돌보는걸

들여다 보았다. 쉴새없이 움직이며 한번은 먹이를 날라오고 낯선 우리가족이 혹시라도

아기제비에게 해라도 입히지 않는지 수시로 방어를 하듯 제비집 주위를 빙빙 돌기도 했다.

 

다행히 오후 늦게 비가 그쳤다.

이때가 싶어 부랴부랴 낚시도구를 챙겨 바닷가로 차를 몰았다. 예전이면 한참을 걸어서

밭도 지나고 도랑도 지나고 외딴집을 지나 고추를 말리는 건조장을 지나  약수터를 지나

언덕 하나를 넘고 갈대숲이 우거진 염전을 지나서 걸어갔을 그길을

차로 단숨에 달려 도착했다. 미끼를 현지 조달하자며 갯벌을 뒤져 갯지렁이를 잡아서

낚시줄을 바다에 드리우는 남편옆으로 아들녀석이 조르르 달려 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물고기가 걸리지 않자 금방 심심해진 아들녀석이 한참 썰물이

빠져나간 바위틈에 숨어있는 고둥을 잡는 엄마옆으로 따라 붙었다.

딸아이는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있는 갯가생물들을 들여다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가 고둥속에 들어가 있네, 이게 소라게 맞지?' 소라게를 잡고

바위틈에 숨어있다가 인기척에 얼른 달아나는 게를 잡으며 신이난 딸아이와

파래한줄 뜯어와 '엄마, 이거 뭐야?', 따개비 하나 들고와 이게뭐야, 를 연발하는

아들녀석은 그날 바닷물이 날고 드는 사이 그곳에서 서식하는 뭇생명들의 여러이름을

불러보고는 신기해 했다.

그러다 아빠가 '물고기 잡았다'를 외칠때마다 쪼르르 아빠 옆으로 달려가 퍼득거리는

물고기를 보며 신나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었다.

작은물고기는 살려주자며 아빠가 어렵게 낚아올린 물고기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던

아이들의 이쁜마음을 들여다 보던 일은 얼마나 가슴 뭉클한 느낌이던지....

 

고향에서의 이틀밤을 보내고 상경을 위해 일찍 일어난 아침,

엄마는 풋고추를 한보따리,된장과 참기름 그리고 마늘장아찌에 깻잎장아찌까지

바리바리 마루에 늘여놓고는 얼른 챙기라 하셨다.

이별의 순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갑작스럽게 오는 법인듯 하였다.

이틀을 지낸 고향집에서의시간이 순간처럼 여겨지고 

엄마와 아버지를 뒤로 하고 돌아서와야 하는 그마음은 잠시 멈춰진 시간속에

들어와 있는듯 했다.

 

'또 올게요.....'

눈물이 날것 같아 얼른 차에 올랐다. 멀어지는 엄마아빠는 여전히 나를 향해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