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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당신께(사랑의 편지)


BY 선물 2009-08-06

앞에서 걷고 있는 당신을 봅니다.

왠지 지쳐 보이는 당신의 뒷모습.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당신, 정말 잘난 사람이었지요. 180센티미터를 훌쩍 넘었던 큰 키의 건장했던 당신은 걸음걸이도 지금과는 달리 얼마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던지요.

그렇게 거칠 것 없이 보이는 당신을 나는 부신 듯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며 내 평생의 옆자리에 당신을 세웠습니다.

당신 또한 그렇게 나의 옆자리로 걸어왔지만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사실 정확히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사랑이란 이름이 두루두루 그럴듯해 보여서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결혼이란 것은 적어도 상대와 함께 사 계절을 두 번은 겪어본 뒤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우린 여름 한 계절만 온전히 겪었을 뿐, 무엇이 급했는지 가을의 초입에 결혼이란 중대사를 치르고 말았지요.

그래요. 난 사랑이라 믿었어요. 순식간에 타오르며 달뜬 감정들에 취해 겁도 없이 내 인생을 당신께 걸었지요.

후에 삼 대 독자 귀한 아들인 당신은 어머님이 며느리 감인 나를 맘에 들어 하셔서 결정했던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 말은 믿지 않았답니다.

당신도 취하듯 내게 맘 뺏기지 않았다면 밥 한 끼 먹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란 엄청난 인륜지대사를 그렇게 쉽게 결정했을라구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렇게 자위하며 맘을 달래도 마음 한켠 시리고 서러웠던 것은 사실이에요. 갓 결혼한 신부는 사실 당신의 사랑 표현이 참 고팠습니다.

가끔 민망함을 무릅쓰고 나를 사랑하긴 하는 거냐고 묻던 제게 당신은 그랬지요. 그 말이 왜 필요하냐고.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고.

맞아요.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 그 자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왜 굳이 그 말을 원했을까요. 당신은 말에만 인색했던 것이 아니라 그런 감정 자체가 많이 부족했었던 겁니다.

평생을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생활하다가 겨우 사, 오 개월 만남 끝에 결혼한 제겐 당신의 사랑이 참 절실했는데 그래서였을까요, 우린 내내 삐걱거렸지요. 서로를 못 견뎌하던 신혼의 시간들은 결국 서로를 밀어내게 만들고 말았지요.

돌도 안 된 딸아이를 두고 전 당신의 집을 나왔고 우린 법적으로도 남남이 될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하지만, 우린 둘 다 최종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고 그리고 수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재결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이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지금 고백하자면 당신에 대한 그리움도 존재했었답니다.

그 후로 우린 겉보기엔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부부로 살아왔지요.

오히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삼대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보기에 아름다운 생활이었어요.

하지만, 속으로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부부생활은 다 내가 인내하고 견디어내서 유지되는 것이다, 라고 제 희생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이들은 자랐습니다. 이십년의 세월은 어머님, 아버님의 주름을 깊게 했고 당신과 제 머리를 흰머리로 물들일 차비를 합니다. 아이들도 스물의 아가씨와 열 여덟의 사춘기 남학생으로 자라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당신을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일이 풀리지 않는지 곁에서 지켜보는 제 간장이 다 녹아났습니다.

실은 때때로 당신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의 고통이 극심할 때 전 마음으로부터 당신에게서 달아나곤 했습니다. 한 번 떠난 적이 있던 몸과 맘, 언제라도 마음이 시키면 당신을 떠나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생각이 저로 하여금 당신을 견디게 했고 가정을 지키게 했다면 이해가 될는지요. 당신을 영영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목울대가 뻐근해지면서 명치께에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지요. 난 당신을 영원히 떠나지 못할 사람이란 것을요.

그러던 얼마 전 당신은 제게 뜻밖의 고백을 했지요.

만약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그때도 나는 당신을 만나 함께 하고 싶어, 라고.

아니, 이게 지금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요, 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세상 다른 사람은 다 해도 당신은 결코 못할 말이 아니었던가요.

제 팔에서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당신은 눈치 채지 못했을 거예요. 농담처럼 웃으며 음, 난 좀 더 생각해 보구요, 가볍게 대꾸했던 제 반응으로 그날의 대화는 끝났지만 우린 길고 긴 시간을 상념에 빠져야 했습니다.

여보,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는데 전 그렇질 못했어요. 얼핏 맺힌 눈물은 온전히 기쁨의 몫이어야 했는데 오히려 슬픔에 가까운 아픈 것이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깨달아지는 것이 있더군요.

그동안 표현하진 않았을 뿐, 당신은 절 한결같이 사랑해주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일들로 절 아프게 한 적도 많았지만 세월과 함께 그런 일들도 많이 줄었고 또 변하려고 많이 애쓰는 당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쉰의 나이에 선 중년의 남성으로 하여금 새삼스럽게 아내에게 그런 고백을 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맞아요. 당신은 약해진 거예요. 작아진 거예요.

세월이 그렇게 크고 당당했던 사람을 깎아내고 할퀴고 하면서 점점 작게작게 만들고 말았어요. 당신의 세월은 그렇게 모질었던 겁니다. 이루려던 일들의 실패와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 아이들로부터 받게 되는 상처들이 당신을 갉아먹고 왜소하게 만들었지요. 그 길에서 함께 힘들어 했지만 당신이 가장의 자리에서 짊어져야 할 무게와는 비교가 될 수 없었겠지요.

아이들에게도, 부모님께도, 또 아내인 제게도 이제 사랑해 줄 일만 남았다고 고백하는 당신.

그것이 눈물 나게 고마우면서도 당신이 그렇게 되기까지 감내했을 시련들이 절 그 이상으로 아프게 하고 있음을 알고 있나요.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스스로의 몸과 맘이 건강해야 한다면서 당신 스스로 병원을 찾아 진단받고 우울증 약을 복용한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게을러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저를 다독여서 저녁마다 호수공원으로 산책 나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전 이제야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내 희생으로만 유지된 것이라 믿었던 우리의 인연이 어쩌면 당신의 더 큰 희생이 바탕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두 번의 사계절이 아닌 그 열배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당신을 알 것 같습니다.

이젠 다시 당신이 예전의 당당하면서도 인색했던 남편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전 기꺼이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당신, 그러나 제겐 당신의 말들이 보약이 되었네요. 물론 앞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되어요. 이미 그 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니 다시 힘내고 몸과 맘의 건강을 회복하세요.

지난밤에도 자고 있는 당신의 곁에서 주름자리가 제법 잡힌 당신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뺨을 당신 볼에 가만히 대었습니다.

저, 자주 그러는데 당신은 아마 모르시겠지요.

이제 정말 서로의 인생길에서 영원한 옆 지기로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가요.

씩씩하게 걷는 당신을 보게 되면 저도 다음 생에서 또 당신을 선택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힘내고 파이팅 하자구요.

사랑합니다. 내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