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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는 바다1(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BY 선물 2004-02-10

책을 다 읽고 난 후 숨을 고르던 나는 뭔가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이 울컥 느껴져서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무슨 미련이 더 남아 있었던 것일까? 자꾸만 이 책의 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미련이 스스로에게도 잠시 우스워 보였다.

<갑판 난간에 달맞이꽃처럼 하얀 용혜의 얼굴이 있고, 물기찬 공기속에 용빈의 소리없는 통곡이 있었다. 봄이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

이 페이지를 넘기면 글이 끝났음을 확인하게 될 것 같았다.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나로 하여금 페이지를 더 이상 넘기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그리고 소리 없는 용빈의 통곡이 애간장 끓이는 흐느낌이 되어 자꾸만 귀에 들려오는 듯 하고 그녀의 가슴속에 맺혀 있을 한이 내 뜨거운 심장 위로 포개어 지는 것만 같은 그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끝 구절임이 분명해 보이는 글귀가 적혀 있는 페이지에 한 손을 끼운 채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맨 앞표지를 넋 놓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왼쪽 윗부분에 푸근한 울산 큰애기 출신인 우리 큰어머니의 따스함이 그대로 연상되는 작가 박경리님의 고운 미소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아래로 하얀 바탕 위에 `김 약국의 딸들'이라는 제목과 함께 두 마리의 나비가 나풀거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들도 춤을 추듯 나비와 함께 나풀거렸다. 내 눈길은 잠시 그 자음과 모음들을 따라간다. 그리고 깜짝 놀란다. 그들이 조합해 낸 이름들 때문이다. 아마 한동안은 시퍼런 멍으로 나와 함께할 기구한 운명의 슬픈 여인들. 통영의 그 고운 바다 빛을 닮았을, 그리고 향긋한 유자 향을 품고 있을 동백꽃 같은 그녀들의 이름이었다.

나는 한번 더 포옥하고 긴 한숨을 내 쉬어 본다. 그리고 투박한 손을 걸쳐놓고 있었던 페이지를 펼친 뒤 그 다음 장을 열어 보았다. 스르르 명치끝에 걸려 있던 한 조각 설움이 기어이 나를 전율하게 만든다. `그래, 끝이었어, 정말 글이 끝난 거였어.' 그럴 것이라 짐작은 했으나 막상 확인하게 되니 여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창 밖의 어둠 탓이었을까? 자꾸만 깊이 가라앉는다. 너무 몰입했었나 보다... 몰입해 있는 동안 인물들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사랑을 주었었나 보다. 책을 덮으면 그 속의 인물들과 영영 이별이라도 할 것처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작중 인물들과 나는 하나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아픔이 한결같이 내게도 상처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사실 이 글과의 만남은 세 번째였다. 하지만, 이전의 만남은 벌써 십 수년 전의 일이어서 큰 감동으로 남아 있는 글임에도 몇몇 선명한 기억만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뿐, 그 외의 장면들은 흐르는 시간과 함께 그렇게 가물가물 옅어져 가고 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만 해도 결혼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 때 나는 첫 아이 하나를 두고 나름대로는 힘든 시집살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늘 붙박이 장롱처럼 집에만 박혀 있던 내게는 하루 하루가 늘 똑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마침 구청에서 무료로 책을 대여해 주는 이동도서관을 운영했던 까닭에 나는 참으로 고맙게도 마음껏 좋은 책과의 만남을 즐기게 되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불과했을 뿐이지만...

크지 않은 승합차를 개조한 도서관은 비록 좁기는 했으나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로 인해  고르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만들었다. 내가 수많은 책들 중에서 어떤 책을 선택 할 때 가장 우선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어떤 작가 분의 글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결혼과 동시에 절감하게 된 여성 성(性)이 갖는 굴레 때문이었는지 조금은 고단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선택하는 경향이 짙었던 것 같다.

그때 절묘하게 만난 책이 바로 `김 약국의 딸들'이었다. 거의 한 세기를 뛰어 넘는 이야기임에도 나는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한 호흡으로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읽었던 내용 중 몇몇 장면은 전혀 흔들림 없는 기억으로 내 가슴속에서 오랜 세월 함께 숨쉬게 되었다. 또한, 책을 읽고 난 뒤 한동안 입 속에서 맴돌던 마음의 소리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억울하다고, 여자라서 억울하고 가엾은 인생들의 고단함이 너무나 억울하다고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때 내뱉지 못한 말들은 그대로 박제된 속울음이 되어 그렁그렁 내 속을 끓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김 약국의 딸들' 독후감공모 행사가 있다는 것을 신문 어디에선가 스치듯 보게 되었고 그 즉시 주저하지 않고 서점을 향해 달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 책에 욕심이 많은 중 1 딸아이에게도 꼭 읽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원래 나는 비극을 사랑했던가? 책을 읽은 후로는 통영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 한 켠이 시려지면서 아릿한 슬픔이 묻은 넘실거리는 울음의 바다를 떠올리게 되었고 막연한 그리움 같은 감정이 바다 비린내와 함께 훅하고 끼쳐왔던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자유의 날개를 활짝 펴고 마음껏 원하는 대로 다닐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조선의 나폴리 아니, 지금은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항구도시 통영을 꼭 한번 찾아보리라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어둑어둑해진 시각, 통영의 바다에 가면 어쩜 야생화 같은, 그러나 내겐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지는 여인 용옥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된다. 투박한 입술을 가진 심정 고운 그녀를 만나면 꼭 껴안아 주고 싶다. 그리고 그대야말로 진정 아름답다고, 그래서 정말로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 덧붙여 전할 수만 있다면 용옥에 대한 기두의 애틋함도 함께 전해 주고 싶다.

그렇게 오랜 날들을 아픔이 되어 나를 울리던 용옥은 과연 그 깊은 바다에서 어떤 생각들을 떠올리며 생을 마감했을지 잠시 그녀의 마음을 따라 가고 싶어졌다. 부산으로 기두를 만나러 가며 우연히 듣게 된 정 국주 마누라의 말을 떠올리며 몰락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자신의 집안을 한탄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시아버지인 서 영감의 짐승 같은 행동을 떠올리며 독한 한이라도 품었을 것도 같다. 그도 아니라면 기어이 그 앞에서는 여자이고 팠을 기두의 품과 따스한 마음에 대한 간절함을 접어야 하는 사무치는 설움을 안으며 이슬처럼 스러져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용옥이 끝끝내 아기를 껴안은 손을 풀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오로지 이승과의 이별을 맞게 된 아기에 대한 절절한 모정만을 안고 차디찬 심해로 가라앉았을 것이란 생각이 더 옳을 것 같기도 하다.

`김 약국의 딸들'에서는 등장하는 여인들의 대부분이 참담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비극은 이 글의 첫 부분에서부터 잉태되어 있었다. 어쩜 그 이전부터였을 지도 모르나 일단은 숙정이라는 여인으로부터 간창골의 슬픈 사연은 시작된다. 여인의 정결함을 의심받고 난폭한 남편에게 심한 매맞음을 당한 뒤 비상을 먹음으로써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여인이 바로 김 약국 성수의 어머니이다. 성수는 결국은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비련의 어머니를 꼭 닮았고 그녀의 한이 서린 집을 자주 찾게 된다. 큰어머니로부터 키워지지만 따뜻한 사랑이 담긴 보살핌은 받지 못하는 그는 유일하게 사촌인 연순을 마음으로부터 의지하며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고 또 병약한 몸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 그렇게 남겨진 성수는 인생 그 자체가 슬픔이고, 한(恨)인 사람이다. 큰어머니 송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서도 그의 인생이 결코 평탄치 않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그의 딸들 역시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험난한 굴곡의 인생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김 약국의 처 한실 댁은 원래 첫 아들을 낳았으나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림병 마마로 아들을 잃고 만다. 그 뒤로 딸만 내리 다섯을 낳았으니 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은 이 땅에서, 그것도 출산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여자 탓으로 돌리던 그 시대 관습에 비추어 보자면 큰 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약국은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는 한실 댁도 어느 정도 남편 복이 있는 여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다섯 딸을 키우며 늘 아들 이상으로 생각하고 하늘처럼 떠받들었으니 자식 키우는 어미 된 마음에서는 어디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딸들이 큰 자부심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딸 용숙이 과부가 됨으로써 딸들에 대한 그녀의 찬란했던 희망들은 왠지 불길한 예감으로 색깔을 바꾸고 만다.

사실 용숙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김 약국으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으며 자랐다. 어쩌면 그녀가 가진 욕심과 야망도 그런 성장 과정에서 생긴 정신적 결핍으로 인해 형성된 부정적 산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용숙은 훗날 영아살해사건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참으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되지만 용케도 미꾸라지처럼 그 일로부터 빠져 나온다. 또한, 그 사건 이후로 친정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된 그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혼자만의 악착스런 욕심으로 세상을 독하게 살아가게 된다. 세상은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흉을 보지만 그녀는 돈이라는 무기로 사람들을 아래에 두고 부려먹고 또 그것을 미끼로 해서 스스로 대접받게 만들고 만다. 비록 내키지 않는 대접일 망정 돈 앞에 약한 사람들은 숱하게 많아서 용숙은 맘껏 그 돈의 위력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큰 딸 용숙에게 미운 마음도 있지만 또 그만큼의 연민도 함께 갖게 되었다. 상처받은 영혼의 고단함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까닭이다. 그리고 외형적인 풍요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영혼은 사실 너무도 초라하고 외로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둘째 딸 용빈은 김 약국의 다섯 딸 중 가장 똑똑하고 이성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질적으로 한집안의 아들 같은 막중한 위치에서 가족의 몰락을 끝까지 지켜보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그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까지 잃게 되는 참담함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물론 용빈은 끝까지 그녀답게 초라한 모습으로 무너지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그녀의 당당함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과연 이 세상에 정말로 강한 여자, 정말로 강한 사람이 있는 것인지 그것이 내겐 늘 의문이었다. 그저 강해 보이는 여자, 강해 보이는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 아닐는지... 속으로 아픔을 다 삭혀야 하는 사람.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자존 감을 느끼며 살 것 같은 사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진실도 실상은 여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쩜 그들은 스스로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세상을 고단하게 살아가는 또 다른 연민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리라.

셋째 딸 용란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시대를 잘못 만난 여인이란 생각이다. 서로의 처지 때문에 이루지 못한 사랑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뜨겁게 자신의 몸을 불태울 만큼 도전적이고 자기애착이 강한 여성이다. 물론 그녀의 그런 굴절된 애착은 어쩜 자포자기하는 심정에서 나온 몸부림과도 일맥상통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만약 자신이 원하던 한길이와 짝을 이룰 수 있었다면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까지 험한 종말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머니 한실 댁 또한 나중에 그것을 후회하지만 이미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 후에야 갖게 된 때늦은 후회에 불과했다. 그리고 오랜 고정관념의 벽을 깨부술 만큼 강한 의지를 가진 여인도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용빈의 눈에 김 약국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한길 댁이 그렇게까지 답답해 보였을 것인가...
용란은 여러모로 불나방을 닮아 보인다. 자신이 타 죽을 줄도 모르고 불만 보면 덤벼드는 불나방. 그녀의 그런 열정적인 집착은 끝내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가 사랑하는 한길이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까지 정신을 놓치게 만들고 만다. 용란 또한 어떤 면에서는 감싸주고 싶은 부분이 많은 여인이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그녀의 뜨거운 가슴이 시대만 잘 만났다면 오히려 빛이 났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자꾸만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전형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그녀가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계속 손을 내밀어 주고 싶은 여인이었던 용옥과 그녀를 삼킨 차가운 바다는 나를 오랜 세월 슬픔으로부터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를 참으로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괴한의 덮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아버지인 서 노인을 애타게 불렀던 용옥. 그러나 너무나 기가 막히게도 자신을 덮치려 하는 자가 바로 자신이 도움을 청하고자 했던 그 시아버지였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더럽고 수치스런, 그래서 차마 겪어서는 안 될 일을 지옥처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편에게조차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로서의 버려진 삶이, 그 눈물이 그렇게 가여울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