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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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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랑과 문집


BY 선물 2003-11-17

서울 와서 처음 살았던 잠실 5단지는 대단지 아파트였다. 당연히 학생들도 많아서 주민들은 관리사무실 위에 독서실을 마련해 달라는 건의를 했었다. 그 덕분에 고 3 내내 가까운 독서실을 저렴하게 이용하게 되었다. 공부는 대충 한 것 같은데도 독서실은 참 열심히 다닌 기억이다. 물론 엎드려 잔 시간도 제법 되었을 것이다.

독서실에 다니던 어느날 내 지정석 책상 위에 예쁜 편지지와 함께 지갑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누굴까? 궁금해졌다. 그 당시만 해도 일본 팬시용품이 흔하지 않았을 때라 처음 갖게 된 일제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예쁜 연필, 샤프 등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놓여 있는 일이 생기게 되자 무턱대고 받는 것만 좋아라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대충 짐작되는 남학생이 있었다. 좀 무섭게 생긴 아이였는데 내게 자주 말을 걸려고 했기 때문에 그냥 그 아이로 짐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독서실 총무오빠한테 가서 물었더니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 남자아이는 아니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장래희망이 대통령인 그 남학생은 지금도 영부인감을 열심히 물색중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마 나는 영부인 감이 아니었나보다.
`치, 대통령아니라 대통령할아버지라도 너같이 무섭게 생긴 사람은 싫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행으로 여겼다.

나중에 총무오빠가 말해 준 남학생은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달려 나와 자전거를 세워주고 묶어주고 했던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그 때 고3이었으니 나 또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그 남자아이는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귀엽고 귀티나는 모습이 거부감을 주지는 않았고 특별히 추근대지 않아서 그냥 늦은 밤에 집으로 갈 때만 바래다 주어도 되겠느냐는 제의를 해 오길래 받아 들이게 되었다. 부모님도 이사하기 전까지 아파트 한 동에서 살던 그 친구를 자주 보셨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실 정도였다.

그 해에는 이 웅평씨가 비행기를 몰고 왔었다. 독서실 총무가 사이렌소리와 함께 들려준 소식은 `이건 실제상황이다. 그러니 짐싸고 집에 가서 방송을 들어라'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집에 갈 때 잠시 그 아이와 마주친 나는 서로 불안한 눈빛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연합고사가 끝이 나고 처음으로 내게 레스토랑이라는 곳을 구경시켜 준 것도 그 친구였다. 외식이라고는 중국집이나 가벼운 한식집이 전부였던 나에게 그 친구가 데리고 다닌 곳은 화려한 곳들이었으니 한참은 어리둥절 촌스러운 모습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오히려 그런 내 모습이 더 정상적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해 대학입시에서 그 친구는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합격발표가 난 후로는 단 한번의 연락조차 해 오질 않았고 독서실을 떠난 우리는 다시 만날 기회를 갖지못했다.

그때 나는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대구에서 여고에 다닐 때 축제에 냈던 귀한 문집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순수했던 마음을 담은 글과 온갖 솜씨를 부려 꾸민 정말 소중하게 간직할만한 문집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속으로 그 문집을 결혼할 남자에게 선물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문집을 그 친구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만 것이다.

철이 없기는 했지만 설마 그 친구와의 결혼을 생각했을 리는 천부당만부당했을 텐데 그런 성급한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엉뚱하게도 그 친구의 마음도 모르면서 혼자 소설을 쓰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진실로 생각하고 혼자 마음 아파 했으니 사람이 가끔 제 꾀에 제가 속는다고 꼭 그런 꼴이 되어 버렸다.

입시에서 실패한 그 애가 나를 죽도록 좋아하지만 자격지심에 내 앞에 못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고 그 친구가 너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 친구에게 받은 마음에 대한 답으로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그 문집을 떠 올리고 말았으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즉흥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예쁘게 포장한 문집을 들고 그 친구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친구가 집에 없어 누나에게 건네주고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내가 생각했던 각본과는 달리 그 친구는 계속 연락을 해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뒤 그렇게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누가 순대를 사와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뭔가 질깃한 것이 씹혀서 엄마한테 뭐냐고 여쭤보니 "돼지 귀다. 마이 무라(많이 먹어라.)" 그러시는 것이었다. 평소 비위가 약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 날 따라 정말 돼지 귀는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양치질하고 난 뒤 외출했는데도 여전히 그 이상한 느낌이 혀 끝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길에서 갑자기 또 돼지 귀가 생각나더니 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심하게 구역질을 하고 나니 눈알이 다 빨개지고 사람 꼴이 말이 아니게 변하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오랜만이다." 하는 그 친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그 친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속이 울렁거려 사정이 있다는 말만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왜 하필 그 때 그런 모습으로 그 친구를 만났는지 참 당황스러웠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 그 친구를 뒤로 남겨 두고 돌아 설 때 마음이 답답했었다.

드디어 그 날 밤, 그 친구로부터 운명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럼 그렇지, 지가 날 얼마나 좋아했는데...'
반가움을 가득 실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을 내게 하고 말았다.
"내가 지금 책을 좀 팔아야 하는데 네가 좀 사줄래. 그리고 너도 팔 수 있으면 팔아 봐. 몇 퍼센트 떼 줄게"
하도 기가 막히고 흥분이 되어 그냥 전화를 끊고 말았다. 아마도 그 친구는 다단계판매 같은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소녀와 소년의 풋사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기억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날 위해 있는 돈 없는 돈 다 써 가며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던 친구가 왜 갑자기 그렇게 연락을 끊었는지, 그리고 왜 그런 불쾌한 전화를 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지금쯤 그 친구, 아내에게 이러고 있을 것 같다.
"옛날에 날 무지 좋아했던 애가 이 문집까지 내게 줬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데?"
"그냥 차 버렸지."
"역시 자긴 눈이 높아. 홍야,홍야'

즐거운 부부 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 나쁠 것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딴 미련은 없는데 딱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 문집 돌려 다오."
기도라는 제목을 가진 그 문집은 절대 그 친구의 몫은 아니었는데...
이 글을 쓰며 다시 한 번 씁쓰레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내 몫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