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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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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도 모르면서 해 보는 여자의 술이야기


BY 선물 2003-09-02

나는 술에 대해 참으로 무지했다.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를 포함해 우리 가족들 누구도 술을 잘 못했기 때문이다,그저 기분으로 한 잔 마시기만 해도 얼굴 색 뿐만 아니라 온 몸이 붉게 피어 오르니 아무래도 술이 받는 체질은 아닌 듯 싶다.그런 집의 딸자식인 내가 술을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음은 당연한 것이리라.

한 번은 과에서 가는 엠티를 가지 않고 대신 마음 맞는 몇 친구들과 함께 바다를 보러 경포대로 간 적이 있었다.여름의 끝 자락에 가서 보았던 밤바다는 한 여름의 몸살을 치뤄 낸 바다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고단함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묵묵히 힘찬 파도 소리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어둠에 잠긴 바다는 형체로서가 아닌 소리로서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었고 그런 감흥에 젖은 친구들은 언제 준비해 왔는지 캔 맥주를 꺼내서 민박집 마당의 평상에 꺼내 놓았다.그러나 나는 유독 혼자서 방 안에 틀어 박혀 있었다.이유는 단 하나,민박집 주인 할머니 앞에서 새파랗게 젊은 여자들이 술을 꺼내서 마신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그것이었다.

그러자 밖에서 한참을 투덜대던 친구들은 참 잘나고 유별난 친구를 둔 덕분으로 그렇게도 그리던 밤바다에 젖어 낭만을 즐기려 했던 술자리를 접고 허름하고 낡은 방 구석에서 노름하는 술꾼들 모양 술을 마셔야 했으니 얼마나 내가 얄밉고 속 터졌을지 돌이켜 생각해 봐도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고서도 들어 와서 술 마시는 친구들을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보는 양 가재 눈을 뜨고 보았으니...


그렇게도 앞 뒤 분위기 파악 못하면서 나 잘났소 하던 내가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꼭 그렇게 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신입생 환영회나 각종 모임들에서 맥주 정도는 맛보았지만 `그래,술이란 게 이런 거야!'라고 할만큼의 술은 마셔 본 적이 없는 내게 드디어 거나하게 취할 날이 오고 만 것이다.

아버지조차 못 드시는 술이라 따로이 술에 대한 예절이라곤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는 어느 날 친구들 몇과 어울려서 분위기 그럴 듯한 주점으로 가게 되었다.그 때 처음으로 소주란 것을 마시게 되었는데 첫 한 잔이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참 달게 느껴지는 것이었다.주점의 조명은 분위기를 몽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따끈한 두부 김치와 보글보글 끓는 얼큰한 찌개 안주는 겨울 술자리에는 더 할 나위 없이 제격이었다.

한 잔이 달게 넘어 가니 내 몸은 두 잔,석 잔,넉 잔 겁 없이 술을 그야말로 술술 잘도 받아 들였다.
"에고,쓰다더니 술이 왜 이렇게 달기만 하냐?"친구들은 단 숨에 술을 들이키는 나를 신기하게만 바라 보았을 뿐 그래 봤 자 그네들도 어린 스무 살에 불과 했고 세상사에 무지 하기가 나와 다름 없었으니 아무도 말려 줄 생각을 않았던 것이다.여섯 잔을 들이켰을까,그 순간 나는 왜 술을 마시면 `캬아!'하는 소리가 나오는 지를 알 수 있었다.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핑 돌면서 속이 거북해 지기 시작 하더니...그 뒷 이야기는 생략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리게 되자 갑자기 슬퍼지기 시작했다.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대여섯 명의 친구들 중 두 명인가가 내 눈물의 파티에 동참해서 그야말로 맨 정신으로는 보기 힘든 장면을 연출해 내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리 슬펐을까?정확한 이유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그저 내 속에 내재되어 있던 어떤 응어리들이 그렇게 표출되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술에 관한 한은 아버지를 닮지 않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말간 얼굴이 되니 언제나 부모님 앞에서는 순진한 딸아이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내 첫 술 경험은 그렇게 눈물로 질펀한 자리였던 것이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속이 부대끼고 사람을 젖은 걸레처럼 형편 없이 만드는 술이 그 뒤로도 계속 끌렸으니 아무래도 나는 분명 돌연변이 술고래였던 것 같다.물론 첫 술자리 뒤로는 조금은 세련된 모습으로 급하지 않게 술을 마셨으며 엉망으로 취하는 일도 드물게 되었다.다만 알 수 없는 묘한 슬픔은 계속 느껴져서 눈치 안 봐도 되는 편안한 술자리에서는 마음 놓고 우는 일들이 있었으니 그래서 술 예절은 어른 앞에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것인가 보다.


그런 나에게도 드디어 술 선배가 될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성당 주일학교 교사 회에서 같은 동기-초등학교 입학년도 기준-남자 교사들이 화이트데이라고 여교사들을 초대한 것이었다.이 친구들은 그리 자신있게 썩 모범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와는 조금 다르게 그야말로 공부만 알고 교과서에 나오는 바른 생활만 하던 친구들이었으니 술에 대해서는 내가 그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고 있던 터였다.

당시 남자친구들은 주머니 사정이 빈약할 때였고 또 없는 대로의 낭만을 사랑할 줄 아는 친구들이어서 포장마차들이 즐비한 노상주점에서 그리도 유명한 순대를 안주로 삼아 서투른 술자리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그 때 남자들은 주로 재수를 했던 친구들이 많아 오히려 우리들보다 더 촌스러운, 신입생 티를 겨우 벗은 때였으니 그 친구들이 우리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그 중에서도 모범 중의 모범인 한 친구가 꼭 몇 개월 전 내 첫 술자리처럼 그렇게 겁도 없이 소주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우고 말았다.그 때 나는 술 선배답게 어느 선에서 그 친구를 말려야 했으나 너무나도 요조 숙녀였던 그 친구의 또 다른 모습이 신선해 보여서 그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그 친구는 잠깐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서더니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 앉고 말았다.나는 속으로 `너도 이제서야 술의 위력을 생생하게 절감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친구를 부축해서 일으켰다.함께 있었던 십 수 명의 친구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그런데 술에 취한 그 친구는 꼭 나와 닮은 모습으로 엉엉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왜 우냐는 다른 친구의 물음에 아주 걸작인 대답을 해주었다."내가 취하다니..흑흑...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내가 취하고 말다니..."
늘 올곧게만 처신하던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어 그렇게 운다는 것이었다.나는 옆에서 나직하게 한 마디 해 주었다."인생은 다 그런 거야."라고...

그러나 그 친구의 비밀을 나중에 알게 되는데 그 친구 결혼 전,함 받던 날 친구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내 딸이라고 하는 자랑이 아니라 이 아인 정말 어디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딸자식이야.단 한 가지만 빼면 말이지."그 단 한가지가 무엇이냐고 여쭤 보자 "나를 닮아 술고래거든!" 아마 그 첫 술자리 이후로 술의 매력에 흠뻑 빠졌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들끼리의 만남에서도 항상 술이 앞에 있으면 좋았던 나는 적당히만 마시고 절제할 줄 알면 술의 긍정적인 면도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물론 술 마시고 슬픔에 겨워 우는 것은 보기 싫지만...

그러나 그렇게도 술을 사랑하던 나는 아버지처럼 술 한 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남편과 만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아쉽게도 더 이상 그럴듯한 술과의 만남을 갖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희한하게도 남편은 자신보다 술을 더 잘 마시는 아내를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고 술이 있는 자리에서 동석한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보다 훨씬 술을 잘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이었다.아무래도 아내의 술실력을 뿌듯해 하는 남편에게 내 주사를 한 번 보여 주어야 하나 보다.


시아버님께서는 젊어서 술을 좋아 하셨다고 한다.지금도 저녁이면 반주를 곁들여 진지를 드신다.그러나 예전에 젊어서 아버님 술 때문에 고생 심하셨던 어머님은 지금도 아버님 술 드시는 모습을 마뜩찮아 하신다.그런 어머님 영향인지 언젠가 백화점에서 맥주 시음 행사 때 술을 마시는 내 모습을 본 우리 딸이 놀라며 하는 말이 "어떻게 여자가 감히 술을 마시지?"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버님은 며느리와 함께 대작하시고 싶어 하실 때가 있으신 듯 하다.물론 술이라면 손사래를 치시는 어머님 앞에서 그리는 못하지만...


남편은 가끔 술 생각이 나면 자기에게 말하라고 한다.하지만 이제는 혹여 술 마실 기회가 생기더라도 한 잔 술에 몽롱해지고 속 거북해지니 늙어가면서 부모님을 더 닮는다는 말처럼 나도 그리 되는 것 같다.그러나 술없이도 마음으로 취하는 법을 알고 있고 그것도 근사한 모습으로 취할 줄 아니 더 이상 알코올엔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그래도 딸아이에게는 술 예절을 가르쳐 주고 싶다.`감히 남자가!'라는 말이 어색하듯 이젠 `감히 여자가!'라는 말도 어색해 질 것이다.성의 차이가 아닌 차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그러니 좋은 분위기에서 적당히 분위기를 즐기며 제대로 술을 마실 줄 아는 딸로 가르치고 싶다.술로 인해 `눈물'이 아닌 `유쾌한 웃음'을 떠 올릴 수 있도록...
다만 그 날이 빨리 오지 않기 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