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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짓말쟁이


BY 선물 2003-08-27

어린 시절의 우리 집 마당에는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중 과실수로 기억되는 석류나무가 있었고,또 가끔씩 잎을 따서 자글자글 흐르는 기름에 부침개를 부쳐 먹기도 했던 가죽나무란 것도 있었다.검붉은 주머니 모양의 석류열매는 제대로 익으면 그 입을 떠억 벌리는데 속을 들여다 보면 붉은 빛 곱게 비치는 투명한 석류 알이 옥수수 알처럼 빼곡하게 박혀 있어 앙증스럽기까지 했다.보기만 해도 절로 침이 고이게 만드는 석류 알은 심심할 때마다 내 입 속에서 톡톡 터지며 새콤달콤한 맛을 선물하는 고마운 존재였다.
또한 이파리 색깔이 초록인 듯,붉은 빛 감도는 연한 밤색인 듯 선연하게 잘 떠오르질 않고 느낌만 남아 있던 가죽나무는 그 잎을 따다 엄마가 손 맛을 섞어 조물 조물 갖은 양념하여 버무려 놓으면 입맛 돋우는 나물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고소한 부침개로 맛난 간식거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처음 엄마가 셋방 살이 설움에서 벗어나 내 집을 가졌다며 행복해 했던 그 집은 그렇게 나무들과 우리 4남매를 태워 주었던 흔들 그네로 푸근하게 기억된다.


그러나 그 나무들에 대한 기억이 아름다움 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이 나에게 준 선물과는 달리 아버지께는 다른 용도로 요긴하게 쓰실 수 있는 선물로 드렸으니 그것은 곧 나에 대한 배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용도였다.그 용도란 것이 다름 아닌 회초리였다.늘 자상하신 편이셨지만 한 번 나무라실 때는 아주 따끔하고 호된 꾸지람을 내리시던 아버지께 회초리라는 운명으로 맡겨진 그 나뭇가지는 맏이와 둘째였던 오빠와 나를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웬 만한 일에는 화를 잘 내시지 않던 아버지께서 유독 참지 못하시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짓말'이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어렸을 적에는 나름대로 심각하게 느끼며 서럽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아버지가 날 미워하고 계시다는 생각이었다.사랑받고 귀염받는 것은 다 제 할 탓이라고 애교를 잘 부리고 붙임성 좋은 동생과는 달리 자꾸 멀리서 빙빙 돌기만 하고 혼날 일이 생기면 꾸지람을 벗어날 요량으로 뻔히 들통날 들여다 보이는 거짓말까지 하였으니 아버지는 또 당신대로 속상함이 참으로 크셨을 것이다.어쨌든 `거짓말' 그것은 아버지께 들키면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하고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아야만 하는 엄청난 죄목이었다.
그런데도 학창시절에는 용돈을 충당할 목적으로 책 값을 좀 더 올려서 받는다거나 친구들과의 인생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늦게 귀가해서는 공부 핑계를 대는 등의 거짓말은 계속 되었다.그러나 그 때는 나의 거짓말 솜씨가 좋아져서였는지 아니면 무조건 나를 믿고 싶어서였는지 모르지만 내 거짓말을 의심조차 않으시고 전적으로 믿어 주셨는데 그 절대적인 신뢰는 어쩜 어린 시절의 회초리보다 훨씬 무거운 무게로 나의 `거짓말'을 단죄하는 `매'가 되었던 것 같다.그 때문인지 정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스스로가 참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거짓말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언젠가 하필이면 냄새 나고 질긴 수입 쇠고기를 드셨던 어머님께서 그 뒤로는 수입이란 말씀만 드려도 맛을 보는 것조차도 싫어하시게 되었다.그래서 어쩌다가 고기 반찬이라도 해 드릴려고 하면 꼭 한우쇠고기를 사야만 했다.그러나 고기 양이 적기라도 할라치면 식구들은 모두가 자신은 많이 먹었다면서 서로 먹기를 권하니 차마 마음이 쓰여서 고기를 앞에 두고도 속상하게 되어서 꼭 체할 것 같은 식탁 분위기로 흐르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충분한 양의 고기를 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그러다 보니 내 얄팍한 지갑은 오들 오들 떨며 한기를 느끼는 것만 같았다.더구나 요즘은 한우 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값이 올라서 이젠 무리를 해서라도 감당할 수 있는 선이 넘어서 버렸다.


그래서 결국 생각해 낸 것이 `거짓말'이었다.물론 우리 축산물을 먹는 것이 좋겠지만 그럴 형편이 안되니 어찌 할 것인가.때로는 질 좋은 수입육도 한우에 비해 가격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저렴하지만 그 육질은 잘못 산 한우보다 더 좋을 때도 있음을 나는 안다.그러나 한 번 수입육에 질리신 어머님은 입에 대는 것조차도 싫어하시니 수입육을 한우로 속여서 맛을 보시게 할 도리 밖에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예상대로 한우인 줄로만 알고 드셨던 어머님은 고기가 부드럽고 맛있다고 하신다.
나중에서야 그 사정을 사실대로 말씀 드렸더니 전혀 언짢은 기색없이 맛있다고 답해 주셨다.그 뒤로는 가끔씩이라도 많은 식구들이 큰 부담 없이 그렇게 고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또한 몸이 안 좋으실 때 입맛이 없으시다면서 아무 것도 드시질 않으려 하시는데 그런 때에도 있는 말 없는 말을 지어 내어 이렇게 몸에 좋다,저렇게 몸에 좋다라고 말씀 드리면 그래도 억지로 조금씩 드시게 된다.그러나 내 정성껏 나름대로 영양가 있는 것을 생각하며 해 드렸으니 거짓말만은 아니리라.


물론 이런 거짓말 외에도 세상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일들이 꽤 있을 것이다.그러나 나만을 위하느라 했던 거짓말에서 남을 생각해 주는 거짓말로 조금씩 자리 바꿈을 하는 일이 많아진다면 그 옛날 아버지의 회초리와 또 나를 빗나가게 하지 않고 바로 잡아 주셨던 그 `절대적인 신뢰가 결코 부질없는 가르침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서 제법 거짓말을 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모두 예전의 나처럼 그렇게 뻔히 들통날 거짓말들이다.그럴 때면 아버지의 그 회초리가 그리워진다.그리고 그 회초리의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그리고 신뢰라는 더 강력한 가르침도 느끼게 하고 싶다.
아,그러고 보면 정말 열매로,잎으로,그늘로 많은 것을 주었던 그 나무들은 자신의 줄기조차 나를 사람되게 이끄는 회초리로 내어 주었으니 그야말로 내겐 진정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