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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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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28장


BY 어지니 2003-08-03

 소설을 쓴답시고 컴앞에서 밤을 지새우다 메모로 기혁을 만났던 것처럼, 전화 통화로 인연이 되버린 정민과 영훈....
 겨우 얼굴 한번 마주 대했을 뿐인 두 사람의 정겨운 분위기를 망쳐버린 장본인이 자신이란 사실이 나경은 곤혹스러웠다.
 두 사람의 기분마저도 짙은 회색으로 물들인 사람이 자신이라니.....
종달새처럼 쫑알쫑알 거리던 정민은 기혁의 집을 나서면서부터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내일 만날 것처럼 인사합시다...내일 만날 수 없더라도 그런 척만이라도 하자구요."

 모든 것이 순간으로 끝나버릴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 어깨에 짊어진듯이 영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속이 바짝바짝 타오르는 애달은 마음으로 영훈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정민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러나, 이미 정민의 기분은 폭싹 가라앉은 후라 그의 그런 행동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잡은 그의 손에서 손을 빼내며 서로 얽혀드는 눈길마저 거두어 들인채 정민이 다시 잘가라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돌아서버렸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모든것이 다 자신의 탓인것만 같아 나경은 영훈에게 몇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의 말을 건네었다.
 
 "아니에요....나경씨가 왜 미안해요.....내가 가는 대로 기혁이 이 자식 실컷 두들겨 패줄테니까...마음 풀어요."

 차 안에서 여전히 화를 풀지 못하는 정민을 달래면서 하는 영훈의 말에서 순간적으로 팩 돌아서버린 정민의 태도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다.

 가야겠다고 생각한 싯점에서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지 못한 자신에게 모든 탓을 돌려야 했다.

 제방으로 들어가 버린 정민은 그날 종일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야, 이년아! 밤새 잘 놀다 와놓구서도 성이 안차서 지랄이야? 얼릉 소리 못 낮추니?"

 여관 건물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음악을 켜둔 정민에게 퍼부어대는 박여사의 질책에도 음악소리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빨을 얼마나 세게 악물고 있었던지...밥 알에 섞여 있는 돌하나 잘못 씹은 것처럼 이빨이 얼얼해왔다.

 개자식!
잘났으면 지가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을 면전에 두고 그따위 짓꺼리를 해!
대체 그런 놈한테 앵기는 년은 또 어떤 년이야.

 이빨을 뽀득뽀득 갈면서 창을 활짝 열어제꼈다.
꽥꽥 소리라도 지르면 이 분함이 사그라들려나.

 "아아악!!!!"

 "저년이 대체 왜 저런다니?"
 
 "죄송해요..."

 "쯧쯧...얼마나 다퉜길래 그래?...저년 한번 성질내면 감당이 안되는데...아이구, 못살아, 내가."

 비까지 내리는 늦은 밤....
나경은 병맥주를 손에 쥐고 폰을 꺼내 들었다.
아직 영훈의 번호가 입력되어 있다면 그와 통화를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정민은 출근을 해서도 영훈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한마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죽쓰고 있는 정민의 신경질이 더 오래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시도된 영훈과의 통화는 기혁과는 다르게 금새 이어졌다.

 "나경씨!"

나경의 이름이 영훈에 의해 뇌까려지는 순간, 기혁은 생각하고 있던 다음 행동을 잊어린채로 잠깐 정지 상태로 그들의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정민을 걱정하는 영훈의 음색이 비내리는 하늘처럼 짙은 재색이었다.

 "아직도...좀 그래요...그래서 말인데요....오는 일요일에 정민일 좀 만나줘요...."

 "나도 만나고 싶어요. 한데 내 전화까지 피하고 있는 정민씨가 날 만나주겠어요...."

 "마음은 그게 아닌데....나때문에 그래요....내가 데리고 나갈게요...."

 "그래줄래요?"

 영훈의 음성이 금방 밝아졌다.
고무풍선처럼 붕 뜨는 음색으로 좋아라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영훈에겐 요 며칠 숨막히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사랑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술병을 끼고 사는 기혁의 심정을 이제서야 십분 이해할 것 같았다.
 
 "나경씨....기혁이 옆에 있어요."

 그렇게 영훈의 숨통을 풀어주고 나니, 이번에는 그녀의 숨통이 답답하게 죄여왔다.
네...라고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그저 말없이 있기만 하여도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단호한 어조로 아니라고 말해버렸다.
전화기만 보아도 그의 음성이 듣고파 차라리 폰을 숨겨버리고 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면서도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고는 급히 폰을 내려버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인가....
이틀전 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시간이 갈수록 굵기를 더해 내리고 있었다.
 나경은 창밖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후두둑....후두둑.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머리위로 빗줄기가 뿌려졌다.


 "아직도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어서 일어나.“

 “으음...몇신데 그래?“

 “아홉시!“

 “음....!“

 열 한시에 영훈과 정민을 만나게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갑자기 왠 영화야?"

 "비오다 갠 지금 하늘이 얼마나 맑은지 알아? 햇살이 정말 좋아....영화보러 가자고 했잖아. 얼릉 일어나."

 "햇살이 좋은데 영화를 보러가? 너도 참...."

 이번에는 정민이쪽에서 가지 않아도 좋을 만한 획기적인 핑계거리를 만들어내려 했지만, 코 앞에 입을 옷까지 갖다 받치는 나경이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 아프단 말야."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래? 어머님이 얼마나 걱정이 많으신줄 알아?"

 "갑자기 얘가 왜 이렇게 말이 많아진거야?"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고 있으면 스타일이 비슷해진다잖아. 나도 너 닮아가나보지, 뭐. 얼릉 일어나 씻어. 늦는단 말야."

 "뭔 놈의 영화를 11시부터 보자고 이 난리야..."

 "영화는 조용히 봐야 하는거라매? 너 생각해서 시간을 그렇게 잡은 건데."

 술기운이 아직도 남아 머리는 물론이고, 목언저리까지 아리하게 저려왔다.
처음 나경이 집들이에 무작정 끌려나갔던 것처럼, 정민도 아무것도 모른체로 어거지 외출 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침대속에 꾸물꾸물거린다고 해서 술기운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테고...친구따라 나가 졸면서 영화를 보다가 해장이라도 해야겠다.

 집을 나서면서 정민은 박여사로부터 된통 한바가지쯤 되는 욕을 들어야했다.
나경은 것두 미안해 친구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타려다 마침 오는 버스에 몸을 실은 두 여자는 한적한 버스의 의자에 엉덩일 붙였다.
 그때 들려오는 김 경호의 노래...
정민은 나경으로부터 시선을 달리해버렸다.

바보! 멍충이!
노래 하나에 금방 얼굴 안색이 달라져서는...뭐, 잊겠다구? 흥. 잘도 잊겠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만....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코끝이 아려오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영훈과 정민을 만나게만 해주고 바로 돌아와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두사람을 보기만 해도 기혁이 보고파질테니....

 "왜 벌써 일어나?"

내릴려면 아직 두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데, 나경이 일어서 문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래야...안심이 돼."

 "아고...너두 참..."

 "시발새끼...."

 정민은 저도 모르게 욕을 해버리고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영화관 앞에 와서야 정민은 하지도 않은 약속을 어거지로 들먹이면서 서둘던 나경을 무섭게 째려보았다.

 "뭔짓꺼리야."

 "말투하구는....반가워요, 영훈씨...."

 "네, 잘 있었던 얼굴은 아니네요...두 사람 다...."

 정민은 끝내 인사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우리 저기 가서 커피라도 한잔 해요."

 나경이 [선물]이라는 상호를 내건 카페를 향해서 먼저 돌아섰고, 그 뒤를 정민...영훈이 뒤를 따랐다.

 영훈, 본인을 빼놓고는 소리내어 웃는 사람도 없건만, 최신판이라면서 유머를 늘어놓으며 예전같은 기분을 자아내려는 영훈의 눈물겨운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황 부장 아니니?"

 일도가 카페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정민이 먼저 보았다.

 "황 부장님!"

 정민이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아, 정민씨....나경씨도 있었군요...."

 "일요일인데도 일하세요?"

 "혜성에서 전기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이제 끝나고...여유있게 커피나 한잔 할까 해서요..."

 "합석하세요.."

 "아닙니다. 전 다른 자리에.."

 "앉으세요."

 나경이 앉으라는 말에 조금은 의외라는듯 나경을 쳐다보았다.
일도는 그것이 무슨 큰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좋아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영화를 보려구요."
 
 "그렇군요."

 "같이 갈래요?"

 계속해서 의외의 말이 나경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일도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아직 그렇지만, 자신의 속내를 보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 절호의 시간이 그에게도 온 것이었다.
좋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가슴에 스며드는 여자를 잊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슴저림이었다.

 그러나, 기혁에 관한 한 나경의 행복이 그리 길지 않은듯이....그녀에 관한 한 일도의 행복한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한 손엔 팝콘, 또 다른 한 손에는 오징어를 사들은 일도의 표정은 처음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기혁이라고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을 제외한 세사람이 한 남자를 보고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선 것이다.

 굳이 부연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그 상황을 금새 알아채버렸다.
그러나, 나경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놀라기는 했지만, 뜨악하면서 놀라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못 나올 것 같다더니..."

 [너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자슥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해 말하면서 영훈은 정민의 표정을 살피느라 나경과 일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시간이 되드라구....일행이 있었군. 김 나경씨."

 정색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쳐다보면서 그녀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요. 들어가요...이러다 영화 시작부분 놓치겠어요."

 나경은 기혁을 무시하려 했다.
그것은 처음 시도되는 일이었다.
단 한번도 그를 무시한 적도....아니,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던 그녀였다.

 "나경씨...난 그만 갈게요...다음에 봅시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형씨..아, 그리고, 다음이라는 건 없을테니 기대하지 마슈!"

 그러지 말라고 말하려던 그녀보다 먼저 기혁이 대뜸 말했다.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일도는 다시금 절망하면서 돌아서야 했다.
 예정에 없던 영화관람이었지만, 나경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실비실 웃음이 새던 일도는 볼쌍 사납게 쥐고 있던 먹거리를 정민에게 쥐어주었다.

 이걸 어떻게 먹어? 먹는 그순간 체해 버릴거야. 틀림없이.

 "황 부장님...."

 매번 자신으로 인해 바보가 되어버렸던 일도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돌아서는 일도의 팔을 잡은 나경의 행동에 기혁은 그만 눈이 뒤집혀버리고, 꽈배기처럼 속이 꼬여들었다.

              

[이현우-st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