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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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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27장


BY 어지니 2003-07-10

 “그만 가야 하잖아.“

 시간은 어느새 열 두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밤 11시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정민은 영훈의 그림자 바로 지척에서 엉덩이를 붙인 채로 집에 갈 생각이란 아예 없어 보였다.

 한 곳에 진득하니 앉아 있지 못하는 정민이었는데...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간다구요? 내일 일요일인데....여기서 자고 내일 가도록 해요....내가 두 분을 집 앞 대문까지 모셔다 드리죠."

 “지금 가는게 좋아요.“

 나경은 뒷말이 이어지지 못하도록 단호한 어조로 말해버리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당연히 정민의 동조하는 말이 나오리라 생각했던 나경은 이마에 손을 대면서 어지럼증을 드러내는 정민의 행동에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물보다 술을 더 마시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 취할 정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얼굴이 발개져 어지럼증을 드러내는 그녀의 포즈는 정말 술에 취한 듯이 보였다.

 얘가 지금 뭘 하자는 거야?

 “정민아...지금 일어서지 않으면 정말 늦어버려."

 “나좀 도와주면 안되니?“

 “응?“

 "나 저사람이 좋아. 박 영훈씨 말야.“

 친구가 말했다.

 “그냥 너무 좋아서 나 자신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야...저 사람과 같이 있으면..나라는 사람은 아주 녹아버리는 것 같아.“

 “그래서?“

 “좀 더 같이 있고 싶단 말이지..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정민아...나 때문이라면 이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돼...나랑 기혁씬...“

 “나경아, 처음엔 물론 너랑 기혁씰 만나게 해주려는 의도였지만....지금은 아냐. 정말 저 사람이 좋아....너도 알잖아, 내가 언제 남자때문에 이러든? 저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고, 같이 있고 싶어.“

 “그렇지만..“

 “너무 빠르다구 너도 시간을 따지는 거야?“

 그런 것은 아니였다.
섣불리 감정의 이끌림에 끌려 화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감정이란 시간의 장단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나경의 생각이였고, 경험이기도 했다.

 음...남자가 뭔지...확실하게 보여주는 구만.

 속살거리듯이 다가선 정민의 말을 못들은 척 해야 했는데....나경은 정민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민과 영훈은 쳐다보는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할 만큼 따뜻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랑이란 가슴을 에이게도 하지만, 어쨌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과는 불가불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기혁을 바로 지척에 두고서도 나경은 그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아무 이상이 없건마는.....그를 만날 때면 매번 상처 받는 가슴이 그와의 공간을 두려하고 있었다.

 “밤 바람이 시원한데....나경이도 데리고 나가요."

 피곤하지도 않았거니와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조롱하는 게 아니냐며 성난 어투로 말하던 기혁을 피해 침실로 들어온 나경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산책을 나가자는 말이 엷은 문을 통해 들려오자, 나경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자는 시늉을 했다.

 "어쩌죠? 나경이 자는데요...."

 "그럼....우리만 나가죠....걱정마라, 짜쌰...두 사람 방해하지 않을테니...나도 바람 좀 쐬야겠다."

 그녀가 자는 시늉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혁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푹 잠들어버린 그녀를 깨우는 것보다 더 그녀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가려면 지금이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기다리는 게 이런 건 줄 미처 몰랐어....제발....제발....내 곁에서 떠나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응? 응?]

 [그냥 너무 좋아서 나 자신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야...저 사람과 같이 있으면..나라는 사람은 아주 녹아버리는 것 같아.]

 그녀의 발목을 잡는 두 사람의 말이 자꾸만 떠올라 그녀는 손에 쥐었던 가방을 다시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도 숙면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경은 잠들 수가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머리속이 깨끗해지고 있었다.


 음....

 정확하게 몇 시쯤 잠이 들었는지 기억할 만큼 편하지 않은 잠을 잔 때문일까...
어깨죽지가 결려왔다.
  나경은 두손을 깍지낀 채로 높이 쳐들어서 쫄아있는 가슴만큼이나 긴장되어 있는 어깨 근육을 이완시키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머리맡에 걸려있는 거울에 헝클어진 머리하며, 부시시한 얼굴의 여자가 비쳐졌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이 새도록 거실에서 속알거리던 영훈과 정민이 보이지 않았고, 조롱하냐는 말로 사람을 뜨악케 했던 기혁도 보이지 않았다.
 
  냉장고 도어에 정민이 갈겨놓은 쪽지가 보였다.

 [우리 잠깐 나갔다 올게. 니가 좋아하는 커피랑...그리고, 해장을 해야하잖아, 이것저것 장 좀 봐올게.]

 정민과 영훈은 어느새 [우리]가 되어 있었다.
싫고 좋음이 분명한 셩격이 닮은 두 사람은 참 기분좋은 커플이었다.
 그들이 만나고 있는 이 9월에 불어대는 바람처럼....살랑거리며 떨어지는 낙엽처럼....그들의 사랑은 산뜻하고, 낭만이 있을 것이다.

 처음 시작이 그렇게도 산뜻한 두사람에 비한다면, 기혁과 나경의 시작은 터무니없었다.
터무니 없다는 말로밖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처음 속삭이듯이 말을 걸어왔을 때...그저 아무 말없이 앵겨버릴 것을 하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나경은 우울한 생각을 거두고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주방으로 들어서 한잔의 커피를 준비했다.
 
 편하지 않은 잠자리와 개운하지 않은 아침의 시작에 커피가 필요했다.
사실, 나경은 커피라면 무조건 좋았다.
왜 좋은지...커피의 맛이나 향을 즐긴다기보다는 그냥 습관적으로 커피가 좋았다.
누구를...무엇을 좋아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없는 거 아닌가...

 물이 끓을 동안 나경은 거실을 휘익하니 둘러보았다.
어제는 방바닥만 유심히 살펴보았드랬지.
깔끔하고 반듯하게 정돈된 성격은 아니지만...뜨내기 기질이 있다는 기혁의 말처럼, 살림살이는 군더더기라곤 없었다.

 언제 어느때라도 가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살림살이는 아주 간단 명료했다.
모양새나 크기에 상관없이 같이 사용해도 될 만한 것은 두개를 넘는 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커피를 준비하면서 물을 끓일때도 라면 한개 끓여먹을만한 냄비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니, 커피잔이라고 있을 리가 없었다.

 멍해진 신과 뻑적지근한 어깨죽지에 커피의 기운으로 진정시키며 나경은 거실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고는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간단히 샤워라도 할 생각이었다.
조금 서둘기만 한다면, 반쯤 보기 흉하게 지워진 화장을 깨끗이 씻어내고, 화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당히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시고, 살구비누로 거품을 내어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짧지만, 기분좋은 샤워를 끝낸 나경은 속옷을 걸치고 욕실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딸깍..현관 문이 열리면서 기혁이 들어섰고, 욕실 안에 가득 채워진 뿌연 안개와 함께 나경은 욕실을 나왔다.

 뜨아~~~

나경은 나오려던 욕실 안으로 뒷걸음쳐 들어가 꽝 문을 닫아 버렸다.

 우째 이런 일이....미쳤어, 미쳤어...

나경은 발을 동동 굴리면서 옷을 다 입지 않고, 욕실을 나섰던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화들짝 놀라 욕실안으로 몸을 숨겼던 그녀가 10분이 넘어도 나오지 않자, 기혁은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고, 언제까지 있을 거야? 나와서 커피 마셔라.“

 기혁의 말대로 언제까지고 욕실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커피고 뭐고 할 것 없이 방으로 뛰어가버리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나경은 작은 헛기침 소리를 내면서 거실로 나왔다.
 
 “영훈이랑 정민씬 수경씬 간단하게 조깅하고...아침 장을 봐온다는 군....이미 커피를 한잔 한 모양인데...그래도 마실래?“

 끄덕끄덕..

 “밥 숟가락으로 커피 하나, 프림은 한 스푼..그리고, 설탕은 역시 밥 숟가락으로 하나 반..맞지?“

 “그걸 ..어떻게..알았어요?“

 “늘 만날때면 밥보다 커피를 더 마시잖아, 너."

 뽀글뽀글 물 끓는 소리에 싱크대 쪽으로 돌아선 기혁은 밥 수저로 분량대로 그녀를 위한 커피를 준비했다.
 
 “가만있어.“

 “기혁씨...“

 “움직이지 말고...“

 커피잔을 그녀의 손에 건네준 가만 있어 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 기혁을 피해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멈추었다.
물방울이 맻혀 있는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 냄새가 잊고 있던 남자를 깨우고 했다.

 “이건...아니예요...난 이런 식으로 기혁씰....“

 승규의 그늘에 그가 존재했었던 시간에는 플라토닉 러브를 뇌까리면서 그를 힘들게 했던 상황과는 달라졌지만, 어쨌든 그런식으로 기혁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바퀴벌레야.“

 끄악!

 나경은 바퀴벌레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의 반사적으로 뜀박질하며 펄쩍 뛰어올라 기혁에게 안겨들었다.

"나경아!"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벌레란 벌레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싫었다.
어릴 적 무지하게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공벌레를 가지고 논다는 이유로 한동안은 말도 건네지 않았고, 항상 얼마간의 거리를 띄우고 걸었었다.

그중 바퀴벌레는 정말 최악이었다.
슥슥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둠속에서 벽이며 천장을 기어다니는 그 바퀴벌레가 날기도 한다는 사실에 바퀴벌레가 나오기만 하면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곤 했었다.

 바퀴벌레이라는 말에 기겁을 하며 뜀박질하듯 뛰어 오른 나경을 맞이한 것은 기혁의 넓은 가슴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적신 것은 금방 끓여진 커피였다.

 “에이, 시발!“

 기혁은 벽을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바퀴벌레를 손바닥으로 바로 해치웠다.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들어간 기혁은 물에 적신 타올을 가지고 나왔다.

 “식혀야 해. 금방 끓인 물이라....분명히 데였을거야."

 “뭐 하는 거예요!“

괜찮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입고 있는 셔츠를 걷어올렸다.

 “지금 내가 뭘 하겠어? 니 가슴이 얼마나 커졌나 보려고 그러겠어? 가만히 좀 있어.“

 “제가 할게요.“

 “참 말 많어, 하여튼.“

 딸깍하는 쇠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드라마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민망해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실수를 할때면 꼭 들키고 되고, 짝 아닌 다른 상대와 딴짓을 할때면 꼭 누군가 눈이 휘둥거레져서는 보고 마는 장면....그것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브래지어를 걷어 올리지는 않았지만, 목선 아래의 가슴 부분을 찬 수건으로 식혀주는 장면을 두 사람이 보고 만 것이다.

 “정작 자리를 비켜줄 때는 얌전을 빼더니만....하하하하하."

 "얌마. 그런 거 아냐."

 민망하고 창피해 셔츠를 얼른 내리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나경의 등언저리에 대고 영문을 모르는 영훈이 웃어대었다.

 “자식. 쑥스러워할 거 없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정민씨, 나경이 가슴에 이 물수건을 좀 대줘요. 난 연고를 찾아볼테니까.“
 
 "뭐에요? 나경이 다친 거에요?"

 "바퀴벌레에 놀라서....커피를 엎질렀어요."

 "뭐라구요! 아이, 정말 내가 못살아, 증말! 쟤 알레르기 피부라 상처가 잘 낫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짜증이 묻어나는 어투로 기혁을 째려보면서 방으로 들어서려던 정민은 지척에서 들려오는 김경호의 사랑해에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김 경호의 사랑해는 기혁 폰에서 나는 울림이었다.

 참 가지가지하네.

 "플라워,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께. 또 떼쓴다....나중에 전화한다잖아...으흠..."

 마른 기침으로 플라워에게 전화받을 때가 아니라고 언질을 주는 기혁은 와이프 몰래 바람피다 들킨 사람처럼 뒤가 구린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폰의 울림도 아닌 폰을 받아들고는 흐트러진 숨소리새로 애타게 나경의 이름을 뇌까리던 녀석이 어느새 그때를 잊어버린 것인가.
 영훈은 기혁의 그런 모양새가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고, 정민은 기혁이라는 남자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부터 찔끔거리는 다시금 바보같은 나경이 때문이에 화가 났다.

 저 인간은 도체 어떻게 되먹은 인간이길래, 나경의 가슴을 저리도록 후벼대는 거야! 나쁜 놈!

 구김없이 맑게 웃어대던 정민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기 시작했다.
피가 나도록 아프게 잇몸을 깨물고 선 정민의 불끈 쥔 두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폰을 집어던져 버릴 것 같은 기세로 기혁앞으로 다가서는 정민을 가로 막고 선 사람은 영훈이었다.

 "비켜요."

 "정민씨...진정해요."

 "영훈씨, 친구다 이거죠? 그러시겠죠!"

 폰을 냅다 집어던지는 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잘난 인간의 뺨을 왕복으로후려 갈겨주고 싶었다.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확 열어제낀 정민이 애궂은 나경에게 소리쳤다.

 "일어나! 집에 가!"

 처음 만난 남자에게 그만 녹아버릴 것 같다며 한시간이라도 일분이라도 함께 하고 싶다던 정민은 그만 모든 것이 얼어붙어 뜨거운 기가 가시지 않은 가슴을 부여잡은 나경의 손을 잡아 끌었다.

 "정민씨..."

 서둘러 전화를 끊고 방문앞으로 다가선 기혁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정민을 불러세웠다.

 “갈때 가더라도...제대로 연고라도 발라야...."

 "걱정이 되긴 해요?"

 "무슨 말을 그렇게...."

 "무슨 말인들 못할 것 같아요? 지금 내가!"

 "정민아...내 실수였어...기혁씬, 아무..."

 데인 가슴을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식히고 있던 나경은 플라워와 전화하는 기혁의 낮은 음성을 들을 수 없었고, 갑자기 돌변한 정민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면 잠잠코 있기나 해. 이 등신아!"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성난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정민이 앞으로 영훈이 다가섰다.

 "정민씨...이렇게가면 어떡해요..."

 "저 사람 꼴보기 싫어요! 저사람이랑 친구인 영훈씨도 이제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가자니까 뭐해? 이제는 니가 가기 싫어진 거야?"

 정민은 나경의 백과 코트를 집어들고 현관앞에서 소리를 질러대었다.

 어제 저녁에....아니면....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갔어야 했는데....

 "내가 태워다줄게요. 기다려요."

 뭐가 어떻게 되가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고 정민을 따라 나서는 나경 뒤로 영훈이 서둘러 차키를 들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