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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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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26장


BY 어지니 2003-07-07

 "바람도 쐬고 좋잖아. 코스모스가 얼마나 만발한데... 내친구가 곧 니 친구고, 니친구가 곧 내친구지. 너하고 나사이가 어떤 사인데 니친구 내친구 따지냐.“

 요란을 떨어대는 정민의 얼굴이 전에 없이 들떠 있었다.
대화에 있어 지나치게 직설적이라 가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뒷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말투가 걸걸하긴 하지만, 허둥대거나 덤벙대는 스타일은 아닌 정민이의 들뜬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지만,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한번만 안아주세요 마지막 밤이잖아요
이렇게 헝클어놓은 내맘을 달래주세요
한번만 안아주세요 마지막 부탁이예요
이렇게 그대 그냥 가버리시면 다신 볼 수 없잖아요~~~~"

 얼마나 좋은 친구의 집들이길래 정민은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옷장에 걸어있는 옷을 침대에 늘어놓았다.

 옷장 안에 있는 옷이란 옷은 죄다 침대에 늘어놓고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가슴 언저리에 대어보면서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옷투정까지 늘어놓고 있었다.

 "그나저나, 집들이 선물로 뭐가 좋을까?“

 “애기가 있으면 애기옷도 괜찮지 않아? 집들이라고 해서 한결같이 휴지나 가루비누..그런 것보다는 말야.“

 “좋은 생각이긴 한데...그 사람 결혼 안했어. 그러니, 아이가 있을리 없으니 애기 옷은 안되겠다.“

 “그사람? 친구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야?“

 “아마두~~~"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내 친구라는 것만 알아둬. 음...뭘로 한다? 또 뭐 생각나는 거 없어?“

 “혼자 사는 남자라면...트렁크 팬티 어떠냐?“

 “어우, 굳 아이디어! 혼자 사는 남자라면, 빨래를 제대로 하지 않을테니까. ..가자.“

 “너...설마..정말 트렁크를 살 생각을 아니겠지?“

 “왜 안돼? 받는 사람은 무슨 권한 있어? 주는 사람 마음이지.“

 덩달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정민의 친구 집들이에 따라 나선 나경은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차 창밖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향을 느끼며 눈을 내려 감았다.

  평상시 바쁜 척, 너스레를 떨어대면서 잘 견뎌오던 나경은 그가 있는 동네에 와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떠오르는 그의 얼굴에 조금씩 곤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에서 아주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던 때가 떠올려지면서 심장에 이상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조시가 영 좋지 않았다.

 “여기 어디라고 했는데..아, 저기 병원 있다! 저 병원 뒤에 있댔어.“

 “음..어쩐지 불안하다. 설마 이렇게 날 좋은 종일 헤매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당근이쥐!“

 “너..그 사람 좋아하니?“

 “누구? 그 사람 누구?“

 “왠 딴청? 지금 만나러 가는 그 친구 말야. 너 지금 얼굴이 어떤 줄 알아 ? 그냥 겨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야.“
 
 정민의 이상 행동....
물론, 남자에게 아주 관심이 없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미용실에 다녀오고, 옷장을 수십번 여민 까닭이 남자로 인해서라니.....평소때의 모습이 아닌 정민이....예전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음..겨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어쨌든 나쁘진 않아. 니 말처럼 이 사람 정말 좋아지면 어쩌지? 히히히.“

 병원을 돌아서자, 이제 막 짓기 시작한 상가 건물이 나왔고, 그 바로 옆으로 붉은 벽돌로 벽을 쌓아 올린 이층 주택이 보였다.

 “음! 제대로 온 것 같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면서도 선뜻 초임벨을 누르지 못하고, 미용실에 다녀온 그대로여서 헝클어지지도 않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정민아....여기가 아닌거야?"

 "아니, 맞어....여기가 틀림없어."

 틀림없다면서도 정민은 긴 숨을 몰아쉬었고, 그제서야 정민은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초임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차임벨을 눌리자, 이내 경쾌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정민씨. 그러지 않아도 마중을 나가려던 참이었는데...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이층에서 뛰어내려 온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정민앞으로 다가서 악수를 청했다.

 뭐야???

 나경은 친구라면서 만나자 악수를 하는 두 사람의 인사법이 조금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인사는 들어가서 합시다.....정말 때를 잘 맞춰 왔어요....친구놈이랑 지금 막 상을 차렸거든요."

 “어머, 그랬어요? 정말 기대되는데요....나경아, 들어가자.“

 “아니...난...그냥 가는게 좋겠어....눈치도 없이 따라 온 것 같다.“

 나경은 정민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나경씨...안에 저 말고 늑대 한 마리가 더 있거든요."

 정민의 남자친구는 이미 나경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다.

 “아! 네...귀가 엄청 밝으시네요.‘

 “그런 편이죠. 그래서 전 나쁜 소린 안 듣고 여태껏 잘 살고 있습니다. 워낙 귀가 밝아서리 제 험담을 감히 못하드라구요. 하하하하하.“

 남자는 우습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떠들썩하게 웃어대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 남자의 웃음소리였다.
어디선가....어디선가....들어본 듯한....음색이었다.

 "얌마! 뭐해. 손님 오셨는데, 내다보지도 않냐.“

 층계를 오르던 나경은 남자의 부름에 삐죽이 얼굴을 내민 또 다른 남자의 등장에 놀라 뒤따라 오던 정민이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아래로 발을 헛디딜 뻔 했다.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기혁을 만났을 때처럼, 그대로 발이 바닥에 꽂혀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괜찮아?!"

 "어, 응....."

 얼어버린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친구의 집들이라면서 친구의 이름도 말해주지 않고 얼버부렸던 정민.....황 부장을 들먹거리면서 뭔가 재차 확인을 받아내려고 했던 것....어디선가 한번 쯤은 들은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영훈이였음을...그제서야 알았다.

 영훈의 전화를 꼭 받아야 하나하는 자신의 표정을 짐짓 못 본 체 얼굴을 돌렸던 정민의 반응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나 그제서야 알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앞지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나오던 기혁도 나경을 보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체 이게......

 그렇게 목소리라도 들으려 절박한 심정으로 폰을 왠종일 잡고 있어도 목소리 한번 제대로 들려주지 않았고,  옆 얼굴이라도 볼까 해 집앞에서 아무리 서성거려 보았지만, 그녀 비슷한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돌아선 것이 몇 번이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쉽게 만나지다니...
세상 사 참 우스웠다.

 놀랍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아무튼 기혁 역시도 그대로 꽂혀버린 듯 움직이지 않은채 나경을 쳐다보았고, 나경은 만들어진 우연으로 인해서 다시 만난 기혁을 그렇게 쳐다보았다.

 “나경씨...제가 바로 박 영훈 입니다...일전엔 제가 결례를 범했었죠.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미안해요.“

 영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나경은 선뜻 그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좀...당황스럽네요...“

 “그러길래 영훈씨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당황스러워하는 나경보다 미안하다는 영훈의 사과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나경을 책망하는 듯한 정민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전화 통화 고작 몇번 했을 뿐인 이 두 사람....언제 이렇게 가까워진거야?
음...이래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나왔군.

 어거지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는 나경을 쳐다보고 있는 기혁은 이미 정황파악이 끝난 그녀와는 달리 한참을 헤매고 있는 눈치였다.

 "남자가 사는 집 치고는 엄청 깔끔하네요.“

 “전 어지럽히고, 이 집 주인인 제 친구 놈은 절 따라 다니면서 치우곤 하죠. 하하하...자, 자 앉읍시다. 얌마, 뭐해?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네..그렇다고 그렇게 석고상처럼 굳어 버리냐? 술이나 내와.“

 “주객이 전도된 것 같네요. 이 집 주인은 기혁씨가 아니라, 영훈씨 같아요.“

 “하하하하..내가 그랬어요? 기혁아, 내가 그랬냐?“

 또 한가지 파악한 것은 친구....영훈의 집들이가 아니라, 기혁의 집들이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정민의 깜찍한 거짓말에 나경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두 남자가 제법 솜씨를 부려 차려놓은 음식 앞에 앉았지만, 나경은 음식 한 점 제대로 먹지 못하고 멀뚱 앉아 있었다.
 그에 반해 정민과 영훈은 처음 만남인데도 서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깔깔거리고 있었다.

 "나경씨. 좀 먹어봐요. 지금 한창 시장할 땐데...그런 대로 먹을 만 해요."

 "아, 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돌아다닌 사람처럼 속이 미슥거려 음식을 보는 것조차 하고 싶지 않은 나경의 속도 모른 체, 영훈이 음식을 권했다.

 “이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술이 떨어지다니...정민씨. 우리 술 사러 갑시다.“

 “저기! 내가 갔다 올게요...."

 정민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나경에게 주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정민은 이때다 싶어 벌떡 일어나는 친구에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친구의 행동에 따가운 시선을 보내었다.

 "이 곳 지리도 넌 잘 모르잖아."

 "이 집 바로 옆에...가게 있는 거 봤어....내가 갔다 올게요."

 “나경씨도 이 놈처럼 은근히 분위기 파악을 못하네요. 정민씨가 없었으면 당근 누구라도 갔다와야지요....우리 둘이만 데이트 좀 하려고 그럽니다....정민씨, 갑시다."

 이런 저런 말로 둘러댈 것도 없이 직설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영훈의 태도가 좋은 사람은 정민뿐이었다.

 두 사람의 착잡한 기분과는 상관없이 히히덕거리며 정민과 영훈은 집을 빠져 나가고 두 사람에겐 어색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지 않아도 속이 미슥거려 토악질을 할 것만 같은데, 팔 하나의 거리를 두고 기혁까지 있으니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려 숨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얄미운 기집애! 어쩜 이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일 수 있지.

 십 분이 자나고, 삼십 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그저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듣고 있었다.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경을 한참동안 말없이 쳐다보던 기혁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제대로 먹기나 하는거야?"

 가슴안으로 스며들 듯이 속삭이며 하는 그의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건네왔지만, 나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얼굴이 말이 아니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턱선을 따라 거뭇하게 난 수염에 정리하지 않은 헤어스타일하며...초쵀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음...오해하지마...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황당하긴 했지만,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다.
그런 오해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 자식 왜 안하던 짓을 하나 몰라.“

 그의 말에 대꾸라곤 하지 않는 그녀가 야속했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속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술을 사러 간다며 두사람이 나간 것을 그새 잊어버린 기혁은 애궂은 냉장고를 여닫으면서 초조함을 감추고 있었다.

 "난 그만 가는게 좋겠어요....정민이 오면...아야!"

 숨막힐 것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일어섰던 나경은 획 순식간에 돌아서는 기혁에 의해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

 "아파요."

 "재밌니? 재밌냐구!!"

 냉기어린 어투로 이죽거리는 기혁의 모습을 처음 대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경의 가슴은 또 다시 쫄아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이러지 말아요."

 "바보같은 나를 조롱하면서 즐기고 있잖아!"

 "왜 맨날 내 탓이라고 해요?!"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쏟아내고 말았다.
어린아이처럼 아앙 울음을 터뜨려버리는 나경은 그가 잡은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버둥거렸다.

 "그런게 아니잖아!"

 "아니면 이 팔 놔요. 아프단 말야."

 "그런게 아니잖아....."

 그녀의 잡은 팔을 놓는 순간, 새처럼 훨훨 날아가버릴 것 같아 그 잡은 팔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게 이런 건 줄 미처 몰랐어....제발....제발....내 곁에서 떠나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응? 응?"

 어린 아이 달래듯 응, 응 거리는 그를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그녀는 조금씩 느슨해지는 팔을 어루만지면서 알 수 없는 허허로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만 울어....니 눈물은 항상 날 아프게 해...."

 

 

 

[박 정현 - 몽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