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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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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25장


BY 어지니 2003-07-03


 새벽녘에 어렴풋이 눈을 뜬 정민은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내일이다....
내일이면....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경에게는 미안하지만.....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런 설레임....이런 떨림은 처음이다.

 "엣취이! 엣취이......에, 에취이!"

 "음....."

바로 옆방에서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나경의 재채기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짐작컨데, 나경은 간밤에도 창을 닫지 않고 잠들어 버렸을 것이다.

 "둔하게 생기지 않은 것이 왜 맨날 저 모양인지 몰라...어쭈...그래도 문은 잠궜네."

 정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열쇠로 문을 열었다.
술을 즐겨 마시는 그녀는 곧잘 어머니를 피해 나경의 방으로 숨어 들어오곤 했기 때문에 방 열쇠는 그녀에게 필수였다.

 그러면 그렇지.

 그녀의 짐작대로 창은 열려 있었다.

 "닫지마...바람이 참 조오..에, 에취이!"

 "어지간히 좋기도 하겠다. 어떻게 창을 열어놓고 잘 생각을 다 해? 어이구, 정말 내가 못 살아."

 "일어나버린 걸, 뭐...."

 고집스럽게 창을 닫는 것을 마다하던 나경은 치밀어 오르는 재채기를 손바닥으로 막아내며 창가로 다가섰다.
 창가로 올려다 본 하늘에 재채기를는 나경은 창가에 다가서 하늘에 간간이 트이는 구름새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언젠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기혁과 보았던 오묘한 색채의 노을이 떠올랐다.
 블라인드 틈으로 팔랑거리며 춤을 추는 잎사귀는 곤혹스러워 하는 나경과는 상관없이 싱그러웠다.

 “청승 그만 떨고 커피나 마셔."

 어느새 커피를 그녀의 코 앞에 대령해주는 정민에게 입술을 삐죽이며 웃어보였다.

 "참 가지 가지한다. 그게 웃는 거라고 웃는거야?"

 "너 나에 대한 마음이 변한거지?"

 "뭐?"

 "그런 것 같어...요즘따라 너 나한테 계속 시비걸고 있잖아."

 "뭐어?...참 생각하는 거 하구는...."

 장난스럽게 몇마디 나누었을 뿐이었는데, 나경의 기분은 이상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꿈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는데....이상하게 기분이 우울해졌다.

 나경은 출근을 해서도 전화 주문 받을 때 말고는 밝은 음색을 내지 않았을 뿐더러, 말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점심은 이따가 황 일도씨 오면 가자."

 "뭐?"

 점심시간이라지만, 밥 생각은 없었다.
커피 두어잔으로 점심을 떼울 수도 있었지만, 잔소리쟁이인 정민이가 그냥 내버려 둘리는 없었다.
 그래서 어거지로 숟가락 두어번 끌적거릴 생각이었던 나경이었다.

 "황 부장 말야....근사한 점심 사준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뭐 어때? 그냥 밥 먹는 건데....둘이서만 먹는 거 아니잖아. 그 똥 밟은 상 좀 펴라."

 똑똑.... 짧은 노크 소리에 이어 [황 일돕니다.]라며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언제나 그런 형식으로 사무실을 들어섰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달랑 정민과 나경뿐인 작은 대리점이었지만, 매출실적이 좋아 본사에선 그런대로 대우를 받고 있는 터였다.

 자연 본사 직원의 출입이 잦았다.
그 중 하나가 황 일도였다.
황 일도라는 이름의 남자는 그냥 무턱대고 문을 열고 들어서지 않아 나경도 나쁘게만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늘 한결같은 검은 양복의 차림새로...늘 언제나 같은 형식으로 사무실을 들어서는 일도를 볼때마다 나경은 승규를 떠올리곤 했다.

 각진 턱선을 가진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승규와는 달리 일도는 그저 평범한 얼굴이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곧잘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 얼굴로 착각한다고 했다.
처음에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묻혀져 있는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 헤쳐도 보았다고....그러다 매번 상대쪽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며 가버린다고...그래서 그럴때마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것이 이제는 아주 버릇이 되버렸다고 했다.

 일도는 그렇게 처음부터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렸었다.
그저 처음에는 좀 가벼운 사람이구나....말 많은 사람이구나...생각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전화주문을 받는 것 말고도 필수 항목을 잊어버린 나경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바로 황 일도였다.
 이제는 만나기 글렀구나 생각하면서 반쯤은 포기해버린 기혁을 다시 만나면서부터 나경은 가끔 제 할일을 잊어버리곤 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잊어버려선 안되는 한가지.
그것은 여름에 보충 전력이 들어오는 단자의 스위치를 올려놓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필수항목인 그것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 다음 날,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나경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었다.
독가스처럼 사무실을 가득메우고 있는 김치의 쉰 내.
으악!!!
꺄악!!!

 36도를 웃도는 여름날 밤 전력의 과부화로 전기가 나가버린 것이었다.
본사의 영업방침은 언제나 신선.....오로지 신선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본사에서는 많은 돈을 투자해 각 대리점마다 보충 전력 단자를 설치해주었고, 그 덕분에 김치 하나만을 다루는 업종으로는 손꼽히는 중소기업으로 부상되고 있었다.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쉬어 터져버린 김치는 거의 폐기 처분의 위기였고, 나경도 사표를 써야 할 판국이었다.
아니, 사표뿐 만 아니라, 보상금을 계산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처하게 되버린 것이다.

 난리....그 난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주문한 김치가 제 때에 오지 않는다는 항의 전화가 줄차게 오기 시작했고, 사장은 사장대로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쉬어 터져버린 김치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어쩔거냐고, 어떻게 보상할거냐고 불호령이라도 친다면 좋을 것을....
푹푹 한숨만 내쉴 뿐 말문을 닫아버린 사장의 침묵시위가 더 사람을 쫄게 했다.

 [음!]

 단자를 살펴보기 위해 달려온 사람이 황 일도였다.
단자에 이상은 없었다.
있을 리 없었다.
주마다 세번을 들러 단자를 체크하는 사람이 일도, 자신이었으니....

 애궂은 손가락과 입술을 번갈아 물어뜯으면서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한심한 눈물을 함고 있는 나경 앞으로 일도가 다가섰다.

 [걱정하지 말아요....내가 알아서 할게요.]

 [제 실....]

 [사장님. 제가 실수를 한 것 같네요. 제가 본사에 알아서 처리할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엥?!
 누가 실수를 해?

 사장도 일도의 실수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나경, 그녀 자신이 단자 스위치를 올리지 않고 마지막으로 퇴근했다고 자백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본사 부장이 나서서 자기 책임으로 무마하겠다는 데 두말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경씨....그렇게 죽을 상 하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한다잖아요.]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그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만, 그 역시 회사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에 불과 했다.
나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눈물을 쏟아내었고, 일도는 그녀의 어깨를 도닥거려주었다.
 시말서를 써야 했고....피해 반액을 그가 지불했다는 것을 한참후에 알았지만, 지금껏 제대로 된 감사의 말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감사의 마음일 뿐....여자가 남자를 대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만약...그녀 인생에 기혁이 없었드라면....기혁의 대한 감정이 무뎌져 있는 상태라면....상황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너무 늦게 만났고, 그녀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경은 일도가 사무실로 들어섬과 동시에 오지도 않은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아, 내가 늦은 것은 아니지요?"

 "황 일도씨 양반은 못되겠네요."

 "내 얘길 하고 있었어요?"

 "그랬죠. 왜 안오시나 하구요.... 나경아, 가자.."

 두 사람에게 손을 들어 잠시라는 제스쳐를 취한 나경은 만들어낸 연극을 시작했다.

 "너무 오래 전화 안해서...날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인간이 뭘 하는거야? 근데, 전화는 언제 온거지? 벨 소리를 들은 것 같지도 않은데....나경이, 이게 정말!

 주르륵하고 흘러내리는 눈물때문에 그 다음 말은 더 이상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오늘은....아무래도...좀 그러네요."

 일도의 안색이 나경의 얼굴 만큼이나 재색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

 정민은 가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딸깍하는 짧은 소리를 내며 일도가 나갔고, 나경은 그제서야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미안해.....미안해.....난 아직...준비가 안됐어...."

 소리도 내지않고 울어버리는 나경을 두고 사무실을 나와버렸다.
그녀의 미련과 집착에 진저리가 쳐졌다.


 전 날의 일로 나경은 정민에게 말 붙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말없이 나가버린 정민은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침부터 어디 갔나 했더니 미용실에 다녀온 거야?"

 "응!"

 아주 명쾌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기분을 살피면서 여전히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어디 가?"

 "까마귀 고기를 먹었니? 오늘 집들이 간다고 했잖아."

 "아....그랬지, 참....근데...집들이 간다면서 무슨 멋을 그렇게 내니?"

 “후줄근한 모습으로 가기가 좀 그래서....너도 얼릉 준비해."

 “니 친구 집들인데 내가 뭐하러 가? 다녀와...난 오랜만에 집에서 빈둥거릴래.“

 "집 아니면 회사, 회사 아니면 집인 너가 오랜만이야? 그 나이에 방콕만 하는 거 청승스러."

 "뭐, 내가 집아니면 회사야. 내가 얼마나 잘 돌아다니는데....콘서트장에도 가고...또..."

 "또?....생각할 게 뭐 있어? 기혁씨 만날 나 좀 돌아다녔지."

 기혁이라는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도 빈 속에 소주를 마신 것처럼 목구멍부터 시큰하니....가슴안이 짜안해졌다.
 정민은 옷장 문을 열다말고 이름하나에 추억속으로 빠져드는 그녀의 얼굴에 그녀앞에 다가섰다.

 "황 부장한테 이제 그만 혓물 켜라고 말해야겠다."

 "얘는 뜬금없이 왜 또 황 부장 얘기야?"

 “넌 아무래도 장 기혁씨 못 잊겠지? 그렇지?"

 무슨 확답이라도 꼭 받아내야 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그래...잊어야겠지만....아직은 때가 아니야."

 "저번 주에도....어제도....똑 같은 말을 했었지, 너...때가 아니라구...."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을 뇌까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정민의 표정이 조금씩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등뒤에 선 나경으로선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