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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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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24장


BY 어지니 2003-07-01

 “뭘 그렇게 쳐다봐?“

 민주를 만나러 나갔을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너무나 멀쩡하게 귀가하는 나경이 오히려 불안한 듯 정민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우나라도 하고 들어온 거야?"

 "머리라도 쥐어 뜯겨서 미친 년처럼 하고 들어올 줄 알았어?"

 나경의 말처럼 미친 년까지는 아니었지만,  드라마 속의 장면처럼 뺨따귀를 맞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흐트러진 모양새를 상상하고 있었다.

 사실 나경도 정민과 같은 생각으로 잔뜩 겁을 집어 먹었었다.
카페를 나와 민주가 아주 보이지 않을 때쯤엔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는 것조차도 할 수 없어 벽에 기대어 한참을 서 있었드랬다.

 “미친 년까지는 아니지만....내가 드라마를 너무 본 모양이다..."

 “웬 술이야?“

 “니 기분이 지랄 같을 것 같아서...술로라도 풀라구...."

 “흠흠흠....미안하지만, 조금도 지랄 같지 않아. 물론....겁을 좀 먹긴 했지만....."

 “그렇게 억지로 기분 좋은 척 할 필요없어.“

 “아냐..정말 기분이 좋아. 그렇게 보이지 않니?“

 “나빠 보이진 않는데..니 말처럼 그렇게 아주 좋아 보이지는 않아.“

웃음소리라고 하기엔 뭔가 빈 듯한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는 친구의 가식적인 표정지음을 정민을 금방 알아내었다.

친구의 말처럼 지랄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아주 좋지도 않았다.
말처럼 쉽게 잊혀질 사람이 아니란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를 만나고 나니 장 기혁....그 못되고, 싸가지 없는 인간이 보고파 미칠 지경이었다.
또다시 보고픔으로 명치끝이 오그라들었다.

 "나갔던 일은 잘 됐어?"

 "그런대로....민주씨한테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지나간 일이라고 덮어둘 것만은 아닌 것 같다....산다는 게 말야."

 "그러게......행복해야 할텐데....민주씨의 사랑이 지치기 전에 승규씨가 마음을 돌려야 할텐데....그렇다고 지금에 와 승규씨를 만날 수도 없구."

 "그래. 그만하면 된거야. 니말대로 지금에 와 승규씨를 만난다면...긁어 부스럼 밖에는 안돼. 너 말야. 황 부장 어떻게 생각해?"

 "황 부장 말이 지금 왜 나와?"

 뜬금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일도...그가 자신을 괜찮아 한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터였다.

통상 생각으로는 부장 직위에 있는 사람은 40대 전후의 나이일테지만, 본사 부장인 황 일도는 나경에 비해 4살 위였다.
그러고보니 기혁과 동갑내기였다.

 "그 사람, 널 괜찮게 생각해. 몰랐어? 하긴 너란 애 한가지에 빠지면 주위를 살피지 않지. 넌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황 부장이 널 만나게 자릴 만들어 달래드라."

 "부탁인데...괜한 짓 하지마....."

 "그러면 기혁씨한테 전화해 보든지...."

 "아직은 때가 아니야...."

 때가 아니었다.
거미줄처럼 가슴을 덮고 있는 기혁의 존재를 잊을 때도 아니었고, 더더군다나 그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날 때도 아니었다.

 기혁 아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시간이 좀 더 많이 지난다면 모르겠지만...아니, 아니!! 그녀로서는 도무지 장 기혁이라는 남자 말고는 다른 사랑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한 잔 두잔 마신 술에 취기가 온 몸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목구멍안으로 소주가 부어질 때마다 그 술의 양만큼 나경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민은 이제 제발 좀 그만 울어대라는 핀잔대신 말없이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고장난 수도꼭지를 아예 뜯어 고치지 않으면 모를까...
헝겊이나 비닐로 대충 틀어막아도 찔끔찔끔 물조각은 새게 마련이다.
그녀의 눈물샘은 이미 터져버린 상태였다.

 죽은 듯이 자더라도 깰 때까지 내버려둬 달라는 그녀의 말이 썩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눈 알이 시뻘게지도록 울어대는 나경을 쉬게 해주어야 했다.

 따르릉...따르릉...

 전화가 온건가?
 잠결에 얼핏 전화벨을 들은 것 같아 몸을 뒤척였지만, 꿈인 것 처럼 이내 조용해졌다.
 나경은은 다시 침대가 끌어당기는 기운을 뿌리치지 못하고, 침대 속으로 빨려 들었다.

 나경은그녀 자신이 예측한대로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서야 뒤척거리는 아주 작은 움직임을 보이면서 눈을 떴다.

 커튼으로 가리워진 방안은 어두웠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안이 따끔거렸고, 나경은 물을 마시고 싶었다.
기절이라도 한 사람처럼 잠들어 비린 사람치고는 의외로 헤어스타일은 망가지지 않았다.

 창 밖에는 어둠이 깔려있었고, 반쯤 열어놓은 창 사이로 그리 덥지 않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똑...똑...똑...

 짧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정확히 세 번 문을 두드린 정민은 벌써 열차례 돌아서고 있는 중이었다.

 “들어와..“

 “깼구나!“

 “응...“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잠들어 있었어.“

 “그랬구나...30분 정도밖에 잔 것 같지 않은데..“

 “뭐 좀 먹어야지? 니 몫으로 엄마가 챙겨놓은 게 요리가 있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

 “금방 챙겨올게..“

 “정민아."

 “응?“

 “고마워...니가 내 옆에 있어줘서...“

 “나도 고맙게 생각해..친구란 말만 들어도 생각나는 니가 있어서..얼굴 안색이 안좋아, 좀 앉아 있어.“

 나경은  음식을 챙겨올 동안 샤워를 하기로 했다.
 찌푸둥한 기운이 비누거품과 함께 씻겨지는 것 같은 상쾌함으로 나경은 얼마만인지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모든 긴장을 푸고, 나른함 마저 느껴지는 행복이었다.

물기어린 머리카락을 타올로 감싸고 욕실을 나오는 나경을 맞이 한 것은 군침돌게 맛깔스러운 게살요리였다.

 침을 삼킬 때마다 여전히 목안은 따끔거렸지만, 부드러운 게요리는 별 거부반응 없이 그녀의 목안으로 넘어가 주었다.

 “이렇게 자고, 이렇게 먹으면 살은 찌겠다.“

김 경호의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테이블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테이블위에 둔 것 같은데.....
나경의 핸드폰은 정민의 주머니 안에서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깰까봐서...아마..영훈씨 전화일거야."

 "영훈씨?"

 "응...벌써 4번째 왔었거든."

끙....
그다지 받고 싶지 않은 전화였다.
 나경은 어설픈 미소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정민의 손에 쥐어진 송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야!“

 아고, 깜짝이야...뭐야, 이사람.

 이미 정민에게 들은 바는 있었지만, 다짜고짜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성질을 내고 있는 영훈이 마치 송수화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나경은 송수화기를 쳐다보았다.

 나경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상대에게 [야!] 라고 지칭하는 영훈에게 그만하라는 말이나, 덩달아 바락바락 대드는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죄목으로 계속되는 영훈의 화를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묵묵히 받아들였다.

 "기혁이가 싫어졌으면, 싫어졌다고.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해야지. 치사하게 핸드폰을 죽여놔?!"

 "핸드....!"

 핸드폰을 죽여놓지는 않았다는 말을 하려다 나경은 민주를 만나면서 폰의 전원을 내린 것을 기억해냈다.

 "그 새끼 지금 어떤 상탠 줄이나 알아? 회사 문도 거의 닫을 판국이라구...이 달 직원들 월급도 적금깨서 지불했어. 근데 너란 여자는 그렇게 태평 치고 있냐? 너 정말 그 새낄 사랑하긴 한거야?"

 어째서 그것마저도 내 책임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나경은 여린 숨소리만 내뿜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것으로 알알이 영그는 기혁에 대한 그리움을 묻어내었던 며칠의 시간이 떠올라 헉하고 숨이 막혀왔다.

길고긴 영훈의 신경질을 받아낸 나경 앞으로 커피 한잔이 내려졌다.

 "고마워...."

 나경은 핸드폰에 남겨진 음성확인을 했다.
전화속 여자의 음성에 따라 비밀번호를 누르고, 음성 메세지를 듣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숫자 1을 눌렀다.

 “나야...그냥 무작정 나왔다. 왜 이렇게 답답하니...온다고 온 것이 해운대로군...여기오니까 젠장할...니 생각만 더 난다. 잠깐 볼 수 있겠니? 그랜드 호텔 커피숍이다. 일년전에 만난 곳이라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택시타고 와라. 여길 모르는 운전기사가 있다면, 필시 간첩일거다. 기다릴게.“

 [두 번째 음성 메시지입니다.]

 “나올 거라고...생각했던 시간에서 한 시간이 지났다. 아직도 니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기다릴게.“

 [세 번째 음성 메시지입니다.]

 “나오고 있는 중이니? 두잔째 커피에 다섯 개피의 담배를 피고 있다. 이제 그만 날 용서해주면 안되겠니? 기다릴게.“

 [네 번째 음성메세지입니다.]

 “이제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랑 이제는 끝인거니? 하지만...널 기다릴께."

 [다섯 번째 음성메세지입니다

 “음...네시간째 기다렸는데...내게 와주지도 않고, 전화도 되지 않는구나. 나경아...정말로...정말...니가 보고 싶다...."

 [더 이상 수신된 음성 메시지가 없습니다, 다시 듣고 싶으시면 1번을.......]

 기다린다는 말을 하지 않은 다섯번째의 음성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나경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아무리 잇몸을 깨물어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경아...지금은 가고 없을거야....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더....."

 나경은 머리카락을 채 말리지도 않고, 정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뭘 입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손에 닿는대로, 눈에 띄는 대로 옷을 갈이입고, 집을 나섰다.

 급히 택시에 올라앉은 나경은 기혁에게 몇번이고 전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기혁의 핸드폰이 죽어있었다.

 두 손을 깍지 낀 채, 꺽기를 하는 것으로 흥분을 가라 앉히려고 했지만, 끝으로 치닫고 있는 절망으로 가득차 있는 그녀로서는 부질없는 손장난이었다.
 
 해운대 밤 바람은 그녀의 어깨를 옴츠려 들게 했지만, 나경은 한기를 느낄 새가 없었다.

 뛰어서는 안된다는 경고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으레히 정숙한 걸음으로 구둣발소리도 죽이면서 들어서는 곳이 호텔 커피숍이었지만, 나경은 죽어라고 달려 들어갔다.

 기혁은 어디에고 없었다.
기혁이 있을 시간에서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고 정민이 일깨워 주었지만, 나경은 기혁을 찾는 헛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손님..누굴 찾으시는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허억...장 기..혁...“

 “찾으시는 손님 성함이 장 자, 기 자, 혁 자...씨로군요...“

 “네...“

 전직이 전화 교환원이 아니였을까 생각나게 하는 어투의 웨이츄리스는 장 기혁이라는 이란은 서너번 방송해주었다.

 짜잔하고 나타나 주면 좋으련만....

 “손님...죄송하지만....“

 웨이츄리스의 다음 말을 나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기혁이 그 자리에 없는 것이 자신의 책임인양 미안해하는 웨이츄리스를 쳐다보면서 미소 짓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핸드폰을 꼭 쥔 채로 우는 것뿐이었다.

 

[오 현란-그는 떠나고 나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