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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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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사랑 23장


BY 어지니 2003-06-27

 “넌 비하고 무슨 사돈이라도 맺었냐? 우산은 무슨 장식으로 가지고 나간거야? 뭔 놈의 비를 그렇게 맞고 오냐?!"

 "너 요즘들어 말투가 너무 걸걸해지는 거 알아? 그러다 버릇되면 어쩌려구 그래?"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고 다니니 하는 말이야...."

 “왜 그렇게 짜증이야? 난 좋기만 하구만..."

 “좋기만 하다는 애가 맨날 아프니?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도 아니고, 누가 너더러 꽃다운 20대라고 하겠어?"

 "짜자안~~~이게 뭐게?"

 한꺼번에 몰리는 인파를 염두해두고, 앵콜을 목메어 부르는 라스트 타임에 콘서트장을 나오던 나경은 콘서트장을 들어설 때부터 유심히 봐 두었던 매장으로 들어섰다.

 기혁으로 인해 매번 아파하는 자신을 위해 밤잠 설쳐가면서 늘 지켜준 친구에게 너무나 잘어울리는 악세서리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요즘 한창 유행인 오리엔탈리즘 목걸이 귀걸이세트를 정민이 좋아하는 쪽빛나는 포장지로 감싸주었다.

이 험난한 세상에 늘 한결같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가....

평소때 같지 않게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몸을 흔들어대며 드밀어대는 쪽빛 상자보다 나경을 더 유심히 쳐다보았다.

 "팔 아퍼..."

 "누가 이런 선물이나 하래? 난 니가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어."

 "이젠...아플 일도 없어...."

 아플 일이 없다는 것은 기혁을 더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을 지키겠다는 말이었지만, 정민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접을 수 있는 사랑이었다면....낳아주고 홀로 키운 어머니를 등지고, 정혼자를 배신하고....그리고, 일년이 지나도록 가슴에 품고 있지는 않았을테니...

 "우와...선물 고르는 눈은 상당한데? 정말 갖고 싶었던 거야...고마워."

 "마음에 든다니 내가 더 고마워..."

 "마음에 딱 드는 선물을 해준 감사의 마음으로 커피 한잔 맛있게 타줄까?"

 "뭘 물어봐...나야 타주면 고맙지~감사하지~"

 커피와 프림을 잔에 채우던 정민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홱 돌아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커피가 떨어졌어?"

 "아니, 그게 아니구...너 나가고 두시간 쯤 지나서..박 영훈이라는 사람한테서 전화 왔었어."

 “박 영훈? 누구지? 모르는 사람인데...“

 “장 기혁씨 친구래드라.“
 
 스스로 잊어버리겠다고, 끝내버리겠다고 펑펑 눈물을 쏟아내면서 가슴을 쥐어뜯던 친구의 얼굴이 단지 장 기혁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전해지자 일순간 표정이 암울해지고 있었다.

 “어쩐지 처음 듣는 이름이드라니...“

 나경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는 헛손짓을 하면서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얼굴을 가렸다.

 “영훈이라는 그 사람...너, 콘서트 갔다니까 넌 그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기혁씬 일도 제대로 못하고, 술만 마시고 있다면서 있는대로 성질을 내지 뭐야...그래서 내가 그랬지. 넌 죽을 만큼 아파도 기혁실 원망한 적 없다구 말야...그러니까, 뭐 지켜보는 마음이 아프데나 어쩌나 그러드라구....나경아?"

 “응...듣고 있어, 말해.“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뭐.“

 “그 사람한텐....기혁씨 말야......내가 더 이상 얼쩡거리지 않는게 우리 두사람을 위해서 좋을 것 같애....그리고, 나 없이도 그 사람은 잘 견뎌낼 거야.... 영훈씨라는 사람도...진심으로 기혁씰 걱정해주는 것 같구...그런 사람이 그 사람 곁에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참 고마운 일이야.“

 “지금은 그렇게 잘 견뎌내는 것 같지가 않던데? 일도 제대로 못하고, 술만 마시고 있다잖아...."

 “사랑한다면 사랑만 생각하라구...그렇다면, 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가봐. 자꾸만 욕심이 생겨...나만 바라봐주고..나만 생각해주기를 바래.“

 “너무 많이 사랑해서 그런거지, 뭐..."

 “휴우~ 모르겠어..그 사람하고 난 자꾸만 엉켜.“

 “사랑하는 것도 너고, 그 엉킨 사랑을 풀어나가는 것도 너야. 난 너처럼 지독한 사랑을 못해봐서 모르겠는데....순간의 감정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면....그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짓일거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하고 흘릴 것 같은 표정에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나경은 친구의 말에 동조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사랑한다면, 자존심도 필요없고, 희생쯤은 감수해야 한다고...사랑한다면, 사랑 하나만으로 족한 거라구...
근데...그 사람을 사랑하는데....너무 너무 사랑하는데.....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상채기에게 주기만 하는 사랑...이제 안하고 싶어.
차라리..그리워서, 보고싶어서..우는 날이 많아도 가슴에이는 날이 많아도 그냥 그렇게 멀리서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할래.
 

 맞벌이 부부가 많은 아파트 부지에 대리점을 옮긴 이유로는 김치의 주문량이 곱절로 늘어 전화주문 받는 일도 예삿일 아니었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해야 하는 것이 전화업무인지라...정오쯤에는 입술이 얼얼해졌다.

  “엄마?!“

 두 팔을 높이 쳐들어 뻐근해진 어깨근육을 풀고 있을 때, 나경의 어머니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일년이 넘게 언제나 나경쪽에서 연락을 취하고 있는 터였다.
딸아이가 집을 나간 1년 8개월이라는 세월을 뺀다면, 그 나머지 세월동안....큰소리 한번 내보지 않고 키워온 딸이었고, 그렇게 크게 야단칠 짓을 저지르지 않은 딸이었다.
그런 딸이었으니, 그녀가 한 짓은 그냥 배신이 아니라, 배신의 원조격쯤 되는 짓이었다.

그러나, 더 멀리...더 깊숙이 숨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어디에 있냐고...집으로 돌아오라는 한마디 채근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의 전화는 반갑기보다는 왠지 불길한 쪽으로 생각을 몰아가고 있었다.

 “바쁜데 전화한 거 아니니?“

 “아니, 아니야...엄마, 어디 아파? 목소리가 왜 그래요?"

 “난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넌 어떠니?"

 “저도 잘 있어요...정민이 어머니랑, 정민이가 얼마나 잘 해주는데...."

 “그래, 시간 내서 정민이랑 집에 한 번 오렴....나경아..."

 “얘기해, 엄마...무슨 일 있는거지? 그렇지?"

 “사실은, 사실은 말이다...“

 어렵게 어렵게 입술을 달싹거려가면서 다음 말을 잇는 어머니의 말에 뭐라고 해야 할지...아니, 사실은 무슨 말을 할 염치가 없었다.

 “너한테 전해야 할지 어떨지 몰라...많이 고민했다만...그쪽에서 널 만나길 원한다니...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구나. 모르고 있다가 불쑥 나타나면 놀라잖아...지영이도 너 연락처는 모른다고 했다는데...마음만 먹으면 전화번호 알아내는 것은 요즘 세상에 일도 아니잖니..."

 "알았어요....엄마, 알았어요....내가 알았으니까...이젠 걱정하지 마..."

 본인으로 인해 누군가 굳이 행복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나, 본인으로 인해 불행해지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고, 나경의 생각이기도 했다.
 
 “어머니..어디 편찮으시데?“

 “아니..“

 “근데, 니 표정이 왜 그래?"

 "승규씨가 별거중이래.“
 
 “승규씨라면....너랑 결혼할 뻔 했다던 그 남자 아냐?"

 “그래...“

 코 앞으로 바짝 다가온 결혼을 깨뜨리고, 메몰차게 돌아섰지만, 승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승규는 딴 놈에게 정신이 팔려 홀어머니에게마저 상처를 주었던 여자에게 연연해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승규에 관해서 뭔가 잘못 보고, 잘못 알고 있었다라는 생각은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승규씨가 그렇게 된 건...다 내 탓이야.“

 “너 때문이래?"

 "그것까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그럼 이유가 뭐겠어...나에 대해 알아버린 거겠지..."

 "아무리 그렇다고...결혼후에 니가 뭘 어쩐것도 아닌데...이제와 너한테 책임을 전가시킬 일이 아니야."

 “모든 원인은 내게 있어..."

 "기분도 꿀꿀한데 마치고 술이나 한잔 하자."

 정민의 표현처럼 기분은 꿀꿀했지만, 그런 기분 일수록 알코올을 몸안으로 스미게 하는 일은 자중해야 한다.

 감정에 치우쳐 느낌이 이끄는 대로 인생항로를 바꿔버린 그녀였었다.
자신의 감정마저도 제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이어지지 않았던가.
그 흐드러지는 감정에 알코올까지 더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다시 접하게 될 것이다.


 음.......

 시작이 깨끗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새벽녘에는 뒤척거리다 침대 아래로 쿵 떨어졌고, 비몽사몽 꿈에서 덜 깬 상태에서 커피를 타다 설탕대신 소금을 듬뿍 집어 넣었고, 출근하면서는 꾸벅꾸벅 졸다가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버렸다.

 “나보다 먼저 나갔잖아.“

 “졸다가 두 정거장이 지나버렸지 뭐야.“

 “킥킥...“

 “친구의 불행을 보고 재미난 웃음을 짓다니...아주 심뽀가 고약해.“
 
 따르릉....

 "이런 아침에 무슨 전화지? 정말 주문전화의 시작은 아니겠지? 네~ 맛나, 김 정민입니다...네? 나경이요? 누구시죠?"

 출근하자마자 나경을 찾는 전화에 본인인 나경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정민까지 경색된 어조로 되묻고 있었다.

 "아...안녕하세요...오랜만이죠? 이렇게 전화로만 인사할 게 아니라, 언제 우리 셋이서 한번 뭉치죠...네, 잠시 기다려요...지영씨..."

 어머니에 이어 지영의 전화.... 뇌리에 파박 꽂히는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나경은 애써 태연한 어투로 말했다.
 
 “전화왔든?“

 “선영이는 잘 크구?"

 “아직 안 온 모양이네...니가 그렇게 태평치고 있는 걸 보니 말야.“

 “응...아직..."

 “승규씨 와이프 말이지...그 여자 때문에 우리 부부 어제 거하게 한 판 했다는 거 아니니.“

 “무슨 말이야? 설마 거길 찾아갔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닌데....니 연락처 말해 줄 때까지 날 괴롭히겠다면서 협박을 하지 뭐야... 아무리 술김이라지만, 그 여자, 아주 제 정신이 아니드라구... 신랑이 전화코드를 뽑아버렸지 뭐야. 그러고보니까 나도 닭대가린 거 있지. 진작에 코드를 뽑아버렸으면 신랑이랑 싸우지 않아도 됐을텐데 말야.“

 "미안해...나 때문에 싸우기까지 하구..."

 “뭐 사람을 풀어서 알아낸다고 난리 부르스를 추더니 아직까지 너한테 전화도 안하다니...그러고보면 두고보잔 사람 겁낼 거 정말 없다, 그치?“

 테이블 정도는 우습게 엎어버리겠다는 승규의 와이프....그녀가 이내 자신의 앞에 떡하니 나타나는 것도 이제는 시간문제인 듯 싶었다.
어차피 닥쳐올 일이라면 오고 말 것을...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하다고 해봐야 부질 없다는 것을 어느새 살아가면서 터득한 터였다.

 잊고 지냈던 도의적인 책임감이 다시 되살아나 가슴을 짓이기는 것 같아 답답증으로 느끼며 창을 활짝 열어제꼈다.

 애초부터 절절이 가슴 미어지듯이 승규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충분히 인간적으로...남자로서...존중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가 서 있는 길이 아닌 길로 접어 들었을때....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역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툴툴 먼지 털어내듯이 털어버리며 다른 길로 접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이 지경이 되버리다니....
 
 머리는 잊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만나왔던 승규의 전화번호를 손가락은 기억해내고 있었다.
 아, 습관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여보세요...“
 
 햇살이 마냥 고와 산보라도 나가고 싶은 쾌창한 9월 하늘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만사가 귀찮아 전화도 받기 싫은 것을 억지로 받고 있는 듯,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음성을 들으니 더 미안해져...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폰을 내려놓고 말았다.

 이제와 뻔뻔스럽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 하다니....
한 번 동강난 가슴이 원상 복귀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정말 머리에 띠라도 두르고 드러눕고 싶을 만큼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따르릉. 따르릉.

 퇴근시간 무렵.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폰으로 전해지는 상대 여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아침처럼 기분좋게 들려오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승규의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 세상이 참 편해졌어요.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의 개인 정보쯤은 금방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편하기도 하지만, 끔찍하기도 하지. 내가 모르는 새...누군가 나를 알고 있다는 건 그다지 기분좋은 일이 아니야.

 “얼굴이 보고 싶어요.“

 나도 여자지만, 여자들은 참 이상해.
상대 여자의 어떤 면이 좋았을까...어떤 면을 사랑해 못 잊고 있을까가 더 중대사안일 것 같은데...여자들은 왜 한결같이 어떻게 생겼냐가 궁금한 것일까...?

 유리알이라는 상호를 내건 카페는 카페명처럼 건물 전체가 스팬드럴 유리로 되어 있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아 가끔 자신의 전신이 보이는 윈도우를 거울 쯤으로 착각하고 이를 벌리고... 눈꼽을 떼는 여자를 볼 수 있었고, 안에서는 밖의 정경이 그대로 다 보이는 스팬드럴 유리는...우리 사람들의 이중성처럼 같은 모습을 하고도 그렇게 다른 성질을 띄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나경을 향해 손을 흔들어 자신의 위치를 밝혀주는 여자가 있었다.
 어깨 아래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한번도 염색하지 않은 듯 까만 색이었고, 피부는 외부와 차단되어 활동하는 에스컬레이터 걸처럼 하얀 여자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본 승규의 와이프는 ...승규가 왜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났는지 이상할 정도로 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조 민주예요.“

 “아시겠지만, 김 나경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에 와 승규의 와이프를 만난다는 것도 그러했지만, 사람을 시켜 자신에 대한 것을 요모조모 알아낸 민주에게 대한 첫 느낌이 매끄럽지 않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남편의 옛여자이고, 지금도 남편의 가슴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여자의 빰따귀를 때리지 않는 것도 민주로서는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나경이라는 여자는 앵돌아진 음성으로 자신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앉죠."

 조 민주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고, 덩달아 나경도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말았다.
 처음이라는 것을 잘 시도하지 않는 나경이었다.
 늘 하던 대로....늘 한결같은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었건만....

 승규의 여자라는 것 말고는 처음보는 여자...그리고, 생소한 에스프레소를 앞에 둔 나경은 자꾸만 재채기가 솟구쳐 얼굴이 발개졌다.

 “나경씨도 나 만큼 이 자리가 껄끄러운 모양이네요."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는 재채기를 연달아 하던 나경은 민주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머그컵이 넘칠 정도로 진하고 달게 마시는 나경의 커피스타일로 볼 때. 아이들 소꼽장난하는 듯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의 쓰디쓴 맛은 영 아니었다.

 한 번 마셔본 것으로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제껴진 에스프레소처럼 민주도 두 번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날 만나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해가 너무 길면 안될 것 같아서요."
 
 "오해라니, 표현을 잘못 한 것 같네요. “

 “그런가요? 난 아주 적절한 단어를 썼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약간은 과장되게 웃음을 짓는 나경이 민주로서는 상당히 거만하게 보였고, 불쾌하기 그지 없었다.

 “왜 승규씨를 떠났죠?“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알면서 묻는 민주씨의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하는 중이예요.“

 “난 알면서 묻는 짓같은 거 유치해서 안해요."

 “모른다구요?“

 나경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자신이 떠나간 까닭을 모른다는 것은 승규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입을 함구했어야 했을 것이다.

 정작 그 누구보다도 비난을 쏟을 장본인이 오히려 사람들의 비난을 막아주는 방패역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동 받은 얼굴이네요.“

 솔직히 그랬다.
민주의 말대로 나경은 처음으로 승규라는 남자에게 감동받고 있었다.

 “내가 아는 박 승규란 남자...지나치게 분명하고, 또 지나치게 확실한 사람이예요. 그런 사람이 왜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돌아선 나를 못 잊어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나도 약혼을 하고, 결혼직전에 돌아선 나경씨에게 또 다른 남자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죠....하지만, 승규씬 그런 얘긴 하지도 않았고....했다가...맞을 뻔 했어요."

 왜 요즘따라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한 때가 많아지는 거지?
내가 그렇게도 잘못 살고 있는 것인가.

 “그래요....짐작하고 있는대로에요...하지만, 두 사람이 별거중인 것까지는 내 책임으로 돌리지 말아요..."

 “책임을 회피하는 군요.“

 “그렇게 분명하고, 그렇게 확실한 사람이...음....아, 미안해요.“

 “그렇게 진땀빼면서 말을 지어내려니 목이 메이죠......에스프레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거 시켜요."

 윽! 가슴 저림....

 그러나, 민주는 처음 느낌처럼....건방지고, 모진 성격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은근히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그녀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요....그래야겠어요...."

 나경은 커피샤워를 재주문했고, 민주는 다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민주씨...사람은 저마다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는 학술보고서에 대한 거 들어봤어요?‘

 “입에 맞는 커피를 한잔 하더니 다시 기운이 샘솟는 모양이죠? 무슨 되먹잖은 말을 하려고 학술 보고서까지 들먹이는에요?"

 처음부터 여유자작인 나경의 태도가 거슬렸다.
진땀을 빼며 말을 버벅거리도 시원찮을 판에 처음부터 여유자작인 나경의 태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말투도 거칠어지고 있었다.

 “하하하...“

 나경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면서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었다.

 “김 나경씨! 난 지금 미칠 것 같다구요? 남편 과거의 여자를 대하고 있는 내 심정을 알기나 한 거예요?! 어쩜 그렇게 웃을 수가 있죠....“

 분에 못 이긴 눈물인지....가슴이 아리는 것인지...민주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어쩜 두 사람...그렇게 닮을 수 있나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뭐라구요?“

 “마치 두사람 서로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제멋대로 사람의 생각을 판단하는 거 말이에요. 승규씨랑 닮았어요....그런 말 안하던가요? 민주씨랑 닮은 것 같다구..."

 “가끔...“

 “그랬을 거예요. 난 늘 그사람에게 타박을 받았거든요.....승규씬 내 스타일 중 어느 하나도 맘에 들어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머리를 길렀지만...그땐 숏카트였어요....그것부터 시작해 줄차게 마셔대는 커피며..... 맵고 짜게 먹는 식성도...글 쓴답시고, 늦게 잠들어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것 까지...그런 타박 받은 적 없죠? 민주씬."

 “그래요, 그런 적은 없어요.“

 남편의 스타일과는 너무나 정반대인 여자...그 여자가 남편에게 조금치의 미련도 없다는 것이 느껴져서 일까...
 찔끔거리는 눈물을 훔쳐내는 민주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대화를 이끌어감에 있어 상대방을 스토리 전개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야말로 최고의 대화술이라는 것을 나경은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부터...듣는 입장이었던 나경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랬을 거예요. 그 사람이 늘 내게 말하던 이상형은 민주씨니까..."

 "두 사람...교제기간이 얼마나 길었어요?"

 "사오년쯤....처음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밍밍했어요....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승규씨가 하는 신체 접촉이래봐야....손잡고...키스하는 정도였어요...."

교제기간동안 얼마나 깊은 관계였는가가 민주가 정작 알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었다.

 승규씨...미안해...나에 대한 승규씨의 사랑을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해줘...하지만, 나 때문에 더 이상 승규씨의 인생이 헝클어지는 거...싫어! 승규씨의 사랑은 내 가슴속에 담아둘게...

 “하지만...나경씨 말대로 승규씨의 이상형이 나고...날 사랑까지는 아니어도...그런대로 괜찮다는 판단하에 결혼까지 했는데....우린 왜 이 모양 이꼴이 되버린 거죠?"

 승규와 상관없이 만났드라면 좋은 언니, 동생이 되었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승규의 가슴 언저리를 돌고 있는 나경에 대한 존재가 민주로서는 성가시고, 껄끄러웠다.

 “승규씬 누구에게든 져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뭉쳐진 사람이예요..나랑 헤어지고...민주씨를 바로 만난 것도 아니었다니...일 밖에는 그 사람의 상처를 묻게 해줄 것은 없었을 거에요....그 안에 패여버린 골이.....습관처럼 일에 매달리게 했을 거에요..."

 "그러니 그말은 그 나쁜 습관에서 스스로 헤어 나올때까지...난 목석처럼...기다려야 한다는 거군요..."

 “승규씰 사랑한다면...“

 “정말 피곤해서 사랑도 못하겠어요...."

 그래요....사랑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목마르게 하는 것도 없을 거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 상대의 비위를 맞춰가며 끔찍하게 싫어하는 일도 해야 하는 사랑은 가끔 사람을 질리게도 하죠....

  “끔찍하게 들리네요.“

 “사랑하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는 것은...그래요. 끔찍한 일이죠...“

 “나경씨야말로 심파술을 연마한 사람 같네요..."

 “민주씨와 난 상황은 틀리지만, 쉽지 않은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민주는 말했다.

 가끔, 아주 가끔은 그를 몰랐던 때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막무가내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승규를 사랑하는 마음을 아주 버리지 못한 민주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품고 그리워 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고이는 민주의 눈물에 나경의 코 끝도 시큰 거렸다.

 기혁이 보고 싶다....!

[박효신-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