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야! 지금 이 설레이는 감정이 진짜 사랑인걸까?“
” 아니면 그동안 정에 굶주려서 착각하고 있는걸까
” 이런 감정 진짜 처음이야!“
” 아직도 그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아!“
손톱이 부러져 피가 난 손가락이 하나도 아프지 않다.
그가 정성스럽게 붙여준 반창고가 떼어질까봐 겁이 나 손도 못씻을 것 같다.
시퍼렇게 멍든 무릎에 그가 발라준 연고가 아직도 가장자리에 하얗게 남아 있다. 점점 더 안으로 그의 사랑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 친구야! 혹시 그 반지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까?“
” 나한테 주려고 그렇게 소중하게 손가락에 끼고 다닌거 아닐까?“
” 그 반지 주인공이 진짜 나였으면 좋겠어!“
” 나도 멋있는 프로포즈 한 번 받아 보고 싶거든!“
” 나한테도 그럴 자격 충분히 있는거지?“
친구는 말없이 벽만 바라보고 있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통하는 기분이다.
불빛에 반사된 플라스틱 눈빛이 말해 주는 것 같다.
그 인간과 해신이의 사랑이 궁금해진다.
디데이 달력은 이제 삼일도 남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본다.
라면의 틀에서 벗어나 먹방이나 보면서 군침 흘리던 꼬질꼬질한 모습을 벗어 던지고 당당하게 후라이팬앞에 서 본다.
스파게티면을 삶고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준비해 둔 재료를 달달 볶는 소리가 재밌다. 아스파라거스가 마늘쫑처럼 생겨 신기하기만 하다.
새우를 일부러 듬뿍 넣었다. 튀김만 먹어 봤을 뿐 스파게티에 넣어 먹어 보는 건 처음이다. 생각보다 맛나게 만들어진 스파게티를 그릇에 예쁘게 담고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 위에 눈물이 뚝 떨어진다.
욱신거리는 손가락위에 붙여진 사랑의 반창고를 바라보며 먹는 맛이 더 달콤하다. 해신이와 그 인간은 얼마나 맛난걸 먹으면서 이 시간을 즐기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아직 그 인간은 가슴에 미련한 사랑으로 남아 있다.
왜 sns가 잠겨 있는걸까?
수없이 물음표를 던져 보아도 답을 알 수가 없다.
새우를 넣은 오일 파스타가 너무 맛있다.
해신이가 자주 사진을 찍어 올리던 파스타를 약이 올라 먹어 본다.
바닥이 드러나는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먹는 사이
드르륵
핸드폰 알림벨이 울린다.
그 인간 sns 알림벨이다.
잠겨 있던 sns 가 다시 풀렸다.
예전의 함박웃음은 사라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찍은 사진이 인사를 한다.
해신이는 어디 가고 사라진채 혼자 공항에서 찍은 사진이다.
드디어 깨진걸까?
그럼 그렇지!
그 버릇 어디 가겠어?
고소한 땅콩맛이 진하게 느껴진다.
해신이가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심하게 공격을 당했다.
당장 sns를 그만두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해신이에게 사 준 물건값을 하나하나 적어 게시판에
도배를 하기 시작했다.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길거리를 선물하듯이
날짜까지 정확하게 적어 올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치사한 인간이 다 있나 싶어 sns를 잠시 잠가 놓았었다.
해신이는 화를 내며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가버렸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렇게 가 버린 것이다.
한국으로 가기 전 문자 하나를 남겼다.
옥탑방에서 빨리 나가라는 것이다.
다짜고짜 대책도 없이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 어이가 없다.
그 인간은 하소연을 길게도 늘어 놓는다.
그런 여자인줄 모르고 만나고 사랑한건지 묻고 싶다.
해신이가 얼마나 가면을 두껍게 쓰고 다니는지 모르고 있었으니 답답하다.
남의 가슴에 대못 박은 죄값을 단단히 치르고 있다.
땅콩이 고소하고 맛있다.
해신이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해신이 sns를 들여다 본다.
역시나 그 인간하고 찍은 사진은 모조리 다 지워버리고 불쌍한 척
개폼을 잡고 있다.
눈밑은 시커멓게 아이섀도우를 칠하고 두루마리 화장지로 눈물모양까지
길게 붙이고는 하소연을 길게 늘어 놓는다.
사랑에 버림받은 나
‘웃기고 있네! ’
하마터면 전송버튼을 누를 뻔 했다.
억지로 삭제버튼을 꾹 누른다.
훌쩍!
너무 울어서 부은 눈!
아 슬프다!
다시는 사랑같은거 하지 않을거야!
‘네가 사랑이 뭔지나 아니?’
‘알아?’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 생각이 없는건지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다.
해신이의 sns는 어느새 지나간 남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서로 도배하고 있었다.
찌질한 인간들의 푸념쇼는 계속 된다.
속으로는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슴 한켠에서는 해신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갈대같은 질투심이다.
데이트 폭력!
꼭 때려야만 폭력은 아니다.
점점 더 심해지는 sns 공격글에 재미를 넘어서서 공포가 느껴진다.
해신이 가방 백만원
해신이 원피스 팔십만원
해신이 구두 백만원
해신이가 먹은 파스타 이만원
해신이가 마신 칵테일 한 잔 이만원
‘인간아! 그러고 왜 만났니?’
청구서 악플을 다는 인간의 sns에 들어가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파스타 하나 사준것도 아까워서 하소연을 늘어 놓는다.
아르바이트해서 겨우 받은 돈으로 학자금 대출금을 갚고 카드값을 갚고 나
라면에 소주 사 먹는 것도 사치가 되어 버릴 정도로 남는게 없다.
그래도 해신이한테는 잘 해주고 싶었다.
빨리 취직해서 회사에 다니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더 열심히 공부했지만, 한 달도 되지못해 차이고 말았다.
이유도 없이 무조건 싫다는 건 말이 안된다.
해신이가 갖고 싶다고 하는 건 무조건 다 사 줬다.
카드한도가 허락하는 금액까지 최대한 긁어서 사주려고 노력했다.
국내에는 없는 물건이 많아 생전 처음 해외직구까지 해서 사다 바쳤다.
명품가방, 명품신발, 명품 원피스를 선물해 줄때마다 좋아서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안사줄 수가 없었다.
해신이는 명품잡지를 보며 갖고 싶은 걸 스크랩하는 걸 제일 좋아한다.
한 번은 보석이 잔뜩 박힌 명품시계를 사달라고 해서 당황한 적이 있다.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입이 떡 벌어졌다.
해신이한테 채인 이유가 이 명품시계를 사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정말 억울하다.
그동안 난 해신이에게 어떤 존재였던걸까?
명품시계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걸어 놓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모티콘을 올려 놓았다. 가격이 정말 무시무시하다.
그냥 사주기 싫다고 하면 끝나는 걸 찌질하게 손해배상 청구까지 하는 모습에기가 막힌다. sns를 구석구석 들여다 보면 해신에게 차일만한 충분한 증거들이 눈에 보인다.
비공개로 간직해 놓았던 해신이와의 추억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에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고 싶다.
‘ 미친놈!’
진짜 미친놈인 게 분명하다.
그 인간 sns에도 그대로 복사를 해서 올려 놓고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있다.
정말 치사한 인간이다.
아직 할부금액이 많이 남았으니까 나머지 금액은 그쪽이 알아서 부치길
나도 힘들게 아르바이트해서 겨우 먹고 사는 사람이야!
지금 카드값 갚느라 라면도 못사먹고 있는데 둘이 여행을 가?
난 선물받은거 하나 없는데 참 많이도 받았네?!
‘ 해신이가 왜 한달만에 헤어졌는지 알거 같다!’
‘ 네가 그러고도 사랑한거라고 할 수 있어?’
‘ 치사한 인간이네! 진짜!’
손가락을 꾹꾹 눌러 쓰던 답글들을 지우느라 힘이 들었다.
해신이는 여전히 슬픈 척 연극을 하며 셀카를 찍어 올린다.
‘일부러 저러는 걸까? 저렇게 생각이 없는 애였나?’
거쳐간 남자들의 손해배상 퍼레이드는 계속 되고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남자가 긴 영수증을 꺠알같이 적어 올렸다.
몸과 마음을 바쳐 해신이에게 충성한 댓가가 겨우 이것뿐이란 말인가?
진짜 살 맛이 나지 않는다.
나처럼 잘 생기고 흠 잡을데 없는 남자가 왜 해신이한테
그것도 한달만에 차인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 좋다고 매일 문자 보내고 전화하는 여자들이 줄을 섰는데
해신이는 내가 싫다고 난리를 친다.
너무 억울하다.
그동안 너한테 해 준거 다 받아야겠어!
그러니까 나한테 받은걸 돌려 주던지 아니면 돈으로 물어주던지 알아서 해!
가방이랑 시계 얼마나 힘들게 구한건 줄 알아?
눈이 빠지게 해외직구 다 뒤져서 사준건데 그거 받자마자
헤어지자고 하는건 무슨 심보니?
가방값이 삼백만원이다!
시계도 삼백만원!
인기가 많아 몇 달전부터 예약을 해야 겨우 구할 수 있다는 그 가방!
그 시계사진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해신이가 매일 자랑하며 찍어 올리던 그 가방과 시계를 사 준 주인공이
이제는 치사하게 돌려 달라고 난리를 친다.
선물받은 물건 중에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고 입술도장까지 찍어 놓은 걸
과연 쉽게 돌려줄지 궁금해진다.
남자랑 헤어지면서 한 번도 선물 받은 걸 돌려준 적이 없는 애가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그 인간 sns에도 그대로 복사를 해 붙이기를 해 놓는 치졸한 남자다.
영수증 청구서 테러에도 꼼짝하지 않던 그 인간이 드디어 답글을 올렸다.
테러금지!
댁들이 선물해 준 물건값을 물어 주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음
나도 피해자임
영수증 도배를 계속 할시 나도 손해배상 청구소송하겠음!
해신이한테만 피해금액 청구할것!
나도 먹고 살기 힘듬!
해신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모티콘을 올려놓고 투덜거리며
푸념을 길게 늘어 놓는다.
오빠들! 내가 좋아서 선물해 준거 아니야?
내가 못생기고 싫은데 사달라고 조르면 다 사줬을까?
오빠들이 이쁜 여자 좋아한거 아니었어?
난 그런 오빠들이 만나 달라고 하고 좋다고 해서
같이 밥 먹어 주고 커피도 마셔 주고 놀러도 가 줬는데 말이야
그게 그렇게 아까운거야?
커피 한 잔 값도 갚으라고 그렇게 도배를 하냐?
누가 라면 먹으면서 가방 사달라고 했니?
난 그냥 예쁘니까 갖고 싶다고 그런것밖에 없는데 말이야
왜 돈도 없는데 카드 박박 긁어서 사주고서 그 돈 갚으라고 난린데?
가방 진짜 아닌것도 많거든!
나한테 진짜라고 거짓말한 사람 이름 다 적어 볼까?
어디서 사기치고 그래?
그거 어디서 산건지 조사하면 다 나오거든!
‘ 그게 다 가짜였어?’
“ 가짜를 사주고서 진짜 명품값을 뜯어내려고 했단 말이야?‘
‘ 그럼 사기꾼이잖아! ’
‘그래서 헤어진건가?’
해신이가 쓰기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장이 올라왔다.
그거 가짜라고 누가 그래?
친구한테 어렵게 부탁해서 산건데 왜 가짜라고 사기쳐?
해신이 sns는 순식간에 진흙탕 싸움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해신이는 바로 똑같은 가방을 찍어 올리며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해 놓았다.
아무리 봐도 둘 다 똑같은 물건처럼 보인다.
시계도 구두도
해신이가 받은 건 모두 가짜들이었다.
가짜인거 알면서도 귀여워서 만나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희들 다 고소할거야!
‘ 그 인간이 사준것도 다 가짜라서 헤어진거니?’
‘ 왜 비행기 혼자 타고 오게 한 건데?’
두 사람의 이별이 시작된 건
해신이를 거쳐간 남자들의 만행때문인 걸까?
어디에도 해신이를 원망하는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정말 사랑했던 걸까?
매일 계속되는 해신이 남자들의 테러에도 해신이를 원망하는 글은 한 글자도
쓰지 않는다. 속으로 삭이는 걸까?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오늘 드디어 이사를 끝냈다.
해신이의 건물을 나서면서 가슴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진작에 나왔어야 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듯 불편한 시간들이었다.
해신이의 아버지는 밤마다 소주병을 들고 찾아와 잘 부탁한다고 울먹이시곤 했다. 해신이가 힘들게 갚고 있는 대출금 통장을 건네 주면서 돌려주라고 하셨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돌려 드리기를 반복해야 했다.
부자 아버지의 덕을 보지 않으려는 해신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이다.
해신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아버지 노릇을 하려는 걸
견디기 힘들었다는 걸 잘 안다.
처음에는 해신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자살시도를 반복하면서
삶에 대한 의지는 점점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삶의 끈을 놓는 순간마다 해신이가 있었다.
나만 바라보는 그녀에게는 느낄 수 없는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그녀다. 힘든 공무원 시험공부를 같이 하면서 쌓아 왔던 정이 있었기에 쉽게 이별을 말할 수 없었다. 그냥 곁에 있는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던 고시원 생활은 지우고 싶은 악몽같은 시간들이다.
그 지우고 싶은 시간속에 그녀가 있다.
그녀안에 기억하기 싫은 과거가 보인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사이로 남았어야 했다.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을 강요한 적이 없다.
매일 사랑을 구걸하는 것 같은 간절한 눈빛이 싫다.
그녀와 함께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커플들처럼 함께 먹는 걸 강요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달콤한 와인을 혼자 음미하고 싶을 때 그녀는 같이 마시고 싶다고 잔을 내민다. 와인맛이 뚝 떨어진다. 그녀는 와인을 함께 마실 자격이 없다.
그녀가 없는 달콤한 한 끼를 위해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해신이의 힘이 컸다.
그녀가 사 준 음식들
그녀가 사 준 선물들
몰래 꼬박꼬박 영수증을 모아 계산기를 두들겨 놓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조건 받기만 하고 차 버리는
비겁한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차가운 한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도 지친다.
죽음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죽음앞으로 다가가려는 순간마다 해신이가 서 있었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다.
그녀에게 느꼈던 족쇄같은 감정에서 벗어나 삶의 이유가 되어 주는 여자다.
‘ 넌 진짜 사람도 아니구나!’
‘ 사람이기를 포기한 놈이야!’
‘난 그냥 너대신 계산해 주는 심부름꾼이었니?’
전송버튼을 꾹 눌러 버리고 싶은 감정을 추스르며 창밖을 바라본다.
별빛에 눈물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 하아-! 친구야! 왜 난 바보처럼 살았던걸까?’
‘ 그깟 놈이 뭐라고 그렇게 멍청하게 만났던 걸까?’
‘사람대접도 봇받으면서 왜 그런걸까?’
‘ 진짜 나쁜놈인거 맞는거지?’
‘ 지가 먹은거 받은거 다 돈으로 준다고 하는것만 해도 다행인거니?’
‘친구야! 제발 말좀 해봐!’
의자를 세게 흔들며 울부짖어도 친구는 멍하니 앉아서 벽만 바라보고 있다.
‘ 차라리 나도 너처럼 아무 감정없는 곰인형으로 살고 싶어!’
‘그럼 이렇게 상처받을 일도 없고 울어야 할 일도 없잖아!’
‘ 내가 멍청한 거니?’
아무 말없이 안으로 삭이는 듯
여전히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다.
주룩주룩
아프게 비가 내린다.
캔맥주 하나 없는 텅 빈 냉장고에 공허한 한숨이 메아리친다.
그 인간이 길게 푸념을 늘어놓은 sns를 읽어 내려가는 눈망울이 처참하다.
해신이와의 사랑이 이어질 수 없는 건
지나간 남자들의 치사한 손해배상 청구 때문인 건 아니다.
‘ 그럼 왜 갑자기 헤어지는건데?’
‘ 날마다 꿀이 뚝뚝 떨어지던 사이가 왜 안좋아진 건데?’
그인간의 sns는 해신이에 대한 변명으로 도배를 하고 있다.
해신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동안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만나면서 당했던 슬픔을 이해한다.
‘ 무슨 소리지?’
‘ 뭘 이해한다는 거야?’
‘ 자기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해신이 건물에서 이사를 하는 건 우리 사이가 끝나서가 아니다.
우리는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거다.
해신이의 sns에 매일 돌아가면서 찌질남들이 내가 해신이 건물 노리고
일부러 옥상에서 사는거라고 음해를 하는게 싫다.
해신이 건물에서 살게 된 건 얼마 전 헤어샵에 강도가 침입하고 나서부터다.
다행히도 cctv가 있어 범인은 금방 잡았지만,
해신이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손님 머리를 컷트하다가 잘못 잘라서 피가 나게 하고
파마를 하다가 머리를 태워 먹어 소송까지 갈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부탁같은 걸 하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해신이가 밤에 전화를 했다.
옥상으로 이사를 하고 가끔 건물 보초를 서 달라는 거다.
관리인으로 고용이 된 셈이다.
하지만, 공짜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매달 꼬박꼬박 방세를 냈다.
여자한테 얹혀 사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녀에게 매달 카드값을 보내 주는 것도 못된놈이 되기 싫어서 그런 거다.
‘넌 이미 못된 놈이야!’
‘차라리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니?’
‘계약서라도 쓰고 만났다면 덜 비참했을거 아냐?’
나쁜 남자
많은 여자들이 그 나쁜 남자에 열광을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잘 생긴 남자들이 하는 눈물 나게 하는 일도 다 멋있어 보인다.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고하고 싶다.
나쁜 남자는 평생을 울게 하는 남자라고 말이다.
차라리 의자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저 곰인형과 이야기하는게 덜 아프다. 그래서, 혼자 중얼중얼 푸념을 늘어 놓는다.
테이블 위에 캔맥주가 색깔별로 가득하다.
한 번도 음식을 가득 차려 놓고 먹은 적이 없어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매일 그 인간과 행복하게 밥을 먹는 상상을 하며 혼자 미친 듯이 웃어댔다. 돌이켜 보면 모든게 어리석은 망상들이었다.
친구의 털이 복슬복슬한 머리를 한참동안 쓰다듬으며 슬픈 미소를 짓는다.
털이 참 부드럽다.
그 인간은 철퇴를 두른 비싼 몸이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 내가 왜 그러고 살았던 걸까?’
‘ 참 한심하게 살았어! ’
‘ 참 눈치없게 살았어! ’
‘ 네가 생각해도 내가 참 한심하지?’
친구는 여전히 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 다른 사랑! 그 다른 사랑을 찾고 싶어!’
‘ 친구야! 바보같은 사랑은 이제 그만 해야겠지?’
불빛에 반사된 플라스틱 눈동자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해신이는 지나간 남자들이 쉴 새 없이 올려 놓는 영수증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매일 함박웃음 이모티콘으로 도배를 한다.
그녀는 대단한 맨탈을 소유한게 분명하다.
오늘도 깨알같은 데이트 보고서를 떡 하니 올려 놓았다.
커피 전문점 커피는 비싸서 엄두도 못내던 내가 해신이를 위해
처음으로 애용하게 되었다.
커피가 3500원이라니!
편의점에서 파는 천원짜리 커피도 비싸서 못사먹었는데
한 조각에 육천원이나 하는 케이크까지 사게 되다니!
사랑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건가 싶다.
해신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커피 전문점에서 보통 이만원은 깨진다.
커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비싼 주스나 음료수를 사줘야 할때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왜 이렇게 음료수가 비싼지 모르겠다.
해신이 혼자 마실거만 시키면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커피를 시킨다.
왜 케이크는 꼭 먹어야 한다고 하는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좋아하는 여자를 만난다고 하지만,
근근히 하루를 버티는 나에게 너무 벅찰때가 많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예쁜 옷이나 신발이나 가방을 보면
꼭 사야 직성이 풀리는 해신이다.
해신이가 고르는 것들은 거의 명품이라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한 달 일해서 받는 월급을 다 주어도 모자라는 비싼 선물들이다.
취업문은 나날이 좁아지고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세상은 열심히 산 만큼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학자금 대출금은 몇 달째 밀려 카드를 돌려 쓰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해신이는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없는 매력을 가졌다.
나쁜 남자가 있다면
나쁜 여자도 있다.
그 나쁜 여자가 바로 해신이다.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그 자체가 매력이다.
그런 해신이를 놓치고 싶지 않아 갖고 싶다고 하는 건 뭐든지 사줬다.
덕분에 카드값은 나날이 늘어나 빚에 허덕여 숨이 찬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사랑한 나에게 돌아온 건 배신감뿐이다.
그동안 해신이에게 투자한 돈을 돌려받고 싶다.
그래서, 차곡차곡 모아 놓은 영수증을 올려 놓는다.
‘ 치사한 녀석!’
‘비싼거만 사달라고 한 해신이도 잘못이지만 그걸 다 물어내라고 난리냐?’
‘이런것도 데이트폭력이거든!’
‘때려야만 데이트폭력이냐?’
전송버튼을 누르려다가 손가락을 꾹 눌러 삭제를 한다.
영수증을 올린 남자들의 sns를 들어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사진 한 장 없다.
자연을 찍는 사진사처럼 꽃, 나무, 바다 사진, 멋있는 풍경사진 말고는
사람 얼굴 나온 사진 한 장 보이지 않는다.
‘ 친구야! 그 인간한테 카드값 물어내라고 난리치는 나도 치사한 짓하는거니?’
‘ 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가 없거든!’
‘ sns에 영수증 챙겨 놓았다고 고백한거 보면 받아도 되는거 아냐?’
‘ 이럴때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걸까?’
친구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다.
쇼핑몰에서 주문한 더치커피가 문앞에 와 있다는 문자가 반긴다.
그윽한 커피향이 집안 가득 퍼지면서 가슴을 적신다.
바보같은 사랑에 빠져 지나쳐 버린 시간들이 아쉬워 눈물이 흘러 내린다.
아픈 상처만큼 통장도 바닥이 나 아프다.
카드값을 보냈다는 그 인간의 문자가 뜬다.
그 인간에게 보상받기 위해 함께 했던 시간이 아니었기에 더 속상하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널 사랑하지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어
그 갈팡질팡하는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부담이 생긴 것 같아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너 지금 장난하니?
전송버튼을 눌러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