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를 백군데 넣었지만
어디에서도 날 불러주지 않는다
우리 국수집에서는 날 불러 주려나?
사장님! 주방에 남는 자리 없어요?
그 밑에 답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요!
설거지 잔뜩 밀려 있으니까 언제든지 두 팔 걷고 와서 일해요!
내일은 우리들이 결혼하는 날
어디서?
우리 국수집에서!
아무나 올 수 있냐고요?
누구든 오시기만 하면 환영합니다!
저희 두 사람은 모두 이 곳에서 태어났고
이 곳에서 추억을 쌓으며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저희 부모님처럼 소중한 분들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걸
배울 수 있게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나쁜 맘 먹지않고
바르게 클 수 있었던건 모두가 여러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처럼 자라야 했던 저희 두 사람을
자식처럼 품어 주시고 돌봐 주셔서 오늘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실을 비관하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으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 저를 안고 울어 주시던 송할머니!
평생 그 은혜 다 갚지 못할 것 같습니다!
새벽마다 폐지 주우러 다니시고
지하철을 타고 멀리까지 가셔서 오백원을 받아 오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도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제대로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언제나 울고 있는 저희들의 손을 붙잡고 쓰다듬어 주시면서
죽지 않고 살아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던 ‘우리 국수집’ 사장님!
평생 아버지처럼, 삼촌처럼 모시고 싶습니다!
비록 좋은 회사에 취직하지 못해
더 잘 사는 모습은 보여 드리지 못했지만
봉사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기로 약속했습니다!
오늘 저희 두 사람의 결혼식이 초라하지 않도록
멀리서도 찾아와 축하해 주신 어르신들게 감사인사 드립니다.
저희 두 사람 오늘보다 내일은 더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들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국수집’은 저희처럼 가난한 연인들에게 더 없이 소중한 공간이었습니다.
다른 연인들처럼 비싼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지 못해도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마음대로 편하게 먹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런 소중한 공간을 그대로 다시 만들어 주신 사장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은혜에 힘입어 저희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기념으로
‘우리 국수집’ 2호점을 열게 되었습니다!
아직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열심히 기술을 익히고 준비중입니다.
이제 지겨운 이력서를 쓰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왜 진작에 2호점을 차릴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배울 점도 많고 부족합니다.
오늘 저희 결혼식을 축하해 주시는 마음으로
‘우리 국수집’2호점도 축하해 주러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오늘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저희 앞으로 잘 살겠습니다!
축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건너편 모델 하우스 앞마당에는 제비뽑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넓고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이 치열하다는 기사가 실시간 탑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저 수없이 늘어선 집들 중 어디에도 저희들의 신혼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혼은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고들 말하곤 합니다.
결혼은 현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합니다.
어쩌면 저희들의 이 가난한 결혼이 또 다른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행복할거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행복합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냉정한 현실에 처참하게 던져진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부모 없는 아이라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습니다.
가난하면 공부를 못하는게 당연한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박살내 주고 싶었습니다.
코피가 나는것도 모르고 밤을 새워 공부를 했고
일틍을 놓치지 않았으며
좋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서로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들어가기 위해 미리 장래희망 적어 놓고
미래를 설계하며 함박웃음을 짓곤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밤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고
대출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절망하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도 밤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야학을 열었습니다.
학원비가 비싸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이 늦게까지 일을 하시기 때문에 캄캄한 방에 혼자서 지내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술에 취해 현관문을 두들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너무 놀라 경기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동네 교회를 빌려 공부방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잘 따라 주고 열심히 해줘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늦은 시간에도 졸지 않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학구열을 불태우던 아이들이
벌써 자라서 대학생이 되어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왔습니다.
이젠 그 아이들이 저희들의 뒤를 이어 공부방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개발로 인해 교회가 헐려 버렸지만, 기죽지 않고 힘을 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서로 한 동네에 살아도 잠시 떨어져 있는게 그리워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력서를 수백통씩 쓰고 전단지처럼 돌려도
그 어디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아 밤새 술을 마시고
서로를 부등켜 안고 세상을 탓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이젠 그만 울기로 했습니다.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던 날
다시는 서로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 국수집’2호점을 열기로 마음 먹은건 사장님께서 적극 권하셨기 때문입니다.
국수집에서 취직이 안되어 속이 상한 마음에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국수를 찾는 손님이 갑자기 많아지는 바람에 가게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1호점 만큼의 깊은 맛을 낼 수 있을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지만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거대한 공룡상가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대기업도 맛을 탐낼만큼 대단한 ‘우리 국수집’의 전통을 잇기 위해 열심히 노력중입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기 위해 점점 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아파트 공사장
철근의 높이가 위태위태하다.
아직 첫차 시간도 되지 않은 캄캄한 새벽
뒤뚱거리는 불편한 걸음으로 하나 둘 지하철역 앞으로 줄을 서서 모여든다.
“ 새벽부터 바쁘게 어디 가세요?”
지하철 타고 성당에 돈 받으러 가!
오늘 여러 군데서 나눠 준다고 하더라고!
바쁘니까 말 그만시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구부정한 노인의 모습에 시름 깊었던 지난 밤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꾸벅꾸벅 졸면서도 내리는 정류장을 놓칠가 노심초사하며
소스라치게 놀라 깨곤 하는 모습에 고단한 삶이 묻어난다.
“ 새벽부터 다니시는거 힘들지 않으세요?”
“ 아직 캄캄한데 내려오시다가 넘어지지 않으셨어요?”
계단에서 미끄러져 살점이 떨어져 나간 무릎을 보여주며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늦게 가면 오백원도 못받으니까 서둘러야 되는데 다리가 말을 안들어!”
“ 고물상이 없어져서 페지도 못줍고 오백원이라도 받아다가 병원빟ㅐ야지 어떻게 해?”
“ 운 좋으면 밥도 얻어 먹고 간식도 주는데 안갈 수가 있나?”
“ 오늘은 꽤 여러 군데서 오백원도 주고 무료급식도 하고 그러더라고!”
“ 이렇게라도 돌아다녀서 생기는 돈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
“ 다리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 다니면서 모아야돼!”
“ 아프다고 가만히 방에 누워만 있으면 누가 밥 먹여 주나?”
“ 자녀분들은 안계세요?”
“ 자식들 있어봐야 하나도 소용없어!”
“ 다 남보다 못하게 살아!”
“ 지들 아쉬울때나 찾아 오지 안그러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
“ 자식 살아 있다고 연금도 안주는데 다리라도 절고 나가서 받아 와야지 어쩌겠어?”
사정없이 내리치는 폭우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채 오직 생계를 위해 달려가는
저들의 간절한 마음에는 여전히 겨울의 흔적이 가시질 않는다.
지하철역을 나서기가 무섭게 늘어선 긴 줄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으려 해도
좀처럼 빈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막 은행에서 오백원짜리를 환전해 온 신부님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경기가 어려워져 후원이 줄어든 탓에 동전이 든 바구니도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어제 다녀간 할머니가 다리를 절며 또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내민다.
출석도장을 찍듯이 매일 찾아 오시는 그 힘든 발걸음을 무시할 수 없어
오늘도 따뜻한 눈빛으로 맞이해 본다.
커다란 밥솥 뚜껑이 열리기가 무섭게 몰려드는 인파에 밀려 하마터면
밥솥을 바닥에 떨어뜨릴뻔 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밥알들도 주워 먹을만큼 간절한 저들의 한끼를 조금도 흘려 버릴 수 없다.
식판에 놓인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비닐봉지에 담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 왜 식사를 하다 마세요?”
“ 어디 아프신건 아니세요?”
“ 영감이 아파서 누워 있어서 그래!”
“ 쌀이 떨어져서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먹었어!”
“ 할아버지가 어디 편찮으세요?”
“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몇 년째 누워 있어!”
“ 아들녀석이 사고로 죽고 나서 쓰러지더니 못일어나더라고!”
“ 다른 자녀분은 안계세요?”
“ 다른 자식 있으면 뭐 해?”
“ 다들 저 살기 바쁘다고 쳐다도 안보는거!”
“ 지 아버지 멀쩡할때는 있는 돈 없는 돈 죄 가져다가 쓰더니...!”
“ 아버지 병원비좀 달라고 해도 들은척도 안하고 아예 연락을 끊어 버리더라고!”
“ 전화번호도 바꿔 버려서 아예 연락도 안돼!”
“ 자식 많이 낳아봐야 다 부질없는 짓이야!”
머리위에 내린 흰 서리만큼이나 깊은 한숨을 허공에 날리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굽이굽이 비탈진 골목길을 끝없이 올라가도 보이지 않던 집들 사이에
허름한 지붕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몇 번의 협상에도 타협이 되지 않아 그나마 아직은 살아 있는 유일한 달동네이다.
입구에서부터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여 있는 폐지들을 비집고
간신히 들어가자마자 낡은 침대위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김노인이 눈에 띄었다.
초첨을 잃은 시선으로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허공을 향해
두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습에 금세 알아 차리고는 기저귀를 갈아 준다.
“ 노인네 기저귀도 어떻게나 비싼지 감당하기가 힘들어!”
“먹는것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많이 싸는지 몰라!”
“ 손님 계신데 이런 실례를 해서 미안해요!”
“ 우리같은 노인들한테 이런 기저귀 사 쓰는것도 사치야!”
“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것도 힘든 세상에 이런걸 어떻게 사서 쓰겠어?”
: “ 그저 늙으면 그냥 죽어야 한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이야!”
“ 밖에 페지들이 잔뜩 쌓여 잇는데요 파시려고 모아 놓으신거예요?”
“ 고물상이 갑자기 문을 닫아 버려서 저걸 팔 데가 없어!‘
“ 그냥 버리자니 아까워서 그냥 쌓아 두는거야1”
“ 새벽마다 잠도 안자고 아픈 다리 질질 끌고 나가서 모은걸 어떻게 버려?”
“ 저거라도 팔아야 돈이 생기지 어디서 생기겠어?”
“ 고물상에서 커피 얻어 마시고 빵도 얻어 먹는 맛이 괜찮았는데
갑자기 없어져서 섭섭해!“
“ 고물상 사장이 참 착했어! 동네 노인들한테 자식같은 사람이었지!”람
“ 젊은 사람같지 않게 참 바르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참 운이 안좋은 사람이야!”
“ 저 밑에 국수집 가보고 깜짝 놀랐어! ”
“ 고물상 사장이 언제 국수 만드는걸 배웠나 몰라!”
“ 먹어 보니까 먼저 사장보다 더 잘 만들더라고!”
“ 먼저 국수집 사장부부도 참 성실하고 동네 사람들한테 잘 했어!”
“ 돈없어도 공짜로 국수 말아 주고 술도 주고 그랬었지!”
“ 골짜로 얻어 먹기가 미안할 정도로 인심을 후하게 써서 그런지 금방 자리 잡더라고!”
12월 15일 한진서 우리 국수 3500원
외상장부에 날짜와 이름을 적고 국수로 허기를 달랩니다.
오늘 또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력서를 쓸 여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느새 저도 m게 이력서를 쓰는데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꾹국 눌러 써서 간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응모를 해도
그 어디에서도 저를 위한 일자리는 마련해 주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울려대는 집주인 아줌마의 독촉전화에 미쳐 버릴 것 같습니다.
보일러가 제 기능을 하는지 잊어버린지도 이미 오래전입니다.
가스가 끊겨 버려 물조차도 끓여 먹을 수가 없습니다.
주머니에 차비조차 남아 있지 않아 몇 정거장을 걸어다녀야 했습니다.
외상으로 먹기가 미안해 국수집 앞에서 한참동안 서성이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 안으로 들어서면 사장님은 정다운 삼촌처럼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국수를 먹는 내내 눈물이 쉬지않고 흘러 내렸습니다.
국수를 먹을때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버지의 정이 느껴집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적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없습니다.
함께 찍은 가족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빠 손을 꼭 잡고 거리를 나서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마는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죽이고 싶을만큼 원망스럽고 미웠습니다.
아무런 에고도 없이 엄마가 저 세상으로 떠나던 그 날,
유산처럼 남겨진 일기장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아빠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는 딸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차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이었다고 말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가난을 핑계로 선택한 대리모의 길이 거지같은 인생의 서막을 알릴줄은 몰랐습니다.
계약서에는 적혀 있지 않았던 아들을 낳지 않으면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다는
엉터리 규칙 하나 덕분에 아이를 낳자마자 불행은 폭풍처럼 몰려와 모든걸 망쳐 버렸습니다.
꼬박 하루동안의 진통을 견디고 태어난 아이는 단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푸대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아들이 귀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을 듬뿍 받아도 모자란 어린 시절을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개 핏덩이를 무참하게 버리고 금세 아들을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그 엄마도 분에 넘치는 댓가를 보상받았습니다.
당당하게 자기 이름 밑에 이름을 올려 주고 금수저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귀하게 태어난 아들과 그 아버지가 바로 앞 재개발 아파트 모델 하우스 오픈식에서
당당하게 테이프를 끊으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딸은 아직 그 욕심쟁이 갑질 회장이 친아버지인줄 모르고 있습니다.
가르쳐 주기 싫었습니다.
아니, 절대 가르쳐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듯이 살지 않으면
위협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보다
훌륭하지 못한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재개발에 저항하기 위해 담벼락마다 붉은 글씨로 도배를 하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을 하는 딸에게
차마 ‘네가 싸우고 있는 골리앗같은 회사가 바로 네 아버지 회사가 네 아버지 회사다’
라고 털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무자비하게 각목을 휘두르는 용역들과 몸싸움을 심하게 하다가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눈앞에 닥친 빈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죄 없이 태어난 딸의 가슴에 멍애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의미를 상실해 버린지 오래전입니다.
저라는 존재 자체가 딸에게는 짐이 되고
울분을 쌓게 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밤마다 몰래 눈물을 흘리며 적어 내려간 글들이 어느새 노트 한 권을 다 채워버렸습니다.
너에게 아빠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못한걸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차마 네가 그렇게 증오하는 저 괴물회사 주인이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었어
매일 아침마다 띠를 두르고 재개발을 막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볼때마다
느껴지는 죄책감에 하루가 힘들었단다!
거리에서 아빠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들을 볼때마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딸에게 한 번도 아빠의 정을 느끼지 못하게 해서 미안해!
징그러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큰 모험을 하고
널 낳을거였다면
조금 더 냉정하고
계산적이어야 했다는걸 이제 와서야 깨닫고 후회하고 있어
그래도 내가 널 낳았는데
어쨌든 너를 낳은 엄마인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해 정말 미안하고 죄스럽구나!
완전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큰 가난속에
널 내버려두고 떠나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완전히 져버리지는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
가난과 절망이 비레한다는 말도 안되는 엉터리 공식은 없어!
어저면 희망과 행복은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것인지도 모르는거야!
티없이 곱게 자라 줘서 너무 고맙다!
제대로 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하게 해서 정말 죄스럽고 미안하구나!
그래도 엄마의 딸로 태어나 줘서 고맙고 행복했어!
사랑한다! 내 딸아!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
그래도 이유야 무엇이든 너의 아버지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