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자연인이다
이젠 실실 농사를 시작하려나 보다. 주섬주섬 자루를 챙기는 모양새가 영감이 발동을 거는 모양이다. 말하다 죽은 귀신에 잡혀 말을 아끼는 영감은 오늘도 말 한 마디 없이 자루를 채운다. 나도 눈치껏 며칠 분의 먹거리를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늘 그랬듯이 내가 입을 뗀다.
“시장에 고춧모 나온 지가 오래 됐는데. 우린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씨로 모종을 기르는 사람들은 일찍 서둘러야 하지만 우린 모종을 사다 꽂으니까….”
따는 그렇겠다. 좀 더 일찍 알려줬음 내가 안달을 부리지 않았을 것을.
작년에 추수를 하면서,
“다시는 농사 안 지을 테야. 내가 김치를 얼마나 먹는다고 이 고생을 하냐구!”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면서 힘든 투정을 영감에게 쏟아 붓곤 했다.
그런데 다시 농사철이 오니 마음이 동(動)한다. 아무 기척이 없이 당신의 정원만(손바닥만한 마당이지만 그럴사하다)가꾸는가 싶더니, 이제야 부스스 기지개를 켠다는 말씀이야. 겨우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시골 집이 궁금하다.
읍내 종묘상에서 고춧모 50포기, 가지 5모, 오이모 10개, 토마토 10나무, 참외도 10개를 골라 담았다. 하하하 꿀밤고구마 50모. 대농을 하는 이들이 보고 웃겠다마는 나는 오지랖도 넓게 여러 가지를 골라 담았다. 무슨 소꿉장난하는 것 같다.
꼬박 3달을 비워놓았던 집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용하다. 영감은 안방과 거실에 비질을 하고 나는 주방으로 향한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것만 같아 자연스럽게 분담이 된다.
점심을 지어먹고 밭으로 내려선다. 우와~! 사촌 시동생이 밭을 갈아놓았다더니 일이 한결 수월하겠다. 고마운지고. 담배라도 한 보루 사다 줘야겠다. 흙덩어리를 쇠스랑으로 부스고, 땅을 고루고, 고랑을 만들고, 마주서서 비닐을 덮고, 영감은 바람에 날리지 않게 흙을 끼어 얹는다.
비닐을 찢고 고추 모를 세우고 북을 돋우고, 가지도 오이도 토마토도 참외도 고구마도 줄을 세워 꽂는다. 밭이 제법 폼이 난다. 그런데 땅이 많이 남는다. 고춧모와 고구마를 더 사다 심어야겠다. 벌써 토마토 풋내가 솔솔 참외 단내가 솔솔 오이의 싱그러운 냄새도 실려온다.
으하하. 나는 벌써 부자가 된 것 같다. 이걸 언제 다 먹나. 보림이도 실컷 먹이고 보림이 친구네도 공수를 해 줘야지. 날 늘 챙겨주시는 신권사님 네도 고구마 한 자루 보내드려야지. 김권사네도 오이랑 가지를 좀 나눠주자. 푸하하 이만하면 만석이가 인심 좋다 소문나겠네.
나를 서울 집으로 태워다주고 영감은 고구마에 물을 주어야 한다며 다시 시골로 돌아간다. 다시 이산가족이 됐다. 오랜만의 자유도 거 괜찮구먼. 냉장고에 반찬을 채워놨으니 걱정도 없고. 그동안의 전적으로 보아 영감은 당신 끼니쯤은 해결해 낼 것 같다.
그런데 영감을 보내고 나니 걱정스럽긴 하다. ‘이것저것 잔소리를 해주고 올 것을.’ 아니지. 이젠 영감도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해’. 만감이 교차한다. 보리차를 끓여놓고 올 것을 그만 깜빡했다. 영감이 도착할 시간에 전화를 좀 걸어야겠다.
“따르릉 띵똥. 나 도착했어.”
“밥 땜에 신경 쓰이네요. 잘 해 자실 수 있겠수?”
“걱정 마라. 배고프면 쌀이라도 씹어먹겠지.” 이건 걱정을 말라는 건지 걱정을 하라는 건지.
“따로 할 말 더 없어요?” 내 장난끼가 발동을 한다.
“몰라. 난 그런 거 몰라.”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나는 늘 전화를 하면 요구하는 멘트가 있었으니까. 그게 그리 힘드나?
보림아~!
이만하면 할미 글이 재밌냐? 할미 친구 희순이 할매가, 요새 할미 글이 많이 처져 있다고 어디 아프냐고 하던디? 시골을 자주 가야 쓰겄다. 할미가 심은 것들이 잘 자라나 봐야재. 요새 일감도 없는디 시골 다니는 거 재밌을 것 같어라~^^
루레이동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