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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시가 슬픈이유


BY 길목 2016-12-19

김현승님의 ‘플라타너스’가 슬픈이유는 우리엄마가 나무에게 하는말 같기 때문이다.

친정 엄마가 돌아가신지 이제 6년이 되었고 이번 토요일이 엄마의 제삿날이다.

세월이 갈수록 엄마는 그저 아득한 추억처럼 잊어가지만

집앞 공원의 플라타너스를 보면 친정엄마 생각이 난다.

 

죽은듯 하던 고목에서 봄에 새잎이 돋아나오면 시의 구절처럼 엄마가 영혼이라도 불어 넣은듯  반갑고,

더운 여름날 그 큰잎 그늘에 앉아 쉬면서도,

손바닥 같은 큰잎이 뚝뚝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가을에도 엄마생각이 난다.

속이 다 썩어 껍질 뿐인 앙상한 겨울나무를 보면 내 엄마, 그리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모든 부모 같아 슬프다.

 

6년전 친정엄마와 마지막이 될줄 모른채 목욕탕 가던 그길의 플라타너스는 엄마의

기억보다 더 선명하다.

대구에서 부산으로 시집가 시어른 모시고 직장 생활하는 딸이라 엄마는 부담 줄까봐

명절에도 바쁘면 오지마라, 먼길 오기 힘든데 쉬어라 했었다.

그런데 전과 달리 요즘도 많이 바쁘냐는 말에 한번 왔으면 하는 듯함이 들어있는 전화를

받았다.

대구와 부산 2시간 거리지만 집안행사가 아닌 날에 엄마를 보러 간 건 처음이었다.

엄마는 기력이 없고, 얼굴이 수척해져 있었지만 한사코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내 몸은 내가 안다. 병원 놈들은 이것저것 검사 하라카고 고생시킨다.

검사해서 병이 있은들 이 나이에 수술할꺼가 우짤꺼고.

이만큼 살았으면 당장 죽어도 괘안타라고 했다.

 

엄마는 내게 목욕탕에 함께 가기를 원했고, 결혼 후 25년만에 엄마와 목욕을 가게 되었다.

그때 81세가 된 엄마는 세월이 무거운 듯 천천히 걸었다.

목욕탕 가는길은 대구 무열대앞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는 대로변을 따라 간다.

엄마는 멈추어 서서 플라타너스 나무를 짚고 쉬면서 숨을 몰아쉬었고, 이렇게 천천히 걷기도 힘들어 하는 엄마가 처음으로 안쓰러웠다.

나는 50이 넘은 딸이지만 어릴 적 말투 그대로 엄마 힘드나? 하고 물었다.

엄마는 “힘들기는, 바쁜 것도 없는데 뭐 하러 빨리 갈라고 천천히 가면 되지”라고 했다.

엄마는 힘들 때도 아플 때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이 들면 조금씩은 다 아프지 그걸 남한테 일일이 말해 뭐 할라고 했다.

 

천천히 걸어가다 건널목을 건널 때 신호가 바뀔까봐 엄마의 팔을 잡고 건넜다.

대로변을 벗어나 좌측으로 꺾어가는 길은 약간 오르막이라 계속 엄마의 팔을 잡고 걸었다.

엄마와 팔을 끼고 걸어 본건 평생 처음이지 싶다.

어쩌면 오랫동안 엄마와 이렇게 다정하게 팔을 잡고 걸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는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43세에 남편을 잃고 5남매를 키우느라 엄하고 강한 엄마로 살아왔다.

고생하는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었고, 떼쓰는 일도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효도가 아니고 엄마를 더 외롭게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언덕길을 걷다가 엄마가 허리를 굽혀 플라타너스 큰 나뭇잎을 주웠다.

허리를 굽히기가 힘 드는지 저만치 보이는 큰 나뭇잎을 내게도 주우라고 했다.

이 나뭇잎을 봐라. 크고 넓찍하니 얼마나 보기가 좋노.

나는 이런 큰 잎을 보면 아까워서 자꾸 줍는다. 라고 했다.

이런게 뭐가 아깝노 하며 나도 그 잎을 주웠다.

나뭇잎은 손바닥처럼 생겼고 아주 컸다.

엄마는 돌 뚝에 잎을 깔고 앉아 옆에도 깔아주며 내게 앉으라고 했다.

“길가다 쉴 때 이 나뭇잎이 젤루 좋다. 이 나뭇잎을 깔면 그냥 앉는 거 보다 안 추접고 얼마나 좋냐” 라고 했다.

“여름에 이 나무 그늘 덕에 쉬기도 좋더만” 하며 나무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이 나무 좀 봐라 흡사 군복무늬 같이 생겼는기 얼매나 신기 하노” 라고 했다.

정말 나무껍질은 군복처럼 얼룩무늬였다.

 

엄마는 언제부턴가 걷기 힘들어졌고, 나뭇잎을 깔고 나무그늘에서 쉬다가 이 플라타너스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엄마가 내 옷 세탁 맡기는 집이 저 집이다 하며 세탁소를 가리켰다.

맡겨둔 옷을 대신 찾아야 할 일이 생길 것을 예감한 것일까.

엄마는 항상 세탁소 맡겨야 하는 정장 자켓과 바지나 치마를 입었다.

성당, 계모임, 복지관에 갈 때 늘 깔끔하고 폼 나게 차려 입었고, 80노인이 항상 굽이 조금있는 낮은 구두를 신었다.

너그들 키울 때는 돈 쓸데가 많아 내 옷은 10년도 입고 20년도 입었디라.

그때는 자식이 잘되야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행색은 상관없었지.

지금은 안그렇다. 나이 들수록 옷을 잘 차려입고 말끔하게 해서 다녀야 자식 낯나고

내 초라하지 않은기라. 했다.

 

가다가 골목 안에 칼국수 집 간판이 보였다.

“복지관 갔다 올때 저 집에서 칼국수나 호박죽을 사먹고 집에 들어가는 날이 많다.

며느리도 덜 귀찮고 서로 편한게 좋지”라고 했다.

며느리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시집살이 시킨다는 말 듣고 싶지 않은 엄마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 길 막다른 곳에 목욕탕이 있었다. 집에서 10분이면 갈수 있는 길을 40분도 더 걸려 도착했다.

 

목욕탕에서 엄마는 힘도 없으면서 굳이 내 등을 밀어 주겠다고 했다.

피부가 우예이리 맨들 하노, 주름살 하나 없이 곱다 를 반복하면서 오랫동안 등을 문질렀고 팔을 만졌다.

엄마는 이제 젊음이 부러운 것일까. 막내딸의 감촉이 그리웠던 것일까.

목욕을 끝내고 엄마와 나는 다시 천천히 쉬어가며 돌아왔다.

엄마는 이런 소소한 일상을 나눌 사람을 얼마나 원했을까.

오남매를 키웠으나 장남 외에 모두 다른 지방에 떠나 사니 홀로 플라타너스 길을 걸으며

외로움을 달랬을까.

 

부산으로 돌아온 후 며칠 뒤 엄마가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는 몸의 여러 곳에 암세포가 번져 손을 쓸 수 없었고 그것을 이미 알고 그렇게

병원가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후 엄마의 맑은 정신은 견딜 수 없는 통증과 독한 진통제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는 엄마의 소원대로 수술하지 않았고,

치매라도 와서 요양병원서 산송장처럼 살까봐 걱정이다 라고 평소에 하던 걱정을 지켜

요양병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우리는 청개구리 자식처럼 엄마 말을 들었던 것이다.

맏딸인 언니가 대구로 올라가 24시간 엄마곁을 지켰고,

자식들 모두 지극정성으로 간병했지만

엄마는 3개월 후 돌아가셨다.

                                          '플라타너스' 시가 슬픈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