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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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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꿈, 남자의꿈


BY 문해빈 2012-11-13

방금 지영이 무슨 말을 했다.

 

 

 

그런데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지? 뭐라고 했지? 인혁은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계속 잔디만 뜯고 있을 뿐이다.

 

 

 

 

얼굴빛이 자꾸 흐려져 일단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식당에서 나왔지만 지영이 한 일은 화장실로 달려가는 일이었으며 물만 마셨다. 매점에 들어가서 물을 사 와 지영을 먹이면서도 걱정이 되어 약국에 가서 약을 사올까도 물었지만 갑자기 신경 쓸 일이 있어서 속이 민감성을 일으켰다며 이젠 괜찮다는 말과 함께 벤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지영은 벤치에 앉는 것이 아니라 잔디를 손으로 만지며 조심스럽게 앉았으며 인혁을 보고서도 여기로 오라고 했다.

의자가 아니면 불편했지만 지영이 오라고 하니까 그래야만 할 거 같았다. 양 다리를 쭉 뻗은 채 매점에서 사 온 우유와 빵을 건네자 지영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점심 먹지 않았다면서. 배고프지 않아?”

“지금은 먹어지지가 않을 거 같아.”

“괜찮다면서?”

 

“그건 맞는데 조금 있다가 먹을 거니까 인혁 씨부터 먹었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점심 먹지 못했잖아. 그러니까 그건 인혁 씨가 먹어.”

 

 

 

 

“인혁 씨!”

 

 

 

 

 

늘 친구처럼 이름을 부르며 지냈는데 갑자기 호칭이 하나 더 들어가니까 인혁도 기분이 이상했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면 꼭 싫은 것은 아니었다. 더욱 감미롭게 들렸으며 좀 더 세심한 여자로 보였다.

 

 

 

 

“이젠 인혁 씨라고 부르고 싶어.”

“듣기에 좋네. 인혁아라고 부르더니 인혁 씨라······. 괜찮네. 좋아. 그럼 나도 널 지영 씨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지영 씨라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부르던 인혁은 금세 표정이 변해갔다.

 

 

 

 

“왜?”

 

지영은 아이처럼 굳은 표정으로 변해가는 인혁을 빤히 쳐다보면서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안 되겠다. 이상해. 온 몸에서 소름이 끼쳐오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안 되겠어. 나는 그냥 지영아, 이지영! 그렇게 부를래. 그게 가장 좋은 거 같으니까.”

“······.”

지영은 말이 없었다. 그저 눈으로만 인혁을 바라 볼 뿐이다. 이 남자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면 되는 것일까. 지금 윤인혁이란 남자는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야생마처럼 보였다. 온 세상이, 세계가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듯 자신감이 넘쳐흘러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남자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차라리 말을 하지 말까. 그냥 혼자 해결 할까. 지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지만 가까스로 감정을 조절해 나갔다.

 

 

 

 

“싫어? 꼭 지영 씨라고 불러 달라면 그렇게 할게.”

“아니. 그냥 네가 원하는 감정대로 불러.”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무슨 일 있어? 평소에 너 답지 않아 보여.”

“그렇게 보여. 오후 수업은 언제야?”

“응. 2시부터 5시까지 연강이다. 그러니까 한 시간정도 시간은 있어.”

 

 

 

지영은 망설였다. 지금 얘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남자의 수업이 다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얘기를 할 것인가. 지금 지영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수업 다 끝나면 다른 일 없지?”

 

 

아무래도 모든 수업이 마치고 나면 얘기를 해야만 할 거 같았다. 지금 얘기를 하면 이 남자는 잔잔한 눈웃음을 지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 남자의 매력은 눈웃음이다. 가끔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대학에 들어 온 이후로는 계속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 과외가 있긴 하지만 중간고사 기간이라 일요일에 모아서 공부를 할 거니까······지금으로선 별다른 일은 없는데 무슨 일 있어?”

 

 

 

 

아무리 봐도 평소의 지영의 모습이 아니었다. 단아한 옷차림까지는 마음에 들었지만 성격까지 너무 차분한 것은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이 조용하기 때문에 그 반대적인 성격을 가진 지영이 좋았다. 웃고 싶으면 마음껏 웃고,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고, 애교를 부리고 싶으면 그 감정에 충실한 것도 좋았다.

그런 여자가, 오늘은 달라 보였으며 전혀 이지영 같지가 않았다. 잘 웃지도 않았고, 계속 조용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그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으려면 힘들 텐데.”

“여기서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있을 게. 또 지나가는 연인들도 쳐다보고.”

“그래도 힘들 텐데.”

“기다리다가 힘들면 군것질을······.”

 

 

 

군것질이란 말에 지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이것, 저것 생각이 머릿속에서 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한 시간은 남아 있다고 했지?”

인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이젠 배가 고파졌어? 먹기 싫다면서.”

“응. 갑자기 식욕이 당겨오네. 치킨도 먹고 싶고, 칼국수도 먹고 싶고, 매운 냉면도 먹고 싶고······.”

 

 

“그걸 다 먹겠다는 것은 아니지?”

“다 먹으면 안 돼?”

“······!”

“다 먹을 수 있는데. 그까짓 양이 얼마나 된다고······. 사 주기 싫어 그러는 거지?”

“아니다. 가자. 먹고 싶을 때 먹어야지.”

 

 

 

 

인혁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 지영의 손을 잡고서는 가까운 분식가게로 향했다. 학교를 나오면서 가장 먼저 발목을 잡은 곳은 분식 가게였다. 구수한 육수 냄새를 코끝으로 맡는가 싶더니 얼른 안으로 들어서서는 칼국수를 시작으로 해서 튀김과 떡볶이를 왕창 시켰다. 적어도 4명이 먹기에도 충분한 양이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더욱 놀란 일이 벌어졌다.

 

 

 

주인 여자가 테이블에 놓자마자 지영은 이내 이것저것 먹기 시작했으며 단숨에 반 이상을 먹어 치운 것이다. 먹었다는 말 보다는 먹어서 치웠다는 말이 지금은 더 어울렸는지 모른다. 그만큼 지영의 속도는 빨랐으며 정신없이 먹는 것도 모자라 앞에 있는 사람의 심장을 놀라게 만들었으니까.

 

 

 

“넌 안 먹어?”

“괜찮아?”

 

 

 

 

인혁은 이 순간 지영의 속이 걱정될 뿐이었다. 신경 쓸 일이 있어서 갑자기 민감성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혁은 지영이 말하기 전까지는 묻지 않았다.

 

 

 

 

그녀만의 감정이니까. 그녀만의 일이니까.

 

 

 

하지만 지영의 성격상 오래가지 않는 것도 알기에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속에 오래도록 담아두지 못한 지영은 모든 것을 다 얘기할 거니까. 그래서 인혁은 늘 지영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은 진짜 지영이 이상해 보였다. 인혁은 점점 걱정이 되어 지영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괜찮아. 이 분식 집, 진짜 맛있다. 다음에도 여기 와서 먹어야지.”

포만감을 느낀 지영이 손으로 배를 쓰윽 만지자 인혁은 입가에 묻어있는 떡볶이 소스를 닦아주었다.

 

 

 

 

“어지간히 맛있었나 보네. 애인한테는 한 번 먹어보란 소리도 하지 않고 혼자 먹다니.”

“혼자 아니야.”

지영은 인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먼저 말을 해 버렸다. 이젠 더 이상 속을 끓이기도 싫었으며 뜸을 들이는 것도 싫었다. 혼자 애 태운 시간들, 혼자 힘들었던 시간들. 이젠 이 남자와 나누어야만 할 것 같았기에 말문을 열어 버린 것이다.

배가 고플 때는 용기도 생기지 않았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막상 배가 부르니까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혼자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인혁은 지영이 마지막에 한 말이 궁금했다.

 

 

 

 

“그래. 혼······자 아니야.”

 

 

 

 

 

지영은 칼국수 옆에 있는 물을 마시고선 두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인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임······신했어.”

“······!”

 

 

 

 

인혁은 지영이 남겨 둔 떡볶이를 먹다가 접시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뭐라고 했지? 방금 이 여자의 입에서 뭐라고 한 거지? 무슨 말을 한 것은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며 멍해져만 갔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혹시······듣지 못했어?”

“아니. 들었어. 잠시만 그냥 있자.”

임신! 임신이라고 했다. 하얗게 변해가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가 되어 지면서 지영이 한 말을 기억했다.

 

 

 

 

 

임신이라고 했다. 임신! 임신이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날 밤,

 

 

 

 

늦게까지 놀았지만 완전한 외박을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집에는 도윤의 집에서 파티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또 밤을 새울 수도 있다는 말을 했지만 지영의 부모님은 썩 내키지 않아 했기에 1시가 되어서야 그 집에서 나왔다.

 

 

 

 

다른 친구들은 여전히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속에 있는 모든 열정들을 뿜어낸다고 두 사람이 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도윤의 집에서 밤을 완전히 새울 작정이었는지 여전히 도우미 아줌마들의 손길은 바쁘게만 흘러가는 게 보였다. 조금 전에 새우튀김을 해서 먹었는데 금세 큰 솥에 라면을 끓이고 있는 것을 본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을 지은 채 도윤에게만 간다는 인사를 하고선 그 집을 나왔다.

 

 

 

 

그 후에······

그들은, 인혁과 지영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다른 곳으로 갔다.

 

 

 

 

 

 

젊음의 열정, 본능의 숨소리를 그들은 거부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술의 열기인지, 둘만 있다는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 시간, 함께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거리는 아기 예수를 위하기보다는 연인들을 위한 거리가 되어 있었다. 각종 트리들과 아기자기하게 모양을 갖춘 종들이 반짝거리며 빛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연인들은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여겼다.

지영과 인혁은 집이 아닌 시내를 배회했으며 양 손은 꼭 잡았다. 그들도 연인이었으니까.

 

 

 

 

이 손, 오랜 시간 후에 잡아 보는 손이었기에 그들은 놓지 않았다. 따뜻한 손이었고, 포근한 손이었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손을 놓지 않았으며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불꽃이 되어갔다.

말이 없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깊게, 더 깊게 바라 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가 되어버렸으니까.

 

 

 

 

 

잠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던 인혁은 깊은 한숨을 들이마시고선 지영을 쳐다보다가 이내 테이블로 눈을 향했다. 혼자 열심히 먹던 음식들이다. 떡볶이를 비롯해서 곱빼기 수준인 칼국수도 국물만 남아있었고, 또한 김밥도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튀김이었다. 많이 먹을 수 있다며 튀김까지 시켰지만 튀김까지 다 먹기는 버거웠던 모양이다. 같이 먹자고 해 놓고선 허겁지겁 거리며 먹던 조금 전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너무나 잘 먹는 지영을 보면서 인혁은 이젠 속이 풀려간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것들을 다 먹고 나면 곧 수다가 시작되리라 생각했다. 지영은 속에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착한 여자였으니까. 늘 감정에 충실하고 거짓말도 하지 못하는 여자였으니까.

 

 

 

 

 

 

재잘거리며 심각했던 얘기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리라 기대했다. 물론 듣고 보면 그다지 심각한 것도 아니었으며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언니는 옷 욕심이 너무 많다, 동생은 몸이 너무 약하다, 잘 먹지 않아서 걱정이다 등으로 시작하면서 가족들의 얘기로 이어져 나갔다. 그래서인지 이젠 지영의 가족관계는 완벽 할 정도로 입력시켜 버렸다.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가족인지까지 다 알게 된 것이다.

지영의 가족은 따뜻하면서 포근한 집을 연상시키는 중산층이었으며 생활의 풍부함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 표정은 대체적으로 밝아 보였다.

경제적으로 적당히 안락하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다는 것을 두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중에는 도윤이 있었고, 또 한 사람인 지영이 있었다. 지영은 도윤만큼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느긋했고, 모든 생활에 있어 여유가 있는 여자였다.

 

 

 

 

그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생활 속의 수다가 아니었다.

 

 

 

마른하늘에 청천벽력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표현한다면 너무 비겁한 남자가 되는 것인가.

 

 

 

 

 

 

그 소리는 여름 날, 장마로 인해 정신없이 쏟아지는 폭우 같은 소리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막대한 힘을 가진 태풍이었다. 태풍은 예고도 없이 왔다가 한꺼번에 다 휩쓸고 가니까.

지금 인혁이 그러했다. 지영의 임신이란 말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말로만 듣던 얘기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생길 줄 알았던 얘기들은 현실화 되어 한 남자의 앞을 가로막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무슨 말을 이 여자에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인혁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날짜 계산을 해 보았다. 여자들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 날부터 계산을 하면 지금은 제법 달수가 되어 있었다. 몇 달이 된 것일까. 몇 달? 인혁은 하나, 둘, 셋까지 헤아렸다. 그리고 천천히 넷이라는 숫자도······.

 

 

 

넷? 손가락은 어느 새 거기까지 접혀져 있었으니까. 인혁은 조용히 오물거리는 듯한 표정을 보이면서 지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얼굴이 많이 까칠해 있었다. 대학 들어와서 서로가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집이 가까운지라 저녁 시간 잠시 보면서 연인의 친밀도는 계속 유지시켜 나갔다. 밤에 봐서 그런 것일까. 늘 예쁘고 청초했다. 잘 웃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살짝 안기며 애교스러움도 보여주었기에 그 모습 그대로라 여겼다.

 

 

 

 

그런데 낮 시간, 봄 햇살이 지영의 머릿결을 한층 더 갈색 빛을 띄게 했으며 얼굴빛까지 갈색으로 보이게 했다. 하얀 색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제야 자세히 보였다. 조금 전, 카레라이스도 잘 먹지 못했고, 냄새에 민감해서 코를 막는 것도 기억났다.

 

 

 

 

 

식당에서 나와 화장실로 가서 속에 있는 것을 모두 다 밖으로 토해냈다. 그것은 결국 입덧이었던 것이다. 입덧! 입덧이란 단어까지 생각하지 인혁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으며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속으로 들여 마셔야 했지만 감정은 점점 겉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상황은 아니었기에 조심스럽게 지영의 얼굴을 가만히 볼 뿐이었다.

“내가 너의 발목을 잡는 거지?”

“······!”

 

 

 

 

 

지영은 보았다. 인혁의 눈빛이 따뜻하지 않다는 것을. 버거워 한다는 것을. 불편해 한다는 것을.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을······.

 

 

 

 

 

“미안해. 정말 미안해.”

“······.”

 

 

 

 

이 남자,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남자들은 이런 존재들인가. 사랑할 때는 함께 나누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면 냉정해 지는 모양이었다. 윤인혁! 이 남자는 다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도 예외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임신이란 얘기를 들은 후부터는 한 번도 웃지도 않았으며 배 부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영은 표정 없이 눈동자를 멈추고 있는 인혁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

“3개월에서 4개월 초 정도 된 거네.”

“······!”

“그동안 혼자 많이 힘들었겠다.”

 

 

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급기야는 눈에 눈물이 고여 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 혼자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 마지막엔 병원까지······.”

“입 다물어.”

 

 

 

 

처음으로 인혁의 목소리가 커졌으며 지영의 얼굴을 돌려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었다. 누가 보면 입맞춤을 하기 위한 동작으로 보였기에 주위에 있는 학생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지만 인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따위 사소한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지영의 입에서 나온 무서운 말 뿐이었으니까.

 

 

 

 

감히 병원이라니, 병원이라니······.

 

 

 

 

“아직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잖아. 그래서 멀리 내다본다면······.”

“내가 말했지. 입 다물라고. 지금 네가 하는 얘기들, 아기가 다 듣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아······기?”

 

 

 

아기란 말에 지영의 눈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아기란 말을 한 인혁도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하자 앞에 놓인 물을 벌컥거리며 마셔 갈 뿐이었다. 목에서는 계속 갈증만 일어나고 있었기에 주인 여자에게 주전자에 담겨 진 물을 갖다 달라고 해서는 주전자를 들고 마셔갔다.

“그 아기! 우리가 책임져야지.”

“······.”

 

 

 

 

책임이란 말도 했지만 인혁도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 순간, 아버지를 시작으로 해서 어머니와 온 가족들의 얼굴이 생각나기 시작했으며 지영의 가족들도 생각나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더욱 문제였으니까.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만 하는 것인지 인혁도 알지 못했으며 인혁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는 지영은 말이 없었다.

“울지 마. 자꾸 울면 아기가 싫어 할 거다.”

 

 

 

 

 

 

지영은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또 먹고 싶은 것은 없어?”

“있어.”

“뭐가 먹고 싶은데?”

“음······ 순대하고 족발이 먹고 싶어.”

인혁은 잠시 지영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만 웃어 버렸다.

 

 

 

 

“인혁 씨 그 웃음, 변하지 마. 그 웃음이 제일 따뜻하게 보이고, 편안하게 느껴지거든.”

“항상 이렇게 웃지 않았어?”

“가끔 그 웃음과 상반되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잖아. 그때는 무서워.”

 

 

 

 

 

이 남자는 한 얼굴에서 두 가지 표정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웃을 때면 선하고 자상한 남자의 얼굴이지만 공부에 파묻히고, 자신만의 생각에 들어가 있으면 옆모습이 차가워 보였기에 애인이라고 하지만 함부로 장난도, 말을 걸 수 없어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조금 전,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빛이 그러했다.

 

 

 

 

그 표정이 계속 유지된다면 나쁜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남자, 그 남자와의 사랑도 끝날 것이니까. 영화나 소설 속에서도 그러하지만 결국 이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 채 끝난 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만 흘러갔는지 모른다.

“알았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지금은 먹으러 가자.”

“수업 있다면서.”

“수업?”

 

 

 

 

수업이란 말에 인혁은 잠시 망설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업은 빠지면 안 되는 것으로 알았다. 중학교, 고등학교도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며 개근을 했다. 물론 대학을 들어와서도 그 생활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수업에 빠져야만 할 거 같았다.

 

 

 

 

 

재래시장 안에 있는 족발 가게로 들어갔다. 순대부터 먹을 생각이었지만 족발 가게를 보자 지영은 본능에 충실한 어린 아이처럼 가게 안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으며 이내 원하는 것을 시켜 나갔다.

 

“왜 빨리 안 나오지? 배고픈데.”

 

배가 고프다는 말에 인혁은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이 여자, 어쩌면 많이도 참은 모양이었다. 그중에서도 먹고 싶은 것을 가장 많이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족발이 나오자 지영은 양 손을 들고서는 족발의 살 부분을 뜯어 나갔다.

“천천히 먹어. 시래기 국도 먹어가면서 먹어.”

인혁이 시래기 국을 먹으라는 시늉을 보이자 지영은 알았다며 그릇을 들고서는 그대로 마셔갔다.

 

 

 

 

“맛있어?”

“응.”

 

 

지영은 잠시 먹고 있던 족발을 내려놓은 채 다른 족발을 들어 인혁에게 내밀었다.

“먹어 봐. 맛있어.”

지영도 이제야 이성이 조금은 돌아왔는지 인혁을 향해 씨익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안하긴 미안했으니까. 조금 전, 분식가게에서부터 계속 혼자서만 열심히 먹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여기까지 와서도 혼자서만 먹는 것에 빠져 있었다.

 

 

 

“이제 내가 보이긴 보이는 모양이네.”

지영은 미안한 표정과 함께 생글생글 거릴 뿐이다.

“이제야 이지영 얼굴이네. 너도 그렇게 웃어.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그때에 얘기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혼자 오래 고민하는 것은 이것으로 끝내자.”

 

 

 

 

지영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잠시 멈춘 족발을 다시 뜯어 나갔다.

그러나 인혁은 그런 모습들이 안쓰럽게 느껴지면서도 생소할 뿐이다. 전혀 다른 지영의 모습이었기에 쉽게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뭔지 모르지만 여전히 가슴이 답답해 왔기에 긴 한숨이 나오려 하는 것을 얼른 안으로 삼키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지영이 이 소리를 들으면 안 되니까.

 

 

 

 

 

***

모두들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지영과 인혁만이 죄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더 고개를 많이 숙이고 있는 사람은 지영이었다. 그 모습을 지영의 어머니인 김 여사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 볼 뿐이다.

자식을 가진 게 죄인가. 그것도 딸 가진 게 죄인이라면 죄인이었다. 함께 일을 만들었지만 그 결과는 여자에게 더 많은 희생이 보였기에 김 여사는 지영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처음 인혁이 집으로 찾아 왔을 때만 해도 이런 일로 왔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대학에 들어가서도 변함없이 사귀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미래의 사위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지는 날에 둘은 부부란 인연으로 가리라 여겼다. 그런데 너무 빨리 와 버렸기에 김 여사는 마음이 아팠다.

여자도 더 많이 배우고, 자신의 일을 가지길 원했다. 이젠 그런 세상이 되었으니까. 자신처럼 오직 남편을 봉양하고, 시댁 가족들을 챙기면서 희생하는 세상은 아니었기에 지영도, 그 위로 미영도, 막내인 세영은 하나같이 자신의 일을 가지고 당당한 여자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세상일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장 아버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지영이 임신을 해 버린 것이다.

이미 달수도 많이 차 있었기에 결혼이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과연 결혼만이 능사일까.

 

 

 

 

능사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방법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인혁의 어머니가 결혼을 시키자고 먼저 제안을 해 왔다. 다행히 시어머니 될 사람이 합리적으로 보였으며 인혁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게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혁이 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었다. 생김새도, 말하는 모습까지······.

 

 

 

 

 

오늘은 두 번째 만남이다.

일주일 전에는 많이 당황하고 놀란 가슴을 잠재우는 게 전부였다면 지금은 그때보다는 걱정도, 불안한 마음도 덜했다.

이 자리는 상견례를 위한 자리였으니까.

인혁의 가족은 인혁을 비롯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위로 누나가 나왔으며 지영의 가족은 김 여사와 지영의 아버지만이 나왔다. 지영의 아버지는 조용히 인사를 나눈 후에는 말없이 물만 마셔 나갈 뿐이다. 그로서도 이 자리가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 딸 중 가장 성격 좋고, 애교 많은 딸이었기에 많은 사랑을 주었으며 꿈도 많이 실어 주었다.

 

 

 

 

 

어릴 적부터 동화책도 많이 읽어 주었으며 산과 들로 손을 잡고 나들이도 데리고 다녔다. 남들은 아들 없이 괜찮겠냐고 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았다. 세 딸로 인해 행복했으니까. 첫째 딸이 성격이 강하고 자기애가 강하다면 둘째 딸인 지영은 감성이 풍부해 대화가 잘 되었다.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끝까지 듣는 것도 좋았고, 생글거리며 잘 웃는 것도 좋았다. 예뻤으며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그 딸이 예기치 않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위가 될 인혁은 건강한 정신을 가져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많은 것이 눈에 보여 그로서는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가 시동생을 비롯해서 시어른 뒷바라지를 하고 살아 온 것은 당연시 했는데 자신의 귀하고 귀한 딸이 시집살이를 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여왔다.

 

 

 

 

분가에 대한 얘기를 비추었고, 또 작은 집이라도 얻어 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당분간은 함께 살 것을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따로 살면 가족에 대한 정이 없다는 말을 아내로부터 듣고서는 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딸 가진 것이 죄인이었으니까. 딸 가진 자는 약자였으니까.

 

 

 

 

 

“어제 신혼 방을 꾸몄습니다. 애기가 핑크 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도배지도 거기에 맞췄으며 커튼도 같은 색상으로 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인혁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아무래도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는 아이들의 얘기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두 사람을 향해 방을 꾸민 얘기를 시작으로 해서 오전에 지영이 다녀 간 소식까지 전했다.

 

 

 

 

 

오전에 갔다 온 얘기는 없었다. 갑자기 두 사람은 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지영은 자신들이 아닌 인혁만 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서운해지는 것일까. 왜 더 이상 자신의 딸이 아닌 느낌이 드는 것일까. 결혼이 무엇인지 알긴 아는 것일까. 결혼 생활이 어떠한지 알고나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시어른 될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은 모습을 보이면서 조신하게 고개를 아래도 숙이고 있었지만 인혁과 눈이 마주치면 세상을 다 가진 여자처럼 치아를 보일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김 여사는 그런 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 볼 뿐이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저렇게도 행복할까.

 

 

 

 

“애기가 밥을 잘 먹어요. 이젠 입덧이 끝난 모양입니다. 아귀찜이 먹고 싶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밥을 두 공기나 비웠습니다.”

이 말도 없었다. 또 서운했다. 어제부터 아귀찜이 먹고 싶다고 해서 늦게 시장을 다녀 와 찜을 만들었지만 아침에 나간 딸은 몇 시간 후에 들어 왔다. 좋아하는 아귀찜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지영은 조금 맛을 보고서는 나중에 먹겠다는 말만 나겼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김 여사는 지영을 넌지시 바라보다가 옆에 앉아 있는 인혁을 쳐다보았다.

 

 

 

 

 

 

참으로 잘 생겼으며 어떤 여자가 바라보아도 매력을 느끼기엔 충분한 얼굴이었다. 아직 완전한 남자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또 시간이 흐르면 가장 멋지면서도 세련 된 남자로 세상 어딘가에 서 있을 강인함까지 보였다. 그의 눈매가 그러했으니까. 사위가 될 인혁의 눈빛은 늘 강하면서도 힘이 있으니까. 그 눈빛이 좋았고 마음에 들었다. 딸인 지영은 가끔 매섭게 변하는 눈빛이 싫을 때가 있다고 했지만 남자는 그런 눈빛을 지녀야만 이 힘들고 벅찬 세상을 살아가는데 덜 밀려 나갈 것이다. 그래서 나이 먹고, 세상을 먼저 살아 온 엄마의 입장에서 인혁의 눈빛은 마음에 들었다.

 

 

 

 

 

윤인혁!

이미 인혁의 가치에 대해선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기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문제는 시할머니와 시아버지였다.

 

 

 

나이 많은 시할머니, 사고로 몸을 다친 시아버지는 정말이지 걱정이었지만 세상을 모르고 있는 딸은, 오직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진 딸은······ 인혁을 쳐다보며 꿈속을 달리고 있는 어린 소녀였다.

말 그대로 지금 지영은 동화속의 공주가 되었으며 동화 속에서 살고 있는 눈빛이었다. 나는 행복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예요. 나는 윤인혁이란 남자와 결혼해요. 이 잘나고 잘난 남자가 내 남자예요란 말을 눈으로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렇게 좋을까. 점점 입술이 열려지고 있는 지영의 입술이 어느 새 환하게 열려갔다.

 

 

 

 

부끄러움, 미안함, 뭔지 모르지만 죄인의 느낌은 이제 없어지는 모양이다. 처음과는 달리 시댁 식구가 될 시아버지와 시누이를 향해서도 간간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아버지는 웃고 있었지만 시누이는 웃지 않았다. 그것도 신경 쓰였다. 시누이가 두 명이다. 지금 나온 큰 시누이의 위력이 느껴졌기에 엄마로서 또 걱정이 될 뿐이었다.

 

 

 

 

분가!

 

 

지금이라도 분가에 대한 얘기를 한 번 더 꺼내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 말을 꺼내었다간 지영에게 득이 아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목까지 차올라 온 말을 내뱉지 않았다.

 

 

 

“신혼여행은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습니까?”

 

 

 

 

다음 주가 결혼식이다. 이미 임신 얘기가 양쪽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일단 결혼을 시키자는 말이 나오면서 결혼식이 잡혀졌다. 갑자기 잡혀진 결혼식으로 인해 신혼여행에 대한 계획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양쪽 집에서는 생각을 해야만 했고, 또 인혁과 지영은 거대한 일을 만들었지만 학생의 신분으로 중간고사까지 쳐야했기에 그 몫은 중년의 두 여자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젠 신혼여행에 대한 계획을 잡아줘야만 했기에 김 여사는 인혁의 어머니가 신혼여행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말을 들으면서 지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신혼여행! 여자에게 있어 결혼식 못지않게 신혼여행도 중요했기에 가급적이면 많은 추억을 담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고 싶었다. 어디로 보내면 좋을까. 이들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가장 많이 가고 있는 제주도는 이미 지금 시점에서는 날짜를 맞추기가 어려웠기에 다른 곳을 생각하다가 지영을 쳐다보았다. 지영은 자신의 얼굴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말똥거리며 쳐다 볼 뿐이다.

 

 

 

 

 

“어디로 가고 싶니?”

 

 

 

 

인혁의 어머니인 강 여사가 지영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지영은 거기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 신혼여행에 대한 얘기는 인혁과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상견례라는 말에 마음이 들떠 이것만으로 좋았다.

 

 

 

 

“신혼······여행?”

“그래. 신혼여행! 둘이 의논하지 않았어?”

“네.”

지영의 음성이 작아지자 강 여사는 인혁을 쳐다보았다.

 

 

 

 

 

“아직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시험 끝나고 바빴습니다.”

“그랬구나. 너희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제주도는 지금 가기는 힘들다는 거 알고 있지?”

인혁도 알고 있었기에 인정한다는 눈빛을 짓다가 조용히 자신의 눈을 보고 있는 지영을 보면서 뭔가 생각이 떠올랐다.

 

 

 

 

“제주도는 여름 방학 때 가는 것으로 하고, 경주에 갈래? 너, 경주에 가고 싶어 했잖아. 초등학교 때 아파서 수학여행 가지 못했다면서.”

 

 

 

 

그냥 흘러가는 말로 했을 뿐인데 아직까지 기억을 하고 있는 남자가 세심해 보였으며 너무나 자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동갑이지만 오늘따라 이 남자는 완전히 어른이 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말투도 어제와 달랐으며 행동도 조심스럽게 어른들을 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잘 차려 입은 양복이 신랑다운 의젓함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감색 양복이 윤인혀과 너무나 잘 어울렸으며 그 안에서 한층 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연한 하늘색의 와이셔츠와 줄지어 져 있는 선으로 연결 된 넥타이까지 윤인혁의 것이었다.

‘윤인혁! 멋있다. 너무 멋있어.’

 

 

 

 

인혁은 입을 오물거리는 지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눈이 웃고 있었기에 자신의 의견을 허락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구나. 지영이가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구나.”

“네. 그때 많이 아팠어요.”

“인혁이 생각이 어떠세요? 경주로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

 

 

 

 

 

분가에 대한 생각만 틀렸을 뿐 다른 의견은 언제나 지영의 어머니인 김 여사에게 먼저 물었다. 김 여사도 과히 나쁘지 않았기에 눈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세심하면서 지영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김 여사는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먹는 것에만 관심 있는 시할머니는 그저 지영을 쳐다보면서 예쁘다, 우리 손녀 예쁘다는 말을 연신 하는 게 전부였으며 시아버지도 간간이 웃음을 지은 채 두 여자가 나누는 말에 고개만 끄덕거려 나갔다.

 

 

 

 

단지 시누이가 말이 없다는 것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처음 인사를 나눈 후로는 여태까지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지영을 보고 있는 게 전부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으며 간혹 인혁을 바라보면서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김 여사는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젠 친정엄마의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민감하고 예민해져 갔기에 시댁 식구들의 작은 행동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혁의 부모님은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딸인 시누이도 좋은 사람이라 여기고 싶었다. 원래 말이 없을 것이다. 조용한 성격을 지닌 여자일 것이다. 눈매가 고와보였으니까. 어머니를 닮았으니까.

 

 

 

 

 

 

“그럼 큰 문제는 다 해결되었군요.”

“그렇군요.”

 

 

 

 

 

처음으로 두 여자는 편해졌으며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남편을 향해 안심하라는 눈빛을 지었다.

 

 

 

“그런데 예단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 주셨으면······.”

“그건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간단하게 하시죠.”

“그건 알지만······.”

 

 

 

 

 

딸 가진 부모였기에 최대한 많은 것을 해 주고 싶었으며 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치 않았다. 예비부부들이 학생이고, 앞으로 다른 곳에 들어 갈 돈이 많을 것이니까 최대한 아끼자는 말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건 나중 문제이고 지금은 시어른을 위한 예단과 직계 가족들에게는 부족하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예단은 생각에 따라서 다를 수 있지만 미묘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김 여사는 해 주길 원했지만 강 여사가 원치 않았다.

신혼 방에 들어 갈 가전제품들과 작은 예단비가 전부였다. 봉투에서 반은 강 여사가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학생 부부에게 무슨 예단비이며 형식적인 것이 뭐 그리 중요하느냐고 했지만 딸 가진 부모는 그렇지 않다는 말에 강 여사가 반만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나중에 두 아이를 위해 쓸 것이란 말을 덧붙여 했다.

 

 

 

 

 

그래서 김 여사는 다른 가족은 몰라도 시누들에게는 따로 정장을 한 벌씩 해 주고 싶었다. 아직 아가씨였고, 남동생을 먼저 결혼 시키는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도 이해가 되었다. 지금 말이 없는 거, 말을 잘 하지 않는 거, 어쩌면 자신과의 마음과 싸우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처음에는 자신의 딸 입장만 생각했기에 말도 없고, 차가운 눈빛만 신경 쓰였지만 이젠 그 마음이 보였다.

 

 

 

 

위로 누나가 있는데······. 먼저 동생을 결혼시키는 그녀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것을 생각하자 김 여사는 시누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설령 그녀가 쳐다보든, 보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마음이 이미 편해졌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여기에서는 아들가진 강 여사의 말을 다 들어주고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서는 지영과 의논해서 시누들을 위한 옷은 준비하리라 마음먹었다.

막상 옷을 했다면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김 여사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자 강 여사가 물끄러미 바라 볼 뿐이다.

 

 

 

“두 사람, 예물만 찾으면 결혼 준비는 완벽히 끝나는 군요.”

“모레 쯤 가전제품까지 신혼 방에 들어오면 끝이 나겠죠.”

“그렇군요.”

 

 

 

 

그러나 김 여사는 내심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부인, 딸 가진 엄마입니다. 시어머니보다 더 힘든 사람이 시누란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나는 지금 별로 말도 없고, 속을 모르는 저 어려운 시누에게 아부를 할 생각입니다. 최고로 좋은 옷을 두 벌 정도 해서 보낼 생각입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김 여사는 자꾸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뭔가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딸 가진 엄마는 왜 저 자세로만 따라야 하는 것일까. 왜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게 딸을 위한 길이니까. 조용히 따르는 것이 딸이 편하게 사는 길이니까.

 

 

 

 

 

그런데 하나는 아니었다. 시누이 시집살이는 시킬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시어머니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시누이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니까. 그래서 김 여사는 최대한 최고로 좋은 예단으로 선물을 할 생각이었으며 그럴 생각이었다. 실행에 옮기려하자 점차적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되고 있었다. 웃고 또 웃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김 여사가 모든 것이 완벽히 해결되어 마음이 편해져서 웃고 있단 생각을 할 뿐이다.

 

 

 

 

누가 김 여사의 이런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즐거운 식사를 이어나갔으며 화기애애한 대화들만 나오고 있었다. 인혁의 꿈이 법조인이 되는 것과 동화작가가 되고 싶은 지영의 꿈이 화제가 되었다.

강 여사는 여자도 이젠 자신의 일을 가져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그 꿈을 꼭 이루길 바란다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있는 지영이 그저 예뻐 보였다. 한동안 입덧이 심해 고생을 많이 했다는 얘기를 인혁으로 들었기에 집으로 불러 지영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들을 해주긴 했지만 자신도 일을 하는 지라 자주 해 주지는 못했다.

 

 

 

 

 

“잘 먹는 구나.”

“고기가 부드러워. 많이 먹어.”

 

 

 

 

 

인혁의 할머니 입에서 나왔다. 따라 나왔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앞에 놓인 음식들을 먹는 일이 전부였으며 간혹 지영을 쳐다보면서 예쁘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땅콩이나 고구마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 종류들은 아마도 집에서 가져 온 모양이었다. 여 종업원이 건네 준 것은 기본적인 차 종류가 전부였다.

“네.”

“예쁘게 생겼어. 우리 인혁이보다 훨씬 더 예뻐. 우리 인혁이는 성질이 고약해. 네가 저 녀석 비위를 맞추려면 힘들 거다.”

 

 

 

 

지영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란 말을 입 안에서만 오물거렸다. 좋은 남자지만 자기애가 강한 남자,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기에 행동하나, 말씨 하나에도 신경을 쓰여만 했다. 저 남자의 자존심은 건드리면 안 되니까.

 

 

 

 

지영은 잠시 인혁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인혁이 고기를 먹다가 지영을 쳐다보았지만 지영은 웃고만 있을 뿐이다.

“잘 생겨서.”

그 말에 모인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했는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인혁의 가족들은 새 며느리가 될 지영의 입에서 나온 진심어린 말이 듣기 좋아 웃었지만 지영의 부모는 시댁 식구가 될 사람들과 조금씩 친해지면서 정을 쌓아가고 있는 딸이 대견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쪽의 마음이든 서서히 분위기는 물 흐르듯 편하게 흘러갔으며 고기를 더 주문해 나갔다. 모두들 배가 고팠으니까. 다들 긴장하고 난 후의 식사였기에 더 많은 음식들이 먹혔으며 금방 고기들은 사라져갔다.

 

 

 

 

오늘은 누가 먹어도, 얼마만큼 먹어도 행복한 시간들이었는지 모른다.

인혁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도, 지영의 부모님도.

 

 

 

두 사람이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라는 양쪽 부모들의 마음은 같았으니까.

 

 

 

 

강 여사의 눈길이 매번 지영을 향했으며 김 여사의 눈길도 순간순간 인혁을 향했다. 어쩌면 저렇게도 잘 생겼을까. 어찌 저렇게 복스럽게 잘 먹고 예쁠까.

이제 그녀들은 모두 마음을 비웠다. 그녀들 눈에는 새로운 부부로 시작하는 두 사람이 한없이 예뻐 보였으며 멋진 커플로 인정을 한 것이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으며 가장 이상적인 부부로 가리라 여겼다.

 

 

 

“너도 뭐라고 해야지.”

 

 

 

강 여사의 말에 인혁은 잠시 지영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예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지영은 여자니까 애교로 봐 줄 수 있지만 자신은 남자였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너도 예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기를 더 시켜야겠습니다.”

인혁의 입에서 나온 말에 또 다시 웃고 있었지만 역시나 행복을 느끼는 것은 모두의 마음이었다. 이 시간은 어느 누가 봐도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진짜 행복이었으니까.

 

 

 

 

 

지영은 소년처럼 쑥스러워 하는 인혁의 옆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이 사랑이, 이 행복이 영원하길 바랐다. 사랑은 영원하니까.

행복은 두 사람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