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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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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한 걸음씩


BY 문해빈 2012-11-06

“냉장고, 고장 났어? 쓰지 못할 정도로.”

“수리하러 올 거예요.”

“차라리 하나 사는 게 낫겠다. 이것도 전자제품이라고 사용하는 것인지. 여기 담겨진 음식들을 먹으면 오히려 배탈이 날 것 같은데.”

“······.”

 

 

 

 

그제야 연수는 제 정신이 돌아와 석민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들어 온 남자는 살림들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오랜 습관이란 것이 이래서 무서운 모양이다. 예전에도 그랬다. 처음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이 남자는 완벽주의자가 되기라도 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신으로 만드는 것이 취미였다.

 

 

 

옷도 자신의 취향대로 사 입혔고, 액세서리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하게 했다.

 

 

옷도, 액세서리도, 가방도, 구두도, 먹는 음식도.

정신없이 시작된 연애! 급하게 시작되고 있는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석민의 여자였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석민과 윤연수는 캠퍼스 커플이었으니까. 누가 봐도 윤연수는 이석민의 여자였고, 이석민은 윤연수의 남자였다.

열렬한 사랑, 꽃처럼 화려하면서 정열적인 사랑을 했다. 20대 꽃다운 시절에······.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사람들이었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이었다. 그런 남자가 새삼 이것저것 챙기면서 잔소리를 하고 있었으며 여자는 습관처럼 대답을 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버린 연수의 눈 꼬리가 매섭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석민 아나운서, 나는······.”

“여기서까지 당신이란 여자에게 높임말을 사용해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 내 상사는 방송국에 있을 때만 가능한 거지. 지금은 공적인 만남이 아닌 사적으로 찾아왔어.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윤연수 여자를 찾아 왔어. 내 여자에게.”

석민의 눈빛도 연수 못지않게 날카로웠으며 가까이 다가 와 있었다. 좁은 공간이라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키가 큰 남자가 움직일 때 마다 집은 더 좁게만 느껴졌다. 석민이 자신을 노려보듯이 차가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연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씩······.

 

 

 

“널 보러 왔어.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널 찾으러 왔어.”

 

 

좁은 공간은 이 남자가 뿜어내는 입김마저 강렬하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심장이 뜨거운 것일까. 뜨거움이 얼굴을 덮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지만 연수는 애써 침착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았는지 모른다. 근래에 와서 하는 행동들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공식적인 회식 자리에서도 만나 주지 않았으며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계단이나 사적인 공간에서 만날 일이 있어도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여자가 얼마나 미웠으면 이 시간에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복도를 울리게 만들었다. 여기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 다면 그는 무슨 짓이든 할 것으로 보였다. 이석민이니까. 아쉬운 것이 없는 남자니까.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아 온 남자니까.

 

 

“술 마셨어요?”

“술의 힘을 빌려 널 찾으러 올 정도로 나약한 남자, 아니다. 이석민이란 남자를 모르진 않겠지? 한 번 마음먹으면 그대로 돌진한다는 거.”

“······.”

 

 

 

 

연수가 계속 자신의 얼굴 가까이에서 말을 하면서 입김을 강하게 내뿜고 있는 석민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있기는 처음이었다.

 

 

“조금 전에 내가 말했지. 그때 나는 어렸고, 단 한 번의 실수였어. 그 나이라면 우린 실수를 할 수도 있어. 20대였잖아. 세상이 다 내 것만 같았고, 무서울 게 없더라.”

“그렇다고 해서는 안 될 게 있다는 것쯤은 알아야죠. 사람이라면.”

 

 

“사람이라면?”

“사람은 이성을 가졌으니까요.”

“아직도 그날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날 잊지 않았군.”

석민이 또 한 걸음 다가섰다. 이젠 거의 붙어버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연수는 부담감을 느껴 뒤로 나가려 하자 석민이 연수의 양 팔을 세게 잡았다.

 

 

“널 사랑해. 진심이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석민은 연수를 껴안았으며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머리를 움직이려고 했지만 석민의 힘에 이끌려 연수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입술만은 열어갔다.

“이러지 말아요. 이건······.”

“이제부터는 내 방식으로 사랑할 생각이다. 그동안 너한테 하지 못했던 거, 마음 아프게 한 거. 너한테 상처준 거까지 다 보상받게 해 줄게.”

“그럴 필요 없어요. 이제 우리 두 사람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순간, 석민은 자신의 입술을 연수의 입술에 포개었으며 좀 더 강하게 입술을 끌어당기었다.

석민은 한층 더 분위기를 만들어갔으며 손이 머리를 뒤로 젖혀가고 있었지만 연수는 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뒤로 젖혀져 간 머리를 제자리로 가져 간 시간은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곧 석민의 얼굴을 뒤로 밀었다.

 

 

 

“이러지 말아요. 내가 말했죠? 우리 두 사람은······이제 과거의 사람일 뿐이죠.”

“아니.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라고. 그리고 넌 내게 과거의 여자가 아니야. 현재의 여자이며 미래의 여자다.”석민은 자신을 힘껏 밀어 낸 연수를 다시 안았다. 손을 잡고, 허리를 끌어당기면서 머리를 여전히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느껴봐. 느껴지지? 들리지? 요동치듯이 뛰고 있는 이석민의 심장소리다. 이 소리, 널 생각할 때만 뛴다. 신기해. 어떻게 너만 생각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뛸 수 있는지.”

 

 

석민의 손이 연수의 손을 잡아 가슴에 대고 있었다.

 

 

“느껴지지 않아? 들리지 않아?”

석민은 연수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20살의 윤연수는 겁도 없이 이석민의 품에 안겼지. 이렇게.”

석민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끌어당기고, 말로 끌어당겼다. 연수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한다. 이대로 쭉 밀고 가면 되는 것이다. 이 여자가 말한 대로 이제 20살의 윤연수가 아니기 때문에 석민으로서도 긴장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번 후반기쯤에 연수와 결혼을 할 계획이었고, 그 계획을 밀어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진행되는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늘 주위를 서성거렸지만 혼자 맴도는 시간이 전부였기에 속만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오늘은 공식적인 회식자리가 아니었기에 마음도 편했고, 먹는 음식도 나름 즐거웠으며 대화의 장도 막힘없이 열려갔다. 그 주제는 물론 함께 진행하는 ‘웃으면 행복이 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함께 하는 시간들이 많아진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그 후로는 늘 함께 하는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많아졌으며 또 오늘처럼 이런 장소에서 만날 수도 있었다. 석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놓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곱빼기라고 놀리는 말에 얼굴빛이 빨갛게 물드는 모습도 보았으며 다리로 살짝 살짝 닿아가고 있는 것도 신나기만 했다. 다리가 닿아갈 때 마다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여자의 얼굴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다리가 닿고, 무릎이 닿아가고, 또 그러면서 손끝도 스치고······. 석민은 모든 것이 좋기만 했다.

세 사람이 함께 한 자리였기에 연수와 따로 만날 수는 없었다. 혼자 집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연수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연수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여전히 그 기분에 도취된 석민이 연수의 집으로 찾아 왔다. 연수가 너무나 보고 싶은 것은 본능이었고, 그 다음으로 하고 싶은 것은 결혼에 대한 계획이었다.

 

 

 이젠 미룰 수도 없었고, 물러 설 수도 없었다. 이 여자, 윤연수를 방송국에 오래 둘 생각은 애당초 없었기에 곧 결혼과 함께 안방에 들어앉힐 생각이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윤연수라는 프로필을 보면서 늘 혼자 웃기도 하고, 이국적으로 나온 사진을 손으로 어루만지는 것이 취미가 되어 버리다가 결국 이곳으로 따라 온 것이다. 윤연수를 만나기 위해, 윤연수를 잡기 위해. 윤연수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서······.

 

 

“결혼하자.”

“······.”

 

 

 

혼자 감정에 취해 온갖 밀어로 여자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 시작한 남자는 급기야 결혼을 하자고 했다. 예전의 추억까지 꺼내어 감정을 몰입시키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거침없는 애정표현을 해 갔다. 손과 입술은 소리 없이 그의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결혼이란 말을 들은 연수가 석민을 과감하게 밀어냈다. 어떻게 해서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다가 이 남자의 입술에서 머물고 있었는지 그것도 알지 못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약에 취한 듯 정신없이 이어진 시간들이었으니까.

잠에 취한 여자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잠이 깼을 뿐이다. 그리고는 소리 나는 쪽으로 향했으며 문을 열었다. 거기엔 이석민이란 막무가내인 남자가 서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그대로 둔다면 이 남자는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문을 열게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문을 열어주었다.

 

 

이런 행동들, 벌써 몇 번째라는 거 알고 있었다. 혼자 와서 벨을 누르기고 하고, 또 문 앞에 쪼그린 채 앉아 있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신문지인지 종이류가 다리미로 다려 놓은 듯이 평평하게 놓여 있었던 것도 증거라면 증거였다. 기다림! 그는 기다리다가 돌아간 것이다. 그의 성격상 누구를 기다리고, 누군가의 취향에 맞추는 거 절대로 하지 못하는 남자였지만 31살의 남자는 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로 문 옆에 화려하게 수놓은 가지각색의 꽃다발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집으로 돌아 온 연수는 문 옆에 반쯤 기운 모습으로 서 있던 꽃다발을 들고서 석민을 기억했다. 석민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꽃을 보는 순간, 연수는 당연히 석민일거라는 생각만이 떠올랐으며 이석민이란 남자의 짓이란 것을 강렬한 느낌으로 느낄 뿐이었다.

 

 

 

이 정도로 과감하게 행동하는 남자는 이석민이란 남자뿐이었으니까.

이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다. 사랑을 했기에 그 사랑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처음 남자를 느꼈고, 뜨겁게 사랑했으니까. 그 나이에는 마음을 다 했고,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했으니까.

 

 

첫사랑이다. 부정하기 싫지만,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이석민은 윤연수의 첫사랑이었다. 성인이 시작될 무렵에 곧 눈에 들어왔고, 그의 관심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가 하자는 대로,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사랑이란 감정은 한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게 엇갈려 갔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게 누구의 잘못인지, 누구의 탓인지 모르지만 첫사랑은 막을 내려야만 했다. 배신을 했으니까. 눈앞에서 아픈 상처를 받았으니까.

연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산 너머, 바다너머에 있는 아픔을 기억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결혼! 결혼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이 남자는 가장 소중하고 중대한 말을 이런 식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결혼이 아이들이 하는 소꿉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 나이에 어울리는 남자로서의 외형적인 모습이었다. 젖살은 여자들만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남자도 아이 같은 부드러운 속살은 다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는 각진 턱 선을 비롯해서 잘 다듬어진 선들이 매력을 끌기에 충분했다.

 

 

 

잘 뻗어 있는 코와 함께 시커먼 속눈썹이 인상적이었으며 여름바다를 연상시킬 강렬한 눈매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남자치고는 눈빛이 모래알처럼 빛이 난다는 것에 많은 점수를 준 연수였다. 그 시절에는 눈빛만 봐도 황홀했고, 마음을 다 주었다. 20살의 어린 여자는 그랬다.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사랑은······끝났다. 누구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이별을 했다. 이별을 하긴 했나? 그것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석민이 전화를 해 왔고, 집 앞까지 찾아왔지만 만나주지 않았다.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만나서 얼굴을 보기도 싫었으니까.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아픔도, 과거의 기억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나타나 과거를 각인시키는 것은 물론이었으며 결혼을 하자고 했다. 결혼이란 것을. 이게 말이 되는 것일까. 이게 사람으로서 예의가 있는 행동일까.

다 가지면 이 남자처럼 막무가내로 될 수 있는 모양이다. 넘치게 다 가진 남자는 아쉬울 것도 없으니까 새삼 추억이 그리웠을지 모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어떻게 목숨을 걸고 성공이란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다니는 직장으로 올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이곳이 전부이지만 이석민이란 남자는 여기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살아 갈 길이 많다는 것도 연수는 알고 있었다.

더욱 기막히고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다른 분야가 아닌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아나운서였다. 기자도, 프로듀서도 아니었다. 아나운서라는 명함을 내밀었을 때 연수는 알았다. 이 남자가 이석민 아나운서로 입사했다는 것을.

 

 

 

 

 

그는 시간이 날 때 마다 미소를 보내 왔고, 전화로 통해 속삭였다. 내가 이석민이라고, 윤연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이석민이라고 했다.

그 시간이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도 조금씩 지쳐갔을까. 스스로 포기하길 바랐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곧 열애설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열애설이란 말에 연수는 석민의 강렬한 눈빛을 시작으로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눈썹을 향했다.

 

 

“내 얼굴, 이 정도 거리에서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지. 어때? 예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 졌지? 윤연수가 세련되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여인으로 변해 있듯이 이석민이란 남자도 어린 소년 같은 얼굴에서 남자로 변해 있지?”

“······!”

이미 다 읽은 모양이다.

 

 

 

“매력도 있을 텐데.”더 이상 이 남자와 말을 엮어간다면 이 남자가 원하는 대로 갈 것만 같았다. 연수는 누구보다 이석민이란 남자의 성향을 잘 알기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 남자의 힘에 이끌리면 안 되니까. 어서 이 집에서 나가게 해야만 하니까.

그러나 그것도 연수의 잘못된 계산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석민은 그것마저 허용할 수가 없었는지 손으로 돌아가고 있는 얼굴을 매만져 갔다.

 

 

만지고 싶었으니까. 느끼고 싶었으니까. 더 오래오래 보고 싶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있는 것은 행복했으니까. 이 행복을 더 많이 누리고 싶었다.

 

그 전화만 오지 않았다면······.

 

그 전화의 목소리가 지금의 절절한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면 석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갔을 것이다. 사랑이란 이름 앞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한 남자의 애절한 심장도 녹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미 두 번 전화벨이 울렸고, 또 한 번 울리자 연수는 빠른 발걸음으로 침대 옆 의자위에 있는 가방 안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받았다.

 

 

 

-생각보다 빨리 받네. 이번에 받지 않으면 끊으려고 했는데. 혹시 자다가 받은 거 아니야?

“아니에요. 일어났어요.”

-그랬구나. 잠은 푹 잤어?

“적당히 잤어요. 너무 많이 자면 흐름이 끊길 거 같아 조율을 해야죠.”

-오늘 같은 날에는 그런 거 조율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 자라. 그 전에 저녁은 먹었어?

“낮에 곱빼기 먹었잖아요.”

 

 

 

곱빼기란 말에는 석민의 눈 꼬리도 위로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오누이처럼, 오빠와 동생처럼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시간,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전화를 할 정도의 남자라면 생각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곱빼기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박영우 피디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정말 어떤 사이일까? 하나같이 좋은 선배와 후배사이이며 박 피디가 워낙 대인관계가 원만해 누구와도 잘 지낸다고 들었다.

 

 

 

 

그게 전부이길 바랐지만 오감과 육감은 여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변형하고 있는 것은 지금 석민도 같은 마음이었다. 두 사람, 그것도 박영우 피디는 절대로 연수를 단순한 후배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후배 대하듯이, 동료 대하듯이 행동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깊은 관심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석민의 눈에는 영우가 연수를 아끼고 잘 해 주고 있었지만 그건 사랑이었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어떤 방법에 따라 사랑이 만들어지느냐가 문제지만 박영우 피디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연수를 보살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연수는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영우는 영우대로 그대로 자신의 방법으로 한 여자 곁에서 조용한 사랑으로 머물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건 사랑이니까.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사랑이었으니까.

 

 

 

-잠 오지 않으면 나올래?

“어디에요?”

-집 근처에 있는 죽 집에 와 있어.

 

 

죽 집이란 말을 듣던 연수가 본능처럼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석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옆이 아니라고 해도 이 좁은 집에서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마주 칠 수 있는 곳이긴 했다. 석민은 말없이 두 사람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었지만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기도 했다가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느꼈다.

 

 

 

 

“아직 배 속에 저장된 것이 많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여기서 더 먹으면 내일 방송하기 힘들 거 같은데.”

-그 생각을 못했구나. 방송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얼굴은 재산이지.

영우는 사실 죽이 목적이 아니었다. 낮에 잠시 얘기하다가 멈춘 다른 얘기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얼굴 상태가 엉망이에요.”

-그 얼굴, 자주 봤잖아. 그래. 알았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만나자. 내일 아침에 같이 차 타고 갈래?

“그것도 싫어요. 그렇지 않아도 선배하고 도대체 진짜 무슨 사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같이 차까지 타고 다니면 열애설 터져요.”

-그러면 안 되나? 그거, 내가 기다리고 있는 폭탄인데.

 

“······.”

-농담이다. 넌 이제 내 성격을 알면서 아직도 이런 농담에 얼어버리는 구나. 윤연수 답지 않다. 죽 시켜야 할 거 같구나.

“맛있게 드세요. 내일 봐요.”

-너도.

 

 

 

 

전화가 끊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10분, 20분, 30분은 되었나.

 

석민이 계산한 마음의 시간은 1시간 이상은 된 것만 같았다. 무슨 대화가 저리도 재미있는 것인지 두 사람은 농담도 주고받으며 편하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과는 격을 두고 있었지만 박영우 피디와는 그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도 자신의 일에 완벽한 여자였고, 어느 누구와도 흐트러진 농담 따위는 하지 않는 여자, 그 여자가 헝클어진 머리부터 시작해서 얼굴이 엉망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박영우 피디는 편한 사람이었다. 사람이 아니다, 남자였다. 그는 남자였으니까.

 

 

 

“두 사람, 어떤 사이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석민이 연수를 향해 물었다. 알아야만 할 거 같았다. 늘 궁금했다. 오감을 벗어나 육감에서 석민은 풀고 싶었으며 시원한 대답을 알고 싶었다.

 

 

“그게 새삼 왜 궁금해요?”

“알고 싶어. 늘 궁금했거든. 회식자리에서도, 오늘처럼 마음 편하게 불러낼 수 있다는 것도.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아. 불러내는 사람도 그렇지만 불러낸다고 바로 나오는 사람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일 때문에 만난 거잖아요. 다 들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도윤 씨 일?”

“그건 알아. 하지만 매번 두 사람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니?”

“······.”

 

 

 

연수가 물끄러미 석민을 바라보았다. 왜 이런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영우 피디를 좋아하니?”

“그런 거 아니에요. 같은 직장 동료이며 좋은 선배와 후배사이에요.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 거죠?”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큰 소리로 말하려다가 어딘가에 시선이 멈추었다. 자신이 문 옆에 둔 장미꽃이 노트 북 옆 화병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저건 왜 보지 못했을까. 좁은 집, 오래 된 가구들, 작은 침대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당장이라도 이 집에서 이 여자를 나오게 하려는 계산뿐이었다. 가구들을 바꾸던지, 아니면 집 자체를 바꾸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보니 꽃은 보지 못했다. 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노트북 옆에 있을 줄은 몰랐다.

“저 꽃?”

석민이 화병에 가득 담긴 꽃들을 보고 있자 연수도 석민의 눈길을 따라 화병으로 눈을 돌렸다.

“저 꽃, 내가 갖다 놓은 거라는 거 알고 있었지?”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번인가 집에 도착했을 때, 보지 못한 꽃다발이 얌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색색별로 화려한 꽃들이었으며 더욱 시선을 머물게 한 것은 하나같이 장미꽃이었기 때문이다. 장미가 좋았다. 빨간 장미든, 노란 장미든, 하얀 장미든, 장미라는 그 자체만으로 연수는 장미들이 좋았다. 꽃 선물을 하고 싶다는 남자에게 무조건 장미로 사 달라고 했다. 그 시절에. 20살의 앳된 나이에는 그랬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다보니 이젠 꽃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고, 보는 눈도 바뀌었다. 꽃은 무조건 화려함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은은한 국화나 백합같이 조용한 꽃이 좋았다.

 

 

 

 

물론 국화니, 백합을 선물해 줄 사람도 없었지만 장미는 이제 잠시 보는 것만으로 좋았을 뿐이다. 전화를 하고, 관심을 보이는 남자는 이석민이란 남자밖에 없었기에 지금의 장미를 갖다 놓은 사람은 이석민이란 남자일거라 생각했다. 전화를 해서 이런 행동들,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오히려 더 적극적인 행동을 보일 거 같았기에 말없이 침묵만 지켰다. 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꽃은 꽃일 뿐인데······.

 

 

 

“장미, 예쁘지? 넌 유독 장미꽃을 좋아했잖아.”

“이젠 아니에요. 나이를 먹고, 현실 속에 살다보니 꽃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지더군요.”

“지금은 무슨 꽃을 좋아하니?”

 

 

“그건 나도 몰라요.”

“나도 모른다? 그 대답, 재미있군.”

“분명히 말하고 싶어요.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거 하지 말아요. 이왕 방송국으로 입사를 해서 왔다면 일에 정열을 다 해요. 나하고는 그저 직장 동료로만 지내요.”

 

 

 

석민이 잠시 대답대신 눈으로만 연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듯이 단순한 동료들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잖아요. 결혼해서 이혼하는 부부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단순한 관계로 살아요. 그런데 잠시 연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복잡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이 여자, 원래 이런 여자였나? 여리고 여린 여자는 이제 강하면서도 독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일에 열정을 다하는 여자, 성공에 목숨을 거는 여자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미 방송국에서도 인지도가 대단했으며 이번 프로가 끝나면 단독으로 진행하는 프로를 맡게 될 거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어디까지 올라가고 싶니?”

“······!”

 

 

 

“네 눈에는 나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너도 예전의 윤연수는 아니다. 너도 많이 변했어. 무엇이 널 변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청초하고 순한 윤연수의 얼굴은 없어. 방송국에서 그동안 널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성공에 목숨 건 차가운 윤연수의 얼굴만 있다면 내가 잘못 본 것일까?”

“······.”

 

 

 

연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은 처음 느끼는 그 분위기가 정확하거든. 윤연수는 장미꽃을 좋아하고, 보조개가 쏙 들어갈 정도로 환하게 웃던 여자. 그게 네 본 모습이다. 성공! 그거 대단한 거 아니야.”

 

 

 

성공이 대단하지 않다고 말하는 남자, 그 남자의 얼굴을 연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보이면서 쳐다보았다. 다 가진 남자의 여유로움이 보였다. 이 남자, 외형적으로 다 가진 남자다. 내형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외형상 조건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다 가지고 있었다.

“당신 눈에 내가 그렇게 보였군요. 그렇다면 더 자세히 얘기해 줄게요. 그래요. 나는 성공하고 싶어요. 올라갈 수 있다면 끝없이 올라가고 싶어요. 결혼! 그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

 

 

 

결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여자의 얼굴에선 차가움마저 느껴졌다. 확실히 예전의 윤연수는 아니었다. 자신도 변했지만 이 여자는 많이도 변해 있었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많이 변하게 한 것일까.

“내 감정을, 내 마음을 다 알았으면······.”

 

 

그 순간, 석민은 자신의 중간에 있는 손가락으로 연수의 입술을 막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나도 여기까지 오는 거, 쉽지 않았다. 나도 변했다.”

“변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조금씩 변한다고 하는데 유독 당신만 그 자리에 있는 거 같아요. 하는 행동도, 말투도.”

막고 있는 손가락 틈으로 새어 나온 음성은 약간은 흐린 날씨처럼 새는 것 같았지만 그녀만의 단호하면서 차가운 음성이었다.

 

 

“네 눈에는 나란 남자가 그대로이겠지. 이미 넌 날 한 자리에 고정시켜 놓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다른 행동을 보여도 넌 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하고 달라. 넌 꺾어지지 않는 대나무로 변해가고 있지만 나는 아니다. 물론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겠지만 너처럼 극과 극을 달릴 정도는 아니란 것을 알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사랑을 찾으러 왔다. 지나고 보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겠더라. 그때도 알았지만 젊은 남자의 에너지가 엉뚱하게 발산되어 내 인생을 꼬이게 할 줄은 몰랐거든. 결혼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지.

 

그것도 인정해 주마. 오늘은 꽃 선물도 해 오지 않았다. 여기로 오면서 꽃을 사 올까. 나답게 화려한 보석을 사 가지고 올까. 많은 고민을 했지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어. 그냥 오고 싶은 마음만 있었으니까. 널 보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거든. 낮 시간에 널 본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직 네 생각만 하다가 여기로 온 거야.”

“······.”

 

 

 

연수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석민의 강한 손가락에서 나오는 힘으로 인해 입술은 꼭 닫혀 있을 뿐이었다. 석민의 손이 강하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씩, 너한테 가고 싶어. 때론 용감하게 갈 수도 있겠지. 조금 전에 말했지. 사람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나처럼 제멋대로 사는 남자가 변하면 어느 정도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게 내 마음이다. 그 이유가 뭔지 아니? 두 번은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사랑!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고 싶겠지? 맞아. 그 감정,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 요즘처럼 급히 돌아가는 인스턴트 세태에서 사랑이 존재하기나 하는지 모르지만······ 하고 싶어. 그 사랑을 하고 싶어. 너하고. 윤연수라는 여자하고 사랑을 하고 싶어. 그게 내 마음이다.”

연수의 두 눈만 말똥거려 나갔다.

 

 

“내일은 두 걸음이 될 수도 있고, 또 정신이 오락가락 하면 뛸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널 포기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잘 자라.”

석민은 꼭 누르고 있던 입술을 이제야 놓아 주었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이석민 씨!”

연수가 불렀지만 석민은 뒤돌아서지 않은 채 신발을 신었으며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이석민 씨!”

 

연수가 다시 한 번 더 힘을 주면서 부르는 순간, 석민은 뒤돌아섰다. 뒤돌아서서 석민이 한 행동은 입가에 미소를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이 여자, 두렵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려는지 두렵고, 무서웠지만 지금은 웃어야만 할 거 같았다. 눈망울이 반짝거리는 것도, 입술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것도 다 보기에 좋았다. 윤연수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니까.

 

 

예전 같으면 무조건 밀고 나가는 남자가 이석민이란 남자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젠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것만 같았다.

 

 

“갈게. 잠이 부족한 거 같던데 더 자. 문단속도 잘 하는 거 잊지 말고. 이 집은 너무 좁아.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집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 거 같군.”

혼자 말을 하던 석민은 연수의 입에서 또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을 느꼈는지 얼른 문을 열고 나왔다. 밖으로 나왔을 때, 여름 날씨치고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벌써 가을 문턱에 도착한 모양이다. 낮에는 아직 늦더위로 인해 폭염 같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아침과 저녁은 선선한 바람이 한결 사람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윤연수, 잘 자라. 내일 만나자.”

 

 

 

석민은 뒤돌아 문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서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