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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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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달다1


BY 문해빈 2012-10-30

 

 

“원하신다면 말씀드리죠. 두 분, 이혼하세요. 아버지도 엄마를 사랑하지 않으시잖아요. 왜 자신을 속이세요? 언제까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회적인 관계 때문에 힘들게 사실 생각이세요? 엄마도 엄마지만 이젠 아버지도 진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사세요. 정말로 사랑하고 싶은 여자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도 해 보시구요.”

“······!”

 

 

 

뒤통수를 과감하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는지 인혁은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해 나가지 못했다. 과연 지금 이런 말들을 쏟아 놓고 있는 딸이 자신의 딸인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겨우 수습을 했고, 잘 매듭지었다. 그런데 이혼을 하라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진짜 사랑하고 싶은 여자와 사랑을 하라고 한다. 이게 말이 되는 것일까. 딸이 되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인혁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실어 의사전달을 하고 있는 딸의 얼굴을 그 역시 차가운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언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엄마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러는 건데? 어떻게 언니가 되어 이혼을 하라고 할 수가 있어?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말려야지.”

“너도 부정하지 마. 엄마와 아버지는 이혼을 하는 게 서로를 위해 좋아. 우리를 위해서도 좋고.”

 

“그건 언니 생각이야. 언니는 몰라도 나는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는 게 좋아. 나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야. 수능을 얼마두지 않은 입시생이란 말이야. 어떤 집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화들을 한다고 생각해? 다들 자식이 수험생이면 그저 자식만 걱정한다고 들었어. 그런데 우리 집은 이게 뭐야? 날 보고 대학을 가라는 거야? 가지 말라는 거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대학을 갈 수가 있겠어? 내가 만약에 대학을 가지 못한다던지, 이상한 대학에 가면 전부 우리 가족들 때문이야.”

 

 

 

혜수는 겨우 수습이 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이혼을 하라는 연수가 못마땅해 눈을 흘겼다.

 

 

 

“억지 부리지 마. 떼쓰지도 말고. 네 인생이야. 어느 누구를 원망 할 생각은 하지 마. 엄마도 사람이고, 여자다. 그러니까 엄마가 원하는 길로 가게 해 주자.”

“연수야!”

 

 

 

다른 사람들의 분노한 감정과는 달리 지영은 계속 연수라고만 불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떨고 있었다.

 

 

“이혼하고 엄마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 하고 싶은 거, 누리고 싶은 거, 다 해 봐. 그동안 우리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잖아. 이젠 다 놓고 실컷 해도 되잖아. 그러니까 이혼 해.”

“윤연수!”

 

 

인혁이 연수를 향해 고함을 지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 무겁게 변해갔지만 진작 연수만은 그런 인혁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너, 너 이 녀석! 감히 네가······.”

 

 

인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는지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로, 거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서재로 들어 간 인혁은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혜수는 혜수대로 화가 나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영도 연수를 쳐다보며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위해 가져 온 물만 비어 갈 동안 계속 마셔 갔다.

이혼을 하겠다고 했다. 화가 나서 이혼을 하겠다고 했고, 사랑받지 못해 이혼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무관심이 외로워 고함을 질렀고, 늘 일에 미쳐 사는 남자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사는 게 지쳐 관심을 가져 달라고 이혼이란 마지막 무기를 꺼냈다.

 

 

 

그 순간은 진심이었는지 모른다. 그 순간은 진짜 이혼하고 싶었으니까. 이 남자가 꼴도 보기 싫었으니까. 두 번 다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 집에 살지만 남보다 못하는 모습이었고, 그 흔한 포옹조차 하지 않은 얼굴로 서로의 필요성에 사는 것이 이젠 싫었기에 이혼을 하고 싶었다. 거기다가 정신적인 외도까지 하는 남자가 너무나 미워 최악의 감정은 다 드러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지나갔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 한 바탕 난리를 쳤듯이 이젠 이 집의 갑작스런 소나기도 멈춘 것이다. 미움은 남아있고, 그 여자와의 관계도 아직 정확히 정리되지 않은 것을 알지만 가정을 위해, 자식을 위해 또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정리를 해 주고 있는 인혁을 따르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이 나이에 쉽게 이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혼한다고 이혼했다면 한국의 모든 여자는 다 이혼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또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여자들일 것이다. 여자들의 인생이니까.

 

 

 

그런데 그 어렵고 힘든 이혼을 하라고 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딸이 하라는 말에 지영은 계속 침만 꼴깍거리며 삼키어 가고 있을 뿐이다.

“연······수야!”

“이혼이 끝은 아니야. 또 다른 시작이니까 두려워하지도 말고 날아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 가봐. 한 번 사는 인생이잖아. 그 인생을 언제까지 어둠 속에서 살 생각인데. 어디가 아픈 지도 모를 만큼 고통 속에서 사는 거 이젠 그만 해. 자신의 몸도 지켜줘야지.”

 

“······.”

“무서워. 이혼은······무서워.”

 

 

 

지영은 정말로 무서웠는지 입술을 깨물었다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만지기도 했다가 힘을 주어 잡아당기기도 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또한 손가락으로 돌돌 말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연수의 눈에는 지영의 손도, 눈빛도 다 불안해 보였다.

 

 

 

여자 나이 47살! 적은 나이는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어느 새 목과 눈 밑으로는 검은 그림자들이 줄을 치고 있는 게 보였기에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예쁘게 생긴 얼굴이 많이 상해 있다는 것도 같은 여자가 보기엔 안 되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왜 여자는 모든 것을 참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결혼! 도대체 결혼이 무엇일까. 결혼이란 제도가 무엇이길래 한 여자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면서 전혀 자신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일까.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다. 연수는 다른 여자들도 그러했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인 이지영이란 여자의 인생이 안 되어 보였다.

 

 

 

 

생긴 얼굴은 지금도 귀여운 면과 청순한 면을 지니고 있었지만 제대로 꾸미지 않은 얼굴은 이미 나이테가 많이 나 있었다.

“탐스럽던 머리카락도 엉망이네. 영양분이 다 빠졌구나. 마사지도, 요가도, 수영장도 몇 번이나 갔어?”

지영은 할 말이 없었다. 돈으로 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연수는 늘 회원권을 끊어 주었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끝까지 마무리를 짓는 게 없었다.

 

 

 

“미안! 이번 달에는 다른 것은 몰라도 수영장은 열심히 다니려고 했는데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 또 빠지게 되었네. 너도 알지. 엄마 친구인 영희 아줌마가 수술을 했거든. 거기에 간다고 가지 못했어.”

 

 

 

이것도 핑계였는지 모른다. 영희가 수술을 하고 병원에 갔지만 매일 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수영장에는 충분히 갈 수 있는 문제였다. 문화센터도, 마사지도. 다 빠지고 있었다.

“영희 아줌마, 수술했어?”

“응. 암이래. 신장 쪽에 문제가 생겨 대수술을 받았는데 아직 잘 몰라. 항암치료도 받아야 하고. 또 어떻게 진행되는지 경과도 지켜봐야 하고······.”

지영은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연수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지영의 얼굴을 이번에는 연수가 유심히 쳐다보았다.

 

 

 

“예쁘네. 넌 내가 진짜 이혼했으면 좋겠어?”

“엄마가 원하는 인생은 뭐야?”

“나도 몰라. 너희들을 보면 이 집에서 살고 싶은데 네 아빠인 저 남자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파. 몰라. 그것도 모르겠어. 이젠 가슴이 아픈 것인지, 어깨가 아픈 것인지, 배가 아픈 것인지. 어디가 아픈지 조차 모르겠어. 그냥 아파. 너무 아파. 내일 병원에 가봐야 할 거 같아. 그 병원, 유능한 의사들로 모여 있다고 하는데. 내 몸은 왜 자꾸 아픈지 모르겠네.”

“······.”

 

 

 

아프다고 한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다고 한다. 지금도 지영은 연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애써 침착함을 보이면서 생긋이 미소를 짓기도 하지만 가슴이 답답한 것인지, 아니면 아픈 것인지 모르지만 계속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 과일 주스 한 잔 만들어 줄까?”

“아니. 밤이 너무 늦었어. 이 시간에 주스를 마시기는 좀 그러네. 물 한 잔만 갖다 줄래?”

“알았어. 물만 필요한 거지? 영양제는 필요 없어?”“그것도 내일 먹을게. 지금은 물 한 잔이면 충분할 거 같은데. 물마시고 자고 싶어.”

연수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으로 향하면서 두 방을 쳐다보았다. 서재와 혜수 방이다. 두 사람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거실에서 두 여자의 속닥거림이 느껴질 텐데도 조용하기만 할 뿐이다. 아버지인 인혁은 그의 성격답게 책을 본다던지 회사 일에 대한 업무적인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혜수는 무엇을 할까. 조용한 것으로 봐서 자는 모양이다. 더운 날씨에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고생하는 것이 눈에 훤했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느껴져 왔다. 조금 전, 혜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언니가 되어 어떻게 이혼을 하라고 하느냐면서 그러고서도 언니가 맞느냐고 했다. 동생의 인생이 잘못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혼을 하겠다는 부모가 어디에 있느냐며 원망어린 눈빛을 보였다. 겨우 진정되어 가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언니라는 사람이 이혼을 하라고 했다며 신경질적인 반응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연수는 잠시 혜수 방을 보다가 주방으로 향했으며 시원한 물을 컵에 부어 들고 나와 지영에게 내밀었다.

“이거 다 마시고 자자. 나도 피곤해서 자고 싶어. 방송 녹화 마치고 집들이 갔다가 왔거든.”

“집들이!”

물을 단숨에 다 마신 지영이 연수를 쳐다보면서 집들이라고 했다.

 

 

 

“응. 함께 진행하는 이하란 연기자 집에 갔었어.”

“이하란 배우 집에 갔다 왔구나. 그 여자는 잘 살지? 나이는 우리와 비슷한데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더라.”

“부러워 할 거 없어. 엄마도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

“이혼을 했다고 하던데 정말로 잘 사는 거지? 배우들은 워낙 보여주는 인생들이 많아서.”

 

 

“정말로 잘 살아. 도시를 벗어나 근교에 집을 지었는데 진짜 멋있더라. 오늘 거기에서 자고 오려고 했는데 엄마 때문에 계획에 차질 생겼어.”

“방송 녹화는 잘 되어 가? 갑작스럽게 계획이 바뀌어 많이 바쁘다면서.”

“응. 바쁘긴 하지만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나름대로 할 만 해.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 녹화를 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일요일에 할 때도 있지만 내일과 일요일은 쉬어. 거기서 자고 내일 오려고 했는데 내가 쉬는 것을 알았는지 우리 집으로 부르네.”

 

 

“내일도 집에 있을 거니?”

“그러고 싶은데 어째 반기는 눈빛이 아닌 것으로 보여. 그냥 갈까?”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 내일도 자고 갈거니?”

“그러고 싶어. 여기서 푹 쉬고 일요일 오후쯤에 갈 생각이야. 엄마가 해 주는 요리도 먹고. 월요일에 깐깐한 남자를 만나러 가야 하거든.”

 

 

“깐깐한 남자? 누구?”

 

 

 

“그런 남자가 있어. 프로그램이 바뀌기 전에 이미 녹화를 찍었는데 진행자가 바뀌면서 다시 바꾸어야 하게 되었거든. 그로서는 더 이상 시간을 내는 것은 무리라며 거절을 하고 있어. 우리 쪽이 잘못을 했기 때문에 계속 사정을 하고 있는데 그쪽에서도 만만치 않아.”

“배우니?”

“아니. 일반인이지만 개성 있게 사는 남자. 배우들의 사는 모습만 보면 시청자들이 재미없어 하거든. 요즘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유별난 인생을 더 좋아해.”

“누군지 모르지만 잘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딸, 고생하지 않게 제발 고집을 꺾어야 할 텐데.”

“전화 통화를 했는데 조금은 감정이 가라앉은 거 같아.”

 

 

 

두 사람은 조금 전, 이혼에 대한 말을 하다가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여자는 알고 있었다. 다른 말들은 그저 전시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영은 지영대로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연수가 이혼을 하라는 말에 놀랐고, 연수는 연수대로 지영을 향해 이혼을 하라고 했지만 어떤 식으로 이혼을 시켜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이혼! 이혼을 하면 윤인혁이란 남자는 잘 살아갈 것으로 보였지만 진작 걱정되는 사람은 이지영이란 여자였다. 사회를 모르는 여자, 세상을 모르는 여자가 과연 혼자서 잘 살아 갈 수 있을까. 무턱대고 세상 밖으로 나가서 더 많은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닐까.

 

 

 

연수는 연수대로 고민이 되고 있었지만 두 사람, 이혼을 해야만 할 거 같았다.

 

 

 그게 서로를 위해 더 상처를 받지 않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늘 서로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관계, 이젠 그 모습조차 서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윤인혁은 여전히 그 여자와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며 이 가정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떤 불편함도 없을 것이니까. 아내라는 자리와 엄마라는 자리만 지켜주면 되니까. 사회생활 하는 남자, 더 많이 성장하고자 하는 남편의 출세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조강지처라는 자리만큼 튼튼한 것도 없으니까.

다른 여자를 가슴에 안고 살아도 외형적인 모습에서는 조강지처가 있어 주면 되는 것이니까. 너무나 이기적인 남자, 너무나 속물적인 남자였다.

 

 

 

“엄마!”

 

 

잠시 생각에 젖어 있던 연수가 엄마라며 다정히 불렀다.

“왜? 그런데 그 엄마라는 소리, 오늘따라 무척이나 정겹게 들린다.”

너무나 이성적인 딸이다. 엄마라는 소리도, 표정도 늘 이성과 사는 딸이었기에 조금은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이 딸이 제일 좋은 것은 의지가 되었으며 무조건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렀어? 평소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구나.”

“네가 좀 차갑긴 하잖아.”

“그랬구나.”

또 말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 빨리 해. 이혼도 하라고 하는데 다른 할 말도 있겠지.”

“아버지를 그냥 놓아 줘. 엄마도 더 이상 아프지 말고.”

“······.”

 

 

 

그 말이 그 말이다. 이혼은 헤어짐인데 그렇다면 놓아주는 것이 아닌가? 말도 고상하게도 한다. 얄밉게도 한다. 정말 얄미운 딸이다. 놓아주라니. 누가 잡았나? 오히려 잡혀 사는 사람은 자신이었는데. 얼마나 도망치고 싶은 삶이었는지 이 딸도 모를 것이다. 너 때문에 처음으로 발목이 잡혔고, 그래서 시작된 인생이라는 것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혼을 하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준비? 준비라고 할 게 뭐 있어? 위자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네 아버지 재산 없어.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지만 이 집이 전부이고, 그나마 작년까지 대출을 갚았으니까 빚은 없는 게 나에게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긴 드네.”

 

 

 

지영은 순간적으로 피식거리며 웃어 버렸다. 분가해서 이 집을 분양받고 죽으라고 빚을 갚아 나갔다. 옷도 사 입는 것을 포기했고, 맛있는 것을 사 먹는 것도 포기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세월을 보내면서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47살! 어중간한 나이가 되었다. 여자 혼자 홀로서기를 하기에도 두려운 나이였고, 뭐 하나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자꾸만 쓸쓸해지고 있었다.

 

 

 

혜수를 위해 이혼을 보류하려고 했는데 연수의 차갑고 단호한 말에 지영은 이혼을 결정해 나갔다. 연수의 끌림이라는 변명은 하기 싫었다.

혜수 때문에 잠시 흔들렸지만 이젠 확실해 져 가는 자신의 마음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자꾸 앞서는 것은 무슨 마음일까.

 

 

서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인혁의 그림자가 보였고, 또 무엇을 하는지 소리조차 나지 않는 혜수의 방도 신경이 쓰였다. 아직 이혼을 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저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러나 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장식장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는 여자는 되기 싫었기에 고개를 더 강력히 흔들어 나갔다.

 

 

“엄마, 학교에 다녀.”

“뭐?”

지영의 목소리가 커져 나감과 동시에 두 눈은 토끼의 눈보다 더 커져 있었다.

“이번 2학기부터 복학해. 내가 신청해 뒀어. 엄마는 날짜에 맞춰 수강신청하고 학교 분위기나 맞춰.”

“······!”

 

 

지영의 얼굴빛은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이······혼 하는 여자가 학교는 무슨? 그리고 내가 학교를 떠난 지가 언제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가능해. 그리고 이혼하는 거 하고, 학교를 다니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이혼은 이혼이고, 학교는 학교 일 뿐이지.”

지영은 도대체 연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학교를 떠났다. 바로 너, 윤연수라는 아이가 생겼기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조건 결혼을 했고, 학교를 떠났다.

자퇴서를 낸 것으로 기억이 났다.

 

 

 

“자퇴서 냈는데······.”

“아니야. 휴학계를 냈던 걸.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학교에 가 본 적이 없지. 처음엔 혹시 안 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요즘은 이런 경우가 허다하게 많은 모양이야. 쉽게 되더라.”

“······.”

지영은 계속 두 눈만 깜박거렸다.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학교 다녀.”

“윤연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피곤해. 잠을 자고 싶어.”

 

 

 

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천천히 걸어갔다. 지영은 연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불렀다.

 

 

 

“윤연수!”

“엄마도 자. 눈이 피곤해 보여. 푹 자고 나머지 얘기는 내일 하자. 내 방에 이불 있어? 여름이라도 나는 이불이 있어야 잠을 자는 거 알고 있잖아. 특히 배 부분은 꼭 덮어야 하거든. 아니면 배앓이 하는데.”

“배앓이! 그렇지. 넌 이불 없으면 배앓이를 하지. 잠시만 기다려. 방에 가서 이불 들고 올게.”

지영은 연거푸 하품을 하고 있는 연수를 쳐다보면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 옅은 꽃무늬가 그려진 핑크색 이불을 들고 와 연수 방으로 들어갔다.

“음, 사람이 없어도 꼭 생활을 하고 있는 거 같네.”

 

“매일 환기 시키잖아.”

“그래서 좋은 냄새가 나는 구나.”

 

 

연수는 지영이 침대에 두고 있는 이불을 보면서 옷들을 벗어 나갔다.

 

 

 

“씻어야지.”

“잠옷부터 갈아입고.”

“그래. 그렇게 해. 그런데 연수야, 학교 얘기는?”

“그 얘기는 내일하고 엄마도 가서 자. 이혼을 하려면 잠도 푹 자고, 건강부터 챙겨야지.”

“넌 내가 낳은 딸이 맞긴 하지만······.”

연수는 지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잘 자. 잠을 충분히 자면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자신감도 생겨. 그 나이의 여자는 잠이 보약이거든. 내일 아침에는 엄마표 된장찌개와 비빔밥이 먹고 싶어.”

“알았어. 해 줄게. 잘 자라.”

지영 역시 다른 말들이 하고 싶었지만 연수의 말대로 오늘은 말을 아껴야만 할 거 같았다. 뭐가 뭔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연수가 오고, 연수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마법처럼 움직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혼을 하라고 하는 딸, 그것도 어지러울 지경인데 학교로 가라고 했다.

 

 

 

학교로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학교를 떠난 지가 언제인데.

 

 

 

지영은 문고리에 손을 올리다 말고 뒤돌아섰다. 연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서는 헤어밴드로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리고 있었다. 뒷모습! 예쁘고 그 나이에 어울리는 몸이었다.

딸이지만 정말이지 예뻤으며 부럽기만 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나도 저런 몸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저 나이에는 몸 하나만으로도 자신감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끝없이 날아가고 있었는데.’

지영은 연수의 몸을 보면서 부러움으로 바라보다가 문고리를 열고서는 그 방을 나왔다. 연수 말대로 잠을 자야 할 거 같았다.

지영이 나가고 연수가 뒤돌아섰다. 지영은 끝없이 자신의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을 벽에 걸린 벽걸이 거울을 보면서 알고 있었다.

 

 

 

“엄마, 엄마도 여자잖아. 이젠 나이를 잊고, 아내라는 자리도, 엄마라는 무거운 이름도 내려놓고. 마음껏 날아 봐. 이혼을 하든, 계속 살든 그건 엄마 몫이잖아. 내가 이혼하라고 해서 속상하지. 내가 밉지? 남도 아닌 자식이 이혼을 하라고 해서 얄밉지? 엄마가 선택해. 그러나 이렇게 살지는 마. 그동안 이런 식으로 살아 온 것도 화가 나고 숨이 막혀 죽을 맛인데 앞으로도 또 계속 이런 식으로 살면 안 되는 거잖아. 엄마! 윤인혁이란 남자는 절대로 변하지 않아. 설령 그 여자하고 살림을 차려도 이혼은 절대 하지 않을 남자거든. 왠지 알지? 너무나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니까. 자신만이 전부니까.

 

 

그래서 엄마에게 다른 인생을 주고 싶어. 말로만 날지 말고 진짜 날아 가봐. 세상은 두렵지만 생각만큼 무서운 곳은 아니야. 엄마 나이에도 과감하게 뛰쳐나가 할 수 있는 게 많은 곳이야. 집이라는 울타리도 이젠 버려. 그래야만 하는 거야. 그게 이지영이란 여자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거든.”

 

 

 

 

연수는 지영이 남겨놓은 은은한 장미향을 맡으면서 침대로 향했다. 씻어야 하는데 그 힘도 없었다. 다행히 내일은 방송 녹화가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연수가 선택한 곳은 욕실이 아닌 침대였다.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는 욕실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몸은 먼저 침대로 향했으며 눈꺼풀이 감겨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