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방송 개편을 두고서부터 이미 말들이 많았다. 처음 선임자는 서른 후반을 넘긴 김동한 아나운서였다. 결혼도 했고, 한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에 주부들로부터 인기가 좋았다. 위로부터 모든 결정이 다 났지만 그것을 뒤엎은 사람은 이석민 아나운서였다. 어떤 힘을 가졌기에 입사 초년생이라면 초년생인 이 남자를 중요한 방송 시간에 주요 일인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한참이나 준비한 모든 것들을 다 새롭게 할 정도로 갈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많은 말들이 새어 나왔다. 집안이 대단하다, 능력이 워낙 월등하다, 누군가의 힘이 있다, 대단한 인물이다, 말씨가 특별할 정도로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평까지 나돌고 있었다. 간부들도 이미 인터넷을 떠돌면서 인정받고 있는 이석민 아나운서를 내세워 최고의 시청률을 만들라는 지시까지 내려 온 상태였기에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드라마든, 각종 프로그램이든 엎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어디 한 둘인가. 모든 것이 다 진행되어 금방 방송에 들어갈 것처럼 하다가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곳이 이 세계였다. 그 모습을 누구보다 많이 봐 온 그였다. 석민이 다가 서자, 연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영우는 그 모습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때, 하란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영우는 두 사람을 집중적으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연수야, 오늘 우리 집에 오는 거 잊지 않았지?” “······네.” “잊었구나.” 약간은 말을 더듬거리는 입 모양에서 벌써 알아버린 하란이 연수 앞으로 다가섰다. “이사를 한지는 좀 되었지만 이제야 집 구경을 시킬 수 있게 되었네. 아직 우리 방송이 안정을 찾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내가 볼 때, 이번 프로는 박 감독 말대로 즐겨야 할 거 같다. 시청률만 의존하면 먼저 지치는 사람들은 우리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서 오늘 시간을 만들었어.” 어제 말했던 것도 같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했기에 정확한 약속은 잡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미 약속이 된 모양이다. “혹시 다른 약속 있어? 그러면 다음으로 미루고.” “아닙니다. 다른 약속은 없어요.” “잘 되었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수가 빠지면 안 되거든.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 온다고 했어. 마침 내일이 토요일이라 시간들이 좋아서인지 조 연출자도, 카메라 감독도, 대본을 쓰는 작가도, 그리고 우리들의 얼굴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서 코디까지 온다고 했어. 우리가 돋보일 수 있도록 예쁘게 화장을 해 주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화장을 예쁘게 한다는 서 코디 얘기에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말았다. “내가 너무 설명식으로 얘기를 했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시간을 말씀 해 주시면 시간에 맞추어 갈게요. 그래도 명색이 첫 방문인데 화려한 장미꽃다발은 준비해야죠.” “그래. 다른 선물이라면 거절하겠지만 꽃은 거절하지 않을 거야. 꽃은 사랑스러우니까.” “저도 꽃 선물을 할 생각입니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석민이 고음과 중음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아나운서는 그 자체만으로 꽃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와요. 그것만으로 환영할 테니까.”“감사합니다.” “목소리도 너무 매력 있어요.” “감사합니다.” “진짜 얼굴과 목소리가 잘 어울려요.” 석민은 또 감사하단 말을 하려다가 말 대신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도 마음에 드네요. 박 감독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또 한 사람이 있군요. 남자의 웃음이 아름답다는 거 딱 한 사람에게서 느꼈는데······.” 하란이 연수만 쳐다보고 있는 영우를 바라보았다. “너무 표시 낸다. 그렇게 연수가 좋아?” “아닙니다.” “아니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 걸. 아마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딱 한 사람만 모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딱 한 사람? 한 사람이란 말에 석민이 연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수야, 이제 그만 튕기고 받아 줘라. 이만한 사랑, 없다. 이 정도로 성실하고 착한 남자도 없어.” “선생님, 그건 몰라요. 남자들은 사랑을 할 때는 다 착해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듯이 여자에게 잘 해 주지만 막상 살아봐야만 그 정확성을 알 수 있대요.” “······!” 언제 들어왔는지 서 코디가 참견에 나서기 시작했다. 말이 많은 여자,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탈도 많다는 것이다. 서 코디가 네 사람 곁으로 다가서자, 순간적으로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소문은 바람처럼, 계절처럼 떠돌아다니면서 거대한 산을 만든다. 소문은 언제나 무성한 숲처럼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심어졌다가, 뿌리 채 뽑혀져 나가기도 하는 것이기에 누군가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한 사람이라도 입을 다문다면 그 소문은 그 자리서는 더 자라지 않으니까. 영우의 마음이 워낙 지극정성이라 연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구체적으로 나돌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드러 내놓고 사귄다는 말은 그녀도 할 수가 없었다. 연수를 바라보는 영우의 눈빛이 너무나 강렬하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분장실에 수시로 들락거리면서도 연수만을 향하는 한 남자의 애틋한 눈동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봐 왔기에 그녀도 참견이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란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들었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사실이자 진실이었으니까. 하란이 말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그렇지. 사랑을 할 때는 다 착하지.” “그럼요. 사랑할 때 착하지 않은 남자는 없어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남자는 살아보지 않으면 모른다구요. 연애는 1년 아니라 10년을 해도 다 모른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서 코디는 연애 경험이 많은 모양이구나. 나보다 더 잘 안다.” “주위에서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니세요?” 서 코디가 연수와 영우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그 순간, 석민이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영우를 향했다. 하란의 말대로 멍한 듯한 표정을 지나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정말인 모양이다. 연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아 보였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영우도 그러했지만 부정도, 긍정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 연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사람, 정말 사귀는 사이세요?” 석민은 최대한 감정을 조절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아나운서님은 아직 모르겠구나. 두 사람, 아직 공식적인 커플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저 정도 열정을 보이는데 목석처럼 반응이 없다면······.” “서 코디도 우리 집에 올 거야?” 하란이 말을 끊었다. 잠시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그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어 말 많고 탈 많은 서 코디가 들어오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저도 참석해야죠. 제가 참석하지 않으면 재미없잖아요. 모두 조용한 사람들 뿐이잖아요” 하란은 웃어 버렸다. 무슨 말을 더 할 것인가. 어리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철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시간 맞추어 와. 선물도 잊지 말고 준비해서 오고. 빈손으로 오는 거 싫거든.” “마사지 선물은 어떠세요? 꽃이나 다른 부수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 준비 해 올 거니까 시간을 주신다면 특수요법으로 3년 정도 젊어지는 마사지를 해 드릴 게요.” “3년이라, 1년만 젊어 보이는 것도 좋으니까 마사지 선물 꼭 해야 한다.” “네.” 하란은 연수를 향해 미안한 눈빛을 지었다. 잠시 동안 농담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또 어쩌면 두 사람의 연결선을 이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 모두 그녀가 아끼는 후배들이었다. 영우는 영우대로, 연수는 연수대로. “잠시 후에 만나자. 나는 드라마 촬영이 있어서 찍고 갈게.” “눈 화장, 다시 해 드릴 게요. 지워졌어요.” “아니야. 여기선 주연급이지만 거기선 그냥 중년 여자일 뿐이야. 가난한 집의 맏며느리 역할이거든.” 가난한 집의 맏며느리가 무슨 화장을 화려하게 할 수 있겠냐는 눈빛을 지어 보였다. “그렇구나.” 서 코디가 하란을 쳐다보다가 반쯤 화장이 지워진 연수를 쳐다보면서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어색해 보였다. “또 지웠네요. 내가 해 주는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방송을 하고 나면 지우는 것이 습관인 걸요.” 연수는 이제야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되었다. 석민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또 하란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 자신의 현 상황을 잊고 있었다. 거기에 톡톡 튀는 서 코디까지 가담하면서 자신의 얼굴이 어떠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윤 아나운서님도 화장을 지우니까 그렇게 예쁘다는 것을 모르겠어요. 눈도 보기보다 초롱초롱해 보이지 않고, 입술 색깔도 많이 칙칙해 보여요.” “······.”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지 않다, 입술도 칙칙해 보인다.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참 얄밉게도 말을 하는 여자다.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작 상황들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두 마디에 동시동작으로 연수를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석민과 영우였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동시에 연수를 향해 눈동자를 돌렸다. 눈매를 쳐다보았다가, 립스틱이 반 이상 지워진 입술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 시간들은 아주 짧았다. 시선이 마주쳤다가, 눈동자를 돌렸다가.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다시 한 곳으로 모여지기 시작했으며 그 시선들은······ 머무는 시선들은······ 길게만 느껴졌다. 부담을 느낄 정도로.
****** -언니! 연수언니! -왜 그러니? 목소리가 왜 그래?
잘 다듬어진 전원주택에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차와 과일을 먹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찍혀 나온 발신자의 번호는 혜수였다. 연수는 혜수임을 알고서 해바라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고 있었지만 혜수는 몇 번이나 연수라고 불렀으며 언니임을 확인해 나갔다. 지금 혜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으며 유리가 깨어 질 정도로 듣기 싫은 소리였기에 연수는 혜수라고 불렀다. -혜수야, 언니야. 왜 그러니? 무슨 일 있어?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했을까. 이제야 연수의 목소리를 확인했는지 혜수의 음성이 조금은 내려갔다. -언니가 맞구나. 연수언니구나. -그래. 언니야. 설마하니 언니 목소리를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 있어? -응. 있어. 엄마가 많이 아파. -엄마! 엄마가······ 어디가 아픈데? 이번에는 연수의 목소리가 감정을 따라 튀어 올랐다. 엄마! 이지영!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엄마라는 그 말 한마디에도 언제나 가슴이 시려오고 아픔이 느껴져 왔다. 그 엄마가 아프다고 했다. 아프면 안 되는 여자다. 아파서도 안 되는 여자다. 연수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나갔다. -많이 아파. 쓰러졌어. 쓰러졌다는 말에 연수가 다리를 휘청거려 나갔다. 머리가 핑 돌아 가는 느낌이 들었기에 옆에 세워져 있는 해바라기 잎들을 잡았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돌아오기 위함이었다. 저 앞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나갔다. 늘 이성에 힘을 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지영이란 여자의 일에 있어서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것도 쓰러져 병원에 있다고 했으니까. -어느 병원이니? -집에 왔어. -집? 집이라고 했니? -두 시간 전에 집에 왔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아파 쓰려졌다고 했는데 병원이 아닌 집에 와 있다고 했다. 점점 의문과 궁금증에 사로잡혀 가기 시작한 연수가 지금 바로 집으로 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끄고서는 뒤돌아섰다. 뒤돌아 선 곳에 영우가 서 있었다. “무슨 일 있구나.” 영우는 조 연출자가 건네는 와인을 마시다가 뭔지 모르지만 불안해하는 입술과 눈빛을 보고선 가까이 다가 왔던 것이다. 아직 해를 바라볼 정도로 크지 않은 작은 해바라기 잎들에 힘을 싣는 것도 이상했고, 다리에 힘이 빠져 가는 것도 걱정이 되어 뒤에 서 있었지만 얘기에 열중한다고 한 사람의 인기척을 알지 못했다. 그 사이에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충 얘기는 듣고 있었다. “네. 집에 일이 있다고 해서.” “그러면 가 봐야지.”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여긴 차가 없어. 데려다 줄게.” “혼자 가겠어요. 모처럼 즐거운 기분을 저 때문에 망치는 것도 미안해지고 있는데 선배까지 따라 나오면······.” “가자. 그나마 다행이다. 이 와인, 어떻게 할까 고민했거든. 만약에 이 잔에 채워진 와인을 다 마셨다면 널 데려다 줄 수는 없었겠지. 그런데 마시지 않았어. 겨우 입가를 젖게는 했지만. 가서 얘기를 하고 가자.” 영우는 연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러나 잡은 것은 손이 아니라 힘없이 당하고 있는 해바라기의 잎들이었다. 몇 개를 잡았는지 연수 손에 꼭 잡혀 있었다. 숨도 쉬지 못하고 놓아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해바라기가 아직 어리구나.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군요.” 커다란 해바라기였다면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있었겠지만 지금의 작은 해바라기들은 빳빳하게 고개를 든 채 자라나고 있었다.
영우와 연수가 다가오자 하란은 손님들과 와인을 마시다가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지었다. “집에 일이 있어 가 봐야겠어요.” “급한 일이구나.” 하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연수가 가야 한다면 예기치 않은 일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서, 몸에서 이미 다 보여 주고 있었기에 하란은 가라고 했다. 석민도 고개를 돌렸다. 아직 신입이라면 신입인지라 중요한 사람들과 밥도 먹고, 술도 한 잔 하면서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자리를 올리고 싶었다. 누군가를 밀어내고 들어왔다는 소리, 그 소리들······. 뒷소문들이 얼마나 요란한지 그도 알고 있었기에 실력만으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여유분들을 다 만들고 촬영들을 해 놓았는데 갑자기 앞부분들은 다 취소되고 새롭게 시작됨으로 거의 생방송 수준이었다. 다급하게 편집하고, 다급하게 캐스팅을 하고. 그러다보니 밤을 지새우는 일은 허다했으며 가끔 화면에 실수처럼 보이는 장면들도 나가고 있었다. 그 화살은 언제나 석민의 몫이었다. 석민은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현 상태로 방송되는 평은 나쁘지 않았다. 여자들을 위한, 여자들이 우세인 방송이라 그런지 여자 아나운서인 연수보다는 석민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석민은 그것을 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세계, 방송의 생태계를 알고 있기에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가야 할 길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뿐이다. 여기로 와서 식사를 하고, 담화를 나누면서 방송에서만 비쳐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인간 이석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점점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야만 했다. 그 일차적인 사람이 영우였으며 그 옆으로 줄지어져 있는 조 연출자를 시작으로 해서 하란이 불러들인 사람들과는 무조건 웃음으로 담소를 나누고 가볍게 와인을 마시고 있을 무렵에 연수가 전화기를 들고 정원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전원의 여름밤은 시골스럽기도 하고, 낭만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드는 기술이 있는 것이 확실했는지 모른다. 여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아이처럼 동화되어 갔으며 옹기종기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으로 인해 힘든 것도 오늘 밤에는 다 용서가 되는 모양이다. 처음 식사를 할 때만 해도 몇몇 사람들은 이건 완전히 생방송이다, 캐스팅에 어려움이 너무 많다, 이런 식으로 가면 타 방송에 밀린다, 지금 잠시 비슷하게 나온 시청률로는 안심할 수 없다, 등등의 말로 석민의 기를 죽이려는 분위기로 나가고 있었지만 또 한 쪽에서는 이 아나운서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며 칭찬으로 이어지자 하란은 도우미를 시켜 각종 술이란 술은 다 들고 오게 했다. 그녀는 어느 편에도 서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지금 방송되는 이 프로가 잘 되는 거, 즐기면서 끝까지 마무리를 짓는 것이었다. 이왕 만난 사람들이라면 인연이었기에 이 인연을 소중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가장 강했기에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 시간들이 연수의 전화 받는 시간과 같이 이어져 있었기에 석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여기저기서 권하는 술만 받아 마시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시시각각으로 연수를 향하고 있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연수의 눈빛이 달라졌고, 하는 행동들이 무슨 일이 있어 보여 걱정스런 마음에 가서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계속 권하는 술만 열심히 마시고 있었을 뿐이다. 그 사이에 영우가 연수 곁에 서서 이런 저런 얘기와 함께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챙기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어떤 사이일까? 주위에서 떠도는 것처럼 진짜 연인인가? 석민은 가까이 다가 와 집에 일이 있어 가야 한다는 연수를 쳐다보다가 영우에게로 눈길이 향했다. 그의 손에는 이미 차 키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어서 가 봐.” 하란은 어서 빨리 두 사람을 보내고 싶었다. “무슨 일인데 연수 얼굴이 혼비백산인 게야?” 카메라 감독인 진철이 연수를 향해 묻자 연수는 죄송한 마음을 표한다는 인사만 거듭할 뿐이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대요.” 하란이 대변인처럼 말을 받아 주었다. “어머니가? 그렇다면 빨리 가 봐야지. 그런데 연수는 차가 없잖아. 여긴 시내와 떨어져 있어 어떻게 가려고?”“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옆에 운전자 서 있잖아요.” “누구? 박 감독?”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영우에게로 향하자 석민도 다시 한 번 눈이 모아졌다. “좌우지간 지극정성이다. 한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혼자 오매불망 짝사랑이라니. 이 녀석아, 잡으려면 확실히 잡던지 그게 뭐냐? 미적거리면서 매일 바라만 보고 있다니.” 카메라 감독은 영우가 안 되어 보였는지 혀를 끌끌거리며 차고 있었지만 석민의 눈동자는 조용히 보고만 있을 뿐이다. “데려주고 오겠습니다. 오늘 밤을 지새울 거죠?” “당연하지. 내일이 토요일이고, 모처럼의 휴가인데 마음껏 놀아야지. 다음 주부터는 밤낮없이 뛰어야 한다. 초대된 사람들도 겹쳐져 있고, 또 시간에 맞추려면 끝없이 녹화방송을 해야 할 거다. 오늘과 내일은 즐겁게 지내야지. 빨리 다녀와. 연수도 어머니 상황이 괜찮으면 돌아오고.”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수가 다시 한 번 인사를 하다가 석민과 눈이 마주쳤다. 이 집에 온 후로는 아직까지 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두 사람만이 만날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저 밥을 먹으면서도, 차를 마시면서도 공적인 대화에만 참석을 했다. 방송의 어려움, 잠시 몇 분의 화려함을 보이기 위해 뒤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들을 하는 지에 대한 어려움만 토해 내고 있었다. 그들은, 석민과 연수는 그들의 말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웃음으로 받아 들였다. 지금도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눈으로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어렵다면 어려운 사람이다, 절대적으로 편할 수만은 없는 남자였기에 연수는 최대한 조심성을 보이면서 눈으로 인사를 하고서는 영우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의 쾌유를 빕니다.” “······.” 석민의 말이 바람처럼,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처럼 연수의 귓가를 맴돌게 했다. 잠시 연수가 뒤돌아 석민을 쳐다보며 감사하다는 표시를 보였지만 영우의 시동 켜는 소리에 얼른 문 밖으로 나갔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석민은 또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앞에 놓여 진 와인을 숨을 쉴 틈도 없이 단숨에 마셨다. 입 안으로 들어 간 붉은 와인이 오늘처럼 강렬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술과 저 술이 섞여 몸 안으로 들어왔기에 벌써 취해갔는지도 모른다. 어지간하면 술이란 녀석에게는 지는 법이 없었는데 지금은 취할 것도 같은 마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석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석민, 시간을 기다려. 때론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이긴다는 거 알고 있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저 자리, 곧 이석민의 자리가 될 거니까. 기다리자. 지금도 기다렸는 걸. 윤연수! 조금만 기다려라. 너에게 곧 가마.’ “이 아나운서, 술을 잘 마시는군. 내 술도 한 잔 받지.” 하란이 석민을 향해 와인 병을 들었다. “독하디 독한 양주란 녀석을 데리고 올까? 보기보다 술이 센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는 걸.” “여기 전망이 너무 좋아 그런지 어떤 술을 마셔도 쉽게 취할 거 같지 않습니다. 지금은 들고 계시는 와인을 주십시오.” “그러지.” 하란은 와인을 따르면서 석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매력 있는 얼굴임에는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왔을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졌나? 아니면 땅에서 솟아났나? 느닷없이 이 프로그램에 진행자로 왔다. 인사를 하고 간단한 소개를 했지만 연예인을 해도 충분히 계산이 나올 정도로 어디하나 흐트러져 있는 게 없었다. “재수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냐며 석민이 하란을 쳐다보았다. “나이로 보았을 때, 바로 입사를 하지는 않았던 거 같고.” “이 방송국이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첫 응시에 바로 합격했다는 말씀이세요?” 대본을 쓰고 있는 정 작가가 아는 척을 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와, 진짜 능력자다. 요즘 언론고시라고 할 정도로 경쟁률이 엄청나다고 하던데.” “그건 그러네. 진짜 한 번에 입사를 했다면 그 능력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하란은 석민이 따라주는 와인을 마시면서도 석민을 유심히 보고만 있을 뿐이다. “애인 있으세요?” 석민은 정 작가의 말에 그저 입가에 미소만 지을 뿐이다. “왜? 애인이 없으면 정 작가가 도전해 보게?” “나쁠 거 없죠. 요즘은 여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거든요. 얌전히 있다가는 다 뺏겨요. 오히려 이 아나운서처럼 겉보기에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가 오히려 애인은 없거든요. 맞죠?” “맞습니다. 애인······없습니다.” “봐요. 제 말이 맞죠. 그럴 줄 알았어.” 정 작가는 마치 무엇인가를 얻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입을 환히 벌리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여자는 있습니다.” “······그 말은?” 정 작가의 표정이 한 순간에 일그러져 갔다. “말 그대로 혼자 좋아하고 있습니다.” “보기보다 재미없는 남자네. 그건 가장 할 것이 되지 못하는데.” 하란도 의외라는 듯 석민을 다른 각도로 쳐다보면서 웃었다. 생각을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시적인 남자의 분위기를 가졌으며 숱한 여자들과 어울렸을 거 같은 색채들이 든 남자로 보였는데 전혀 예상을 벗어나자 그녀로서도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정 작가는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아무튼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석민을 향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란도, 카메라 감독인 진철도 조용히 웃을 뿐이다. “처음엔 자네란 사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왠지 정이 가고, 점점 마음에 들 거 같군. 술도 잘 마시고, 일도 잘 하고. 그리고······ 남들의 예상을 깨고 엉뚱한 사랑을 하고 있는 점도 순박해 보이고.” “감독님, 그건 순박한 것이 아니죠. 짝사랑은 좀 그런데요?” “그래도 나는 이런 사랑이 좋더라. 요즘은 너무 들이대는 게 문제야. 좋으면 미친 듯이 좋아 날뛰고, 싫으면 무 자르는 것보다 더 과감히 자르고선 돌아서는 거.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짝사랑은 외롭잖아요. 혼자 하는 사랑이 얼마나 힘들고 슬픈데. 그거 모르세요? 그건 감독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거기에 내 얘기는 왜 들어가는 거야?” “경험자이니까요. 첫사랑한테 과감하게 버림받으셨잖아요. 혼자 하는 사랑, 혼자 좋아한 사랑을 또다시 만났지만······.” “남의 아픈 과거사는 왜 꺼내는지.” 진철은 옆 테이블에 놓여 진 갈비를 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갈비가 아니라 독한 술이 필요할 거 같은데. 아직 그 사랑을 잊지 못해 혼자 살고 있다는 거 얘기해도 되는 거죠?” 진철은 하란을 향해 눈을 흘기었지만 그 모습은 꼭 소년처럼 보였다. 작업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완벽하고 철두철미한 남자가 지금은 어린 아이 같았으며 하란의 말대로 그 사랑을 잊지 못해 혼자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또 다른 남자의 옆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저 남자도 혼자 하는 사랑을 하고 있구나, 마흔을 훨씬 넘기고 곧 오십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직 저런 순애보를 지니고 있구나. 석민은 열심히 갈비를 뜯고 있는 진철을 보다가, 언제 그 옆으로 다가 섰는지 정 작가도 합류해서 열심히 먹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정 작가란 여자도 대본을 쓸 때와 지금의 모습은 달랐다. 물론 자신을 향해 던진 말들이 다 농담이란 것도. 이 여자, 이하란은 어떤 여자일까. 어떤 여자이길래 여유와 풍미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일까. 도시를 벗어난 이곳에 많은 사람들을 불러 들였으며 그들은 당연한 듯이 왔다. 하는 행동들을 봐서는 한두 번 모인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대로, 나이많은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편안함으로 즐기고 있었다. 밥을 먹고서는 각자의 취향대로 흩어져 있는 것도 이색적이었는지 모른다. 이미 다른 방에서는 카드놀이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젊은 여자들은 와인과 더불어 정원으로 나와 시골과 도시의 경계점에서 낭만을 누리고 있었다. “혼자 하는 사랑, 오래 하지는 말아요. 너무 오래하다 보면 영혼까지 망가질 수 있거든요. 누군지 모르지만 고백해요.” “······.” 석민은 웃기만 할 뿐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랑이 윤연수라고 말할 수없는 자신의 심정을 누가 알까? “그 웃음에 아직 한 여자도 빠져 오지 않았어요? 하란은 보조개가 살짝 들어갈 듯한 모습이 예뻐 보였는지 수박 주스를 건네었다. “수박 주스예요. 오늘 이 사람, 저 사람이 건네는 술을 많이 마셨죠? 거절도 하지 못하고. 이 자리, 어려웠죠? 그러나 다음부터는 오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편해지고 조금씩 이 아나운서의 자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 무서운 여자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꽤 뚫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생각은, 그 마음은 처음 자신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이 자리서 자신의 자리를 찾겠노라. 조금씩 이석민이란 남자의 내면성을 보이겠다고. 그런데······ 이 여자가 읽고 있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수박 주스를 좋아합니다. 수박을 먹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 이유는 씨 때문에.” 석민은 또 다시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하란은 계속 듣기만 할 뿐이다. 지금은 무조건 이 남자의 말을 들어 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스는 맛도 있고, 또 단숨에 먹을 수 있어 편한 거 같아 잘 마시는 주스입니다.” “그건 나하고 똑같네요. 나도 수박을 좋아하지만 씨는 싫어하거든요. 일일이 씨를 가려 내 뱉어 내어야 하고. 그러다보면 진작 수박의 맛은 느끼지도 못하고. 그래서 차라리 주스를 갈아 얼음을 띄워 마시기 시작했어요.” “저도 얼음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얼음을 넣으면 맛도 한층 더 느낄 수 있고, 속도 시원해 지니까요.” “한 잔 더 만들어 줄까요?” 벌써 빈 잔이 되어 가고 있는 석민을 향한 하란의 배려였다.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그럼 조금있다가 한 잔 더 만들어 줄게요. 술이 좀 깨는 거 같죠?” “제가 취해 있는 거 알고 계셨군요.”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아나운서에게 오늘의 이 자리는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었을 거라고. 그러나 곧 익숙해지고, 편안해 질 거라고. 혀가 꼬여 들 정도로 취하진 않았지만 취했어요. 물을 많이 마셔요. 이제부터는 술을 권하지 않을 거예요. 자신들의 놀이에 열중한다고 정신이 없을 거니까요. 술이 깨고 나면 카드놀이에도 참석하고, 또 라면도 같이 먹어요. 그러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긴장하면서 방송을 하지는 않아도 될 겁니다.” “······.” 이 여자,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자칫 생각에 따라서는 꼭 이석민이란 남자를 위한 모임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연예인이나 아나운서나 그저 얻는 것은 없어요.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잠시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거 잊지 말아요.”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하셨습니까?” 하란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매운탕을 준비해야 할 거 같군요. 가사 도우미도 이젠 집으로 돌아갔기에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해야 하는데 혹시 도와 줄 마음이 있으면 도와줘요. 매운탕도 만들어야 하고, 또 라면도 끓여야 하고. 또······ 술도 조금은 더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은데······.” “술은 이미 다 깼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얻은 것은 없어요. 우린 함께 즐기었을 뿐이에요. 오늘도, 또 다음에도.” 하란이 현관으로 향해 걷고 있자, 석민도 그녀 뒤를 따라 나섰다. 테이블에서 여전히 열심히 갈비를 뜯는 두 사람, 정원을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고 있는 서 코디와 보조 작가, 그리고 안에서는 카드놀이에 열중해 있는 조 연출자를 비롯해서 그들의 팀들이 간혹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그들은 여기에 없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이유로 여길 떠나버린 자신의 옛날 애인이자 이젠 혼자만의 사랑이 되어버린 윤연수도 없고, 그녀를 드러내놓고 좋아한다는 표시를 내고 있는 박영우도 없다. ‘박영우, 당신은 안 돼. 저 여자는 내 여자다. 예전의 단 한 번 실수로 놓쳐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여자...... 곧 찾을 거야. 짝사랑! 짝사랑은 나도 원하지 않아. 내 사전에 그런 단어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