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용한 거실에 찻잔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그러나 설은 자신을 가만히 살피듯 유심히 보는 신여사의 눈길을 임 알고 있었다.
애써 담담하려 했으나 몹시 긴장되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을 아는 준수가 양미간을 좁히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신호를 신여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신여사는 무시했다.
[그래...서로 알고 지낸지 오래 되었다고 들었어. 하지만 아가씨 얘기를 들은 건 최근이야. 저 놈이 내가 알면 어찌할까봐 아주 꽁꽁 숨겨 놓았겠지]
나무라듯 섭섭한듯 신여사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눈을 들어 신여사를 보았다.
매처럼 날카롭고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준수의 눈빛을 보는 것 같았다.
[과장이십니다]
준수가 툭. 던지자 째려보듯 신여사가 준수를 한번 보았다.
[그래...형제는 어찌 되누?]
[네. 대학생인 남동생이 한명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이모.. 이렇게 같이 살고 있어요]
[음...대충 준수에게 듣기는 했다만 내 아들놈땜에 학교를 관두게 생겼다며?]
[아니에요!]
신여사의 말에 즉각, 설은 부인했다.
[아녜요. 준수씨 잘못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건 저의...불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설은 준수를 보며 한번 웃어주었다.
[그리고 비록...학교로 돌아가지는 못해도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 그만둔것은 아니에요. 대학때 장애우학교에 함께 봉사활동을 다닌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졸업후에도 그쪽에서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가 언제든 저를 받아준다고 하길래 가볼까...하고 있습니다]
[장애우...학교?]
[네에...대학때 수화를 배워두었길래...그곳...아이들을 가르쳐볼까 해요]
[내겐 말하지 않은것 같은데?]
준수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설은 그런 준수에게 또한번 밝게 웃어보였다.
[조만간 얘길하려고 했어요.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라서...제가 그곳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싫어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준수는 미소지며 고개를 저었다.
싫다니...감히 그런 생각을 한 그녀가 오히려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좌절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보면 씩씩하게 일어서 있고 아무것도 못할것 같아 보이면서도 뭐든 척척 알아서 하니...!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헝컬었다.
[싫긴...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그렇게 살아도 돼. 난 언제나 네 편이다. 잊지마]
[고마워요]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신여사의 입이 벌어졌다. 기가 찼다.
아들놈은 다른 사람의 존재따윈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자를 바라볼때면 180도 달라지는 눈빛이라니...!
여자는 어떤가.
준수를 볼때면 다른 모든 건 잊고 오롯이 준수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어이도없고 질투도 나고 섭섭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신여사는 체념한듯 한숨을 내쉬었다.
신여사는 생각해 본다. 자신이 준수에게 섭섭해 할 자격이나 있는지...
사업에 매달리느라 아들들은 부모보다 가정부나 가정교사와 더 오랜 시간들을 보냈으니...
그렇다고 신여사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래서 무엇하나 부러운것없이 키우고 물려주기위해 일을 해오지 않았던가.
휴....!
그래도...그래도 며느리에 대한 욕심은 어쩔수 없나 보다.
현수의 결혼 실패와 그로인해 사고까지 나, 죽음의 문턱에 까지 간 현수를 보면서 많은 걸 깨닫고 버렸다.
아들들의 결혼이나 사생활만큼은 간섭하지 말자고...
하긴... 자신의 바램이 현수에게는 어느정도 먹힐지 몰라도 준수에게는 어림도 없다는 걸 신여사는 안다.
그래도...그래도...일반 학교도 아니고....
[그래...뭐, 다른 거 할줄아는 건 없고?]
아쉬운 마음에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준수가 또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으나 신여사는 이번에도 생~깠다.
[제가...다른 재주같은게 없어요. 다만...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일본어와 중국어를 배워두었습니다. 영어도 부전공이라 제법 하구요. 그래서 그 쪽으로 통역이든 번역일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일어? 중국어?...잘 하니?]
[네에. 저, 잘해요]
신여사의 물음에 설은 생긋이 웃으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음....]
신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아가씨가 의외네...보기엔 약하고 여린 느낌인데 차분하면서도 밝고 당차면서도 자신감도 제법이고 당돌하군...
2.
신여사와 현수가 별다른 일없이 돌아가고 준수는 설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나왔다.
눈이 녹지 않은 거리를 나와 두 사람은 한적한 절을 찾았다.
[절은 겨울에 와도 고즈넉하고 훈훈한 것 같아요]
겨울산에 둘러싸인 산사를 빙 둘러보며 그녀가 말했다.
[이런 것도 알아요?]
의외하는듯 그녀가 준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준수가 피식 웃었다.
[여긴...답답할때 내가 한번씩 오는 곳이야. 그냥...조용히 앉아있다 가곤했어]
[그랬군요...]
하면서 그녀는 가만히 준수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준수는 더 꼭 쥐었다.
그렇게 손을 잡고 두 사람은 말없이 산사를 한바퀴 돌았다.
스님의 목탁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는 게 자장가 같기도 했다.
[학교...미련없어?]
내려오면서 준수가 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없다면...그건 거짓말이고...하지만 자꾸만 미련을 가지면...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미련두지 않으려구요. 그대신...]
그녀가 갑자기 그의 앞을 막고 서더니 웃었다.
[그대신 당신을 얻었잖아요]
뎅... 머리속에서 종이 울려퍼졌다. 준수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며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찬 입술을 따스하게 보듬어 주었다.
그는 그녀의 밝음이 좋았다.
그녀의 웃음이 좋았다.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좋았다.
그의 입술이 더 많은 걸 바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의 전화기다.
[여보세요?]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흘깃, 준수를 보고는 몸을 돌렸다.
준수가 미간을 찡그렸다.
[안녕...응.....괜찮아, 시간돼.....그래, 시간맞춰 나갈게.....]
[무슨 전화지?]
그녀가 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물었다.
[지원이예요]
[한지원?]
그의 음성이 날카롭게 울렸다.
[네에...만나자고 하네요. 만나줘야겠죠? ]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날필요가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참는다.
[지원이 사표, 아직 그대로죠?]
[한지원 사표...너에게 달렸지만 내게 있어 한지원은 아웃이다. 알아둬. 한지원은 더이상 내 비서가 될수는 없어]
[알아요. 하지만 해고하지는 말아줘요. 그럴수있죠?]
그에게 메달리며 그녀가 말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거머쥐며 걸었다.
[추우니깐 걸어...오늘 만나나?]
3.
쇼핑몰센타 안에서 설은 먼저와서 자신을 기다리는 지원을 만났다.
청바지에 부츠를 신고 긴 코트를 걸친 지원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여전히 서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지원을 설은 엷은 미소를 띄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조용한 ...곳이 좋겠지?]
지원의 말이다.
두 사람은 쇼핑몰 뒤쪽 사람들 발길이 뜸한 벤치를 찾아 앉았다.
달랑 자판기 한대가 있을뿐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설이 커피를 뽑았다.
말없이 둘은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설은 지원이 먼저 입을 열때가지 기다렸다.
지원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가 다니는 ...학교에 갔었어. 교장선생님이 나오신다는 날에 맞추어서...]
머뭇거리며 어색하게 내뱉는 지원의 말에 설은 놀란 눈으로 지원을 보았다.
지원은 시선을 유리문 너머 바깥에 두고 있었다.
코웃음도 아니고 비웃음도 아닌 자조적인 듯한 웃음을 흘리며 지원은 입을 열었다.
[그래. 나 그동안 생각많이 했어. 아무리 네가 밉다고 해도...맞아. 네 인생까지 망칠 자격이 내겐 없다는 생각을 했어. 교장선생님께 내가 그 메일을 보냈고 순간적인 질투심에 거짓 투고를 했다고 말씀드렸어. 그리고 네가 잔 남자...그러니깐 사장님과 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어]
[정말...이니?]
[하지만 거기까지야. 내가 한 짓...내 손으로 마무리지었을 뿐이야]
[지원아...]
[동정따위 하지마!]
지원은 차갑게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여전히...너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