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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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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잠들어다오 -3-


BY 데미안 2012-02-29

 

1.

저녁 9시쯤 ...

설은 기차역에 내렸다.

무거운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던 설은 다시 그 장소에서 내렸다.

후회도... 미련따위도 없었다.

단지 담담했다.

꽁꽁 묶어 두었던  짐보따리를 풀어 버리고 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차를 타면서 설은 전화를 했다.

집으로 전화를 했을 땐 유마담이 받았다.

반가워하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런 음성이었다.

그리고 준수에게도 했다.

 

설은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려놓으면서 시작한 여행에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주는 원동력이 되는 큰 힘을 얻었다.

그건...사랑이었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가슴 벅차고 행복할 수 있는지...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비록 외기러기, 짝사랑이지만 설은 상관하지 않았다.

받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니깐...

그래서 설은 웃을 수 있었다.

[너...윤설이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계단 끝을 오른 그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무심코 돌아본 순간 설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위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맞구나]

정장을 빼 입은 남자 둘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싸늘한 눈빛으로 설은 두 남자를  노려보았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짙은 회색의 정장을 입은 나이든 남자는 날카로워 보였다.

뒤로 빗어 넘긴 머리며 풍채며...어디를 보나 성공을 달리는 남자의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이냐?  하마터면 몰라 볼 뻔 했어...]

하면서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설의 위아래를 재빠르게 훑었다.

[어릴때도 예뻤지만...이렇게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있을줄이야]

허허 웃는 남자를 보며 설은 입을 꽉 다물었다.

충격이 분노로 바뀌었다.

[그래, 어머니는 잘 계시겠지?]

[그건...아저씨께서  궁금해 하실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뻔뻔하신 분이군요]

설은 차갑게,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투로 대꾸했다.

남자는 여유롭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 말이야...지금은 바빠서 그냥 가야겠지만 어머니께 전해 드려. 조만간 한번 들리겠다고...]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남자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려 보이고는 차갑게 등을 돌렸다.

[가자, 진호야]

 

진호는 반가웠다.

그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내며 설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설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오랜...만이지? 정말...아가씨가 다 되었네...]

그의 아버지 말대로 설은 아름다웠다. 그래서 가슴이 설레었다.

[설아...!]

조용하고 반가운 그의 말투는 관심없다는 듯 설은 진호를 한번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진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순간적으로 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한대 쳐 올렸다.

짝.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힐끔 보았으나 설은 상관하지 않았다.

[지옥에나 떨어져...]

토해내듯 설은 진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냉정하게 내뱉았다. 진호는 그녀를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진호야!]

나이든 남자가 경고하듯 딱딱한 어조로 진호를 불렀다.

[오빠...! 아니, 박진호씨 아버님께도 전해요. 지옥에 떨어질거라고]

[지금은 그냥 갈게...하지만 다시 만나게 될거야]

[그건 박진호씨 생각일 뿐이야]

설은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 두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 있었다.

그들이 더이상 보이지 않자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설은 비틀거렸고 그 순간, 언제 왔는지 준수가 얼른 그녀를 안았다.

 

2.

사실 처음부터 상황을 모두 지켜본 준수였다.

멀찌기 떨어져 그녀가 오는 걸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분노로 몸을 떨던 그녀.

차갑게 두 남자를 대하던 그녀.

긴장이 풀려 쓰러질 것 같은 그녀.

준수는 그녀를 끌어안다 시피 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 타는 순간까지도 멍한 상태의 그녀였다.

혀를 차며 준수는 두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는 자신을 보게 했다.

초점이 없는 눈이었다.

그가 살짝 그녀의 뺨을 때렸다.

[정신차려, 윤설]

효과가 있는지 설은 눈을 깜빡이더니 가만히 준수를 바라보았다.

[뭐야...무슨 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니, 주욱 죽...흘러 내리고 있었다.

급기야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고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말없이 준수는 그런 그녀를 꼭 끌어당겨 안았다.

다시는 울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는 그녀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리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다.

[그 자군...네 집안을 박살낸 장본인...]

확신하는 어조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숨을 토해내며 준수는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웬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으랴...

준수는 그녀를 가슴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눈물 범벅의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울지마...속상하겠지. 분노도 일겠지. 지옥불에 밀어 넣고 싶기도 하겠지만 ...울지마]

[...미...미안해요...]

준수는 손수 그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리고 헝컬어진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무엇이? 어린애마냥 엉엉 소리내어 운 거?  내 옷을 눈물로 적셔 놓은 거?]

눈썹을 치켜 세우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설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제야 부끄러운지  몸을 바로 하면서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 젊은 남자는...아들?]

[네에...오빠 오빠 하면서  찬하게 지냈어요...다른 사람도 아닌...그토록 친하게 지낸 사람들한테 배신을 당했으니...]

설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눈앞에 서 있어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화도 나고 ...]

[그래서 울었다?]

[...그런가봐요]

부꾸러움을 미소로 대신 하는 설을 보며 준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안전밸트를 매어 주고는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더이상의 생각 따위는  접어두고 집에 가서 푹 자는게 좋을 것 같군...]

 

3.

설은 웃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유마담이 환한 얼굴로 그녀를 안았다.

[엄마는 주무셔...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니? 올라가...오늘은 쉬고 얘기는 내일 해. 알았지?]

유마담은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씻고 자리에 누웠으나 설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외국으로 떴다던 진호와 진호 아버지를 만났다.

너무나 거만하고 당당한 그 모습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도 생각났다.

보고싶어졌다.

설은 모로 돌아 누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

준수의 말대로 생각을 접고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