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로부터 도망치다 (3)
박동석은 민주의 소재를 알려준 그 여자가 상세하게 그려 준 약도대로 어렵지 않게 민주가 세 들어 산다는 아파트를 찾아냈다. 그리고 민주가 클럽의 일을 끝내고 돌아온다는 시각이 대략 새벽 1, 2시쯤이라는 걸 감안하여 그 아파트 근처의 편의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나와 대충 허기를 메우며 아파트 입구 근처를 서성거리며 그녀를 기다렸다고 했다.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가에 7층 건물 한 동으로 달랑 만들어져 있는 그 아파트는 지은 지 아마 수십 년은 됨직한 낡고 우중한 건물이었는데 드문드문 드나드는 사람들의 행색으로 보건데 아주 하류층의 일본사람들과 우리나라의 유학생들, 그리고 민주처럼 일본에 건너와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들이 주로 세 들어 사는 곳이 아닌가 짐작이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날따라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이리저리 남의 집 추녀 밑으로 비를 피해가며 민주를 기다리길 몇 시간여... 민주처럼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들인 듯싶은 짙은 화장의 젊은 한국 여자들이 혼자 또는 두 셋이서 같이 타고 온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로 급히 뛰어 들어가는 것을 몇 차례 지켜보며 이제나저제나 민주가 돌아 올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반 새벽 2시가 다된 시간에 술에 만취한 채 비틀거리며 택시에서 내린 민주를 박동석은 기어코 만나게 되었다.
민주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절함 때문에 그동안 가슴 속 깊이 뭉쳐져 있었던 어떤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잠시 머뭇하고 있었던 그는 이내 두 눈이 튀어나올 듯한 상황을 그만 목도하고 말았다.
택시요금을 계산하느라 그랬는지 좀 뒤늦게 따라 내린 한 남자... 4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그 남자가 비틀거리고 서 있는 민주를 급히 부축하며
‘어이, 몇 층이야? 그냥 호텔로 가자니까, 뭐야 이런 후진데 까지...’
하는 소리를 짜증스럽게 뱉어내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날 민주의 술자리 손님 중 한 사람이었을 그 남자는 한국 사람이었다.
박동석은 기가 막히면서도 금방 상황이 파악되었다. 그 남자는 술자리에 이어 아마 몇 푼의 돈으로 민주에게 잠자리까지를 요구했었거나 아니면 술에 만취해 이런저런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되는 상태의 민주를, 호스티스들이 흔히 쓰는 속된 말로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찐드기를 붙어’ 그녀의 아파트까지 따라왔을 것이라는...
박동석은 아파트 입구로 민주를 부축해 끌고 다가오는 그 남자의 앞을 불쑥 가로막고 나서 다짜고짜 그로부터 그녀를 가로채 부축하며 ‘민주야, 민주야 정신 차려!’하고 그런 일이 매일 있는 일처럼 그 남자의 존재를 아예 무시한 채 일부러 더 크게 소리쳤다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박동석의 등장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아마도 박동석을 민주의 기둥서방쯤으로 판단했는지 이내 혼잣소리로 투덜거리며 꽁무니를 빼고 사라졌다.
박동석은 자신의 존재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민주를 부축해 3층에 있는 그녀의 방문 앞까지 간신히 끌고 올라갔고 그녀의 핸드백에서 방 열쇠를 찾아 내 겨우 문을 따고 들어가 방안에 이미 펴있었던 이부자리에 그녀를 눕히고서는 그 방안의 협소함과 이런저런 살림살이에 그만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일본사람들이 사는 집은 대개 비좁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지만 명색이 아파트라고 이름 붙은 그 건물의 방이 그렇게 비좁을 줄은 전혀 상상 밖이었다고 했다.
복도로 난 방문을 따고 들어서자마자 겨우 두어 평 남짓한 다다미를 깐 방이 하나 중간 문도 없이 바로 있었고 그 방 한 귀퉁이로 기역자로 꺾어져 한 사람이 간신히 서서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에 반토막짜리 싱크대와 그 위에 덜렁 놓여진 작은 가스렌지, 그리고 우리나라 같았으면 사무실 등에서 음료수병 정도나 넣어 두고 쓰는, 정말 코딱지만한 냉장고가 부엌살림이라고 있는 전부였으며 그 안 쪽으로 화장실 겸 욕실이라고 딸려 있는 곳엔 변기 하나와 세면대 하나에 샤워 꼭지 하나 달랑인, 정말 체격이라도 좀 큰 남자라면 선 채로 샤워하는 데는 물론 변기에 앉아 볼 일을 보는 것조차 불편할 만큼 비좁았다.
민주가 오후에 클럽에 나가면서 이부자리를 펴놓은 채였던 듯한 방엔 작은 앉은뱅이 화장대
하나가 살림의 전부였는데 이부자리를 펴고 나면 뭔가 더 이상의 가구가 있었더라도 놓을 만한 공간조차도 되지 않아 보였다.
방 한 쪽 벽에 붙박이장인 듯 보이는 문이 있어 열어보니 그 안은 그나마 한쪽 짜리 옷장 하나 크기 정도의 공간이 돼 옷이며 이불과 이런 저런 잡동사니들을 수납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거기에 민주의 그리 많지 않은 외출복이며 홀복(Hall服) 따위들이 걸려 있었고 작은 상자 두어 개에 되는대로 넣어 둔 속옷나부랭이들, 그리고 항공사 딱지가 아직 붙어있는 커다란 여행가방 하나와 핸드백이 몇 개 썰렁하니 들어 있을 뿐이었다.
방과 주방, 욕실의 공간을 다 따져보아도 겨우 세 평이나 될까 말까한 민주의 그 아파트는 그동안 혼자 사는 총각의 몸으로 서울에서 이런저런 변두리 단독 주택들의 셋방살이를 거쳤고 아예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원룸이라는 데에도 여러 번 세 들어 살아본 박동석으로서도 이렇게 비좁은 곳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아니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그런 형편없는 곳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인구는 많고 땅은 좁다보니 서민들은 겨우 이런 코딱지만한 주거공간에도 감지덕지하고 사는 가 보다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었고 그동안 강남의 호스티스들에게서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그녀들이 농반진반으로 툭하면 입에 올리던 ‘일본에 가서 돈 좀 벌어올까.’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녀들이 일본에 가면 뭔가 대단한 대우라도 받으며 돈을 벌 수 있는가 보다하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자신에 대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가 클럽으로 출근하면서 아예 개어놓지 않아 그냥 펼쳐져 있었던 이부자리에 입은 옷도 벗기지 못한 그녀를 뉘어둔 채 방안의 이런저런 모습을 둘러보며 잠시 기가 막혀하고 있던 박동석에게 더 기가 막힐 일이 그 다음에 또 벌어졌다.
민주가 갑갑해 할 것 같아 이불을 한편에 치워주고 요 위에 그냥 엎어져 정신없이 잠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측은한 상념에 젖어있던 박동석에게 그녀의 아랫도리부근이 천천히 물기에 젖어드는 것이 보였던 것이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싸고 있었던 것이다.
박동석으로서는 미처 손써볼 겨를도 없이 그녀의 스커트와 그 아래 요가 흠씬 오줌에 젖어 들었다. 그 기막힌 상황 앞에서 박동석은 민주가 알콜 중독 상태로 거의 망가져 있는 상태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고 했다.
박동석은 그렇게 한참을 눈물짓다가 그녀의 옷을 벗기고 한 쪽에 치워두었던 이불을 새로 깔아 옮겨 누이고 젖은 요를 수건으로 찍어 여러 번 훔쳐낸 후 창문틀에 널어 두고서야 겨우 그 전날 한잠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운 채 새벽부터 공항에 나가 토오쿄오행 첫 비행기를 타고서부터 그때까지 계속 긴장해 있었던 심신의 피곤함을 못 이겨 방 한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고 했다.
박동석이 눈을 뜬 건 아침 여덟시 무렵이었다고 했다.
민주가 그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퍼뜩 잠이 깼는데, 민주는 잠에서 깨고 좀 되었는지 이미 옷을 챙겨 입고 있었고 창문에 널어두었던 젖은 요며 이불도 이미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져 있는 상태였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동석씨가 여기 왜 있어요?!’
박동석의 눈이 뜨여지자마자 민주는 그렇게 다그쳐물었고, 그녀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했을 박동석의 등장에 놀라워하고 있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박동석은 솔직하게 자초지종을 말했고 금방 대강의 상황이 파악된 듯한 민주가 겉으로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짜증이 나는 듯 그에게 면박조로 투덜거렸지만 내심 반가운 감정도 없지는 않아 보였다고 했다.
거기다 박동석이 느닷없이 속주머니에서 꺼내든 지갑에서 서울에서 이미 일본 돈으로 환전해 일만 엔짜리 수십 장으로 부피를 줄여 온 수 백만 원의 돈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려고 하자 그녀는 한참을 그 돈과 박동석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어이없어 하더니 기어코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섧게 울기 시작했다.
그들의 1년 여 만의 해후는 마치 드라마처럼(박동석의 표현이었지만 듣고 있던 나로서도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극적인 재회였다) 그렇게 이뤄졌고 박동석과 그녀의 관계는 급속하게 가까워져 그녀가 얼마 후 귀국을 하면서 동거하는 사이로 이어진 것이었다.
민주는 그때도 박동석의 그 돈을 결코 받지 않았다지만 아마도 그가 보여준 그녀에 대한 그 꾸밈없는 마음씀씀이에 적잖이 감동했었던 것 같았고 그것이 그 얼마 후 일본에서 돌아 온 그녀가 박동석과 동거생활에 들어가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내게 판단되었다.
민주는 일본에서 지내는 1년여 동안, 그녀와 같이 일하고 있다 나와 그녀의 소식을 전해준 여자의 말처럼 완전히 망가진 여자가 되고 말았다.
박동석이 그때 토오쿄오의 민주 아파트에서 2박 3일을 민주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 여자들이 일본의 유흥가로 흘러들어가 겪는 보편적인 이야기인 한편 민주만의 서글픈 인생역정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질곡으로 빠져드는 계기가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이기도 했다.
민주는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서울에서 이미 적잖은 선불을 받은 상태라 토오쿄오의 클럽에서는 거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민주는 이미 받은 선불을 메꿔놓느라 항상 허덕거려야 했었고 그녀를 더 절망적인 상태로 만들어 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그 클럽의 엉뚱한 근무조건이었다.
그건 한달에 최소 두 번 이상은 클럽에서 지정한 손님과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한다는 강제 규정이었다.
그런 규정이 일본에 있는 클럽들의 일반적인 규정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민주가 선불을 당겨 받은, 주로 한국 아가씨들을 호스티스로 두고 있는 그 클럽에서나 그 주변의 클럽들은 모두 그런 식의 규정을 두고 있었고 그 규정은 거기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는 한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아주 엄격한 그런 규정이었다고 했다.
물론 서울에서 호스티스 생활을 하면서 손님들과 하기 싫은 잠자리의 경험도 적지 않았던 민주였지만 그 클럽에서의 그런 강제된 의무에는 몸서리를 쳤다고 했다.
클럽에서 강제로 정해주는 잠자리의 상대인 손님들은 어떤 면에서 정상적이지 못한 남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를 테면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 웬만큼 돈을 풀지 않고서는 잠자리 상대를 해줄 호스티스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변태적인 행위 때문에 아가씨들이 기피하는 손님들 등으로 말이다.
거기다 한국 여자 호스티스들이 많은 탓인지 한국에서 이런 저런 일로 일본에 왔다가 한번 씩 들르는 한국 남자 손님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에게서는 한국에서와는 또 다른 모욕적인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도 그녀가 참아내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였었다고 했다.
이를테면 외국에 까지 나와 호스티스를 하고 있는 동족인 그녀들이 그 사람들 눈에 결코 좋아 보일 수 없었을 탓으로 한국의 술집에서 그녀들을 상대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날 밤 아파트 앞에서 민주를 기다리다 박동석이 보았던 현장도 바로 그런 한국 남자 손님들의 행태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민주는 그렇게 사창가의 매춘부나 다름없이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수밖에 없었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차츰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동석이 그녀를 만났을 때쯤엔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잠자는 시간 외엔 거의 술병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알콜 중독자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