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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8/ 그녀로부터 도망치다(2)


BY 盧哥而 2005-11-02

 

그녀로부터 도망치다 (2)




박동석은 자신이 민주와 잠시 동거했었던 상황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시기는 5, 6년여 전 쯤으로 그녀가 일본에서 1년여를 지내다 나온 직후였다고 했다.

아내의 의뢰를 받았던 심부름센터의 조사보고서에서 보았던 내용 중에 민주가 처음 일본에 가 있다가 나온 다음의 일 같았다.

민주는 당시 토오쿄오의 한 클럽에서 호스티스로 일을 하다 나왔는데 박동석은 그녀가 그때 왜 일본에 까지 가서 호스티스 노릇을 해야 했고 어떻게 귀국을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소상히 말해주었다.


박동석은 민주의 첫 일본행에 대해 말하기 전, 그가 말한 대로 그와 그녀가 그 눈 오는 밤의 운명적인 조우 이래로 어떻게 가까워 졌는지를 잠시 먼저 설명했다.

그는 민주를 그 눈 오는 밤에 길에서 만나 집에까지 데려다 준 후 그녀에 대한 사랑이 움텄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박동석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술집 호스티스와 그 술집을 매일 들러 노래 반주를 하는 떠돌이 악사였던 둘은 그 뒤로도 자주 얼굴을 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었는데 그날 밤의 신세라도 갚듯 민주는 그가 반주를 하러 자신이 있는 룸에 들어 온 날이면 손님들이 후한 팁을 그에게 내주도록 번번이 애를 써주는 식으로 고마움을 표시했고, 손님이 없는 날엔 그와 술집 근처의 포장마차나 야식집 같은 데도 흔쾌히 따라 나와 주어 밤참이나 소주도 같이 먹고 마셔주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됐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가며 박동석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남몰래 키웠지만 민주에게 감히 그런 마음을 털어놓거나 할 입장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동석에게 그녀는 강남의 최고급 룸싸롱에서 제일 인기 있는 호스티스로 뜨내기 악사인 자신의 주제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의 여자로만 느껴졌었기에...


그렇게 2, 3년여 간의 세월을 다시 흘려보내며 민주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를 짝사랑하던 그에게 어느 날 민주를 품에 안아보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날은 무슨 일인지 초저녁부터 혼자 술에 취해 룸에도 들어가지 않고 대기실에 틀어박혀 있던 민주가 막 일을 끝내고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려는 박동석에게 같이 술 좀 마셔달라고 떼를 부리듯 제의를 해오는 바람에 그는 다음 술집에서의 일을 포기하고 민주의 손에 이끌려 근처의 다른 술집에서 그녀의 술상대가 되었고 그날 밤 민주와 같이 자게 되는 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민주는 그날 술이 엉망으로 취해있었으면서도 또렷한 말로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걸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오늘밤 그가 자신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박동석으로서는 마치 꿈만 같은 그 제의를 마다할 일이 없어 그동안 오매불망 사모해왔던 그녀를 그날 밤 그예 품에 안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꿈인 듯 생시인 듯싶게, 미처 그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기도 전인 그 며칠 후 민주는 강남에서 자취를 감췄고 얼마 후 그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소문을 다른 동료 호스티스들의 입을 통해 들었다고 했다.


민주가 겉으로는 잘나가는 호스티스였지만 사실은 실속 없는 여자였다는 것을 그가 안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고 박동석이 힘주어 말했다.

박동석은 나로선 전혀 알 수 없는, 그저 보통 사람으로 상식적인 선에서 밖에 알 수 없는 술집 호스티스들,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보태 내 이해를 도왔다.

그건 바로 내가 의아해 하고 있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민주의 헤펐다는 남자관계들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었다.

박동석은 자기가 10년도 넘게 유흥가를 맴돌며 본 바로 호스티스들이 술집에서 돈을 잘 번다는 것은 백 명에 하나, 천 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일이라고 단언하면서 그곳에도 어김없이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고 또 그것은 유흥가의 교묘한 착취구조이기도 하다고 말해주었다.

민주가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장안의 한다하는 남자들에게 인기 있었던 호스티스였으면서도 돈을 모을 수 없었던 사정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민주가 멋모르고 유흥가로 뛰어 든 처음 2, 3년 동안은 술자리에서 받은 팁과 소위 ‘2차’라는 걸 나가 받은 돈을 온전히 제 수입으로 잡을 수 있어, 비록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직업이었지만 어느 정도 자기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챙길 수 있어 견딜만했었으나 그 이후의 사정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고 했다.

소위 ‘마담’(처음엔 ‘새끼 마담’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던가?)이라는 감투가 그녀의 머리 위에 얹혀지면서 그녀의 밑에 달린 아가씨들의 관리와 매상관리는 물론 외상에 대한 수금 책임까지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때 오래 전 어느 주간지에서 얼핏 보았던 기사 한토막이 갑자기 생각났다. 강남의 유흥가에서 잘나가는 마담들이 수천만 원은 보통이고 심지어 억대가 넘는 돈을 받으며 스카우트된다는... 그때는 무심히 흘려 보았던 그 기사를 다시 생각해내며 박동석의 말을 들으니 그 유흥가의 운영체계가 내게 좀 쉽게 이해되었다.

술집을 운영하는 업주 입장에서 그만한 돈을 들이고 그녀들을 스카우트 하는 데에는 단순히 매상을 올린다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그녀들과 냉정한 계약관계를 맺어 매출도 올리는 한편 외상 수금에 대한 철저한 책임 전가로 업주로서는 절대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영업 전략이 아닌가 싶었다.

결국 그런 영업체계에서는 영악스럽다든가 수완이 뛰어난 여자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리며 이곳저곳의 술집들에서 거액을 받으며 스카우트도 돼가지만 그렇지 못한 여자들로서는 죽어라 일해서 업주 좋은 일만 시키며 자신을 망가뜨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흔히 쓰는 말로 제 할 탓인 ‘복불복’이랄 수도 있지만 적자만이 살아남는 냉엄한 ‘정글의 법칙’이기도 했다.


어쨌든 민주는 자의반 타의반 그런 위치에 서게 됐고 영악스럽지 못한 그녀는 그때부터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속 빈 강정의 신세로 전락해 갔다는 것이다.

박동석의 말로, 민주는 오래지 않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입금액(자신이 책임진 술자리의 외상매출)을 채우기 위해 그전까지는 웬만해선 2차라는 걸 피했던 그녀가 이젠 별 수 없이 몸뚱이까지 내던지며 수금하는데 전전긍긍해야 했고(여기서 박동석은, 있는 놈들이 더 더럽고 추하게 군다며 소위 ‘진상을 죽인다’는 유흥가의 은어로 통하는 치사한 남자손님들에 대해 한참을 흥분하며 욕설을 뱉어냈다) 기어코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적잖은 액수의 선불을 제시하며 일본에서 클럽 호스티스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하자 덜컥 그 권유를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민주는 그렇게 선불을 받아 일본행을 결정해 놓고 몸담고 있던 술집에서의 신상정리를 조용히 끝낸 다음, 그러니까 일본으로 떠나기 며칠 전 쯤 박동석과 잠자리를 같이 해 준 것이었다.

박동석의 말로, 그때 민주는 어쩌면 이 땅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자기에게 그 ‘하룻밤’을 선물해 주고 갈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민주가 일본으로 떠난 후 박동석은 한동안 그나마 떠돌이 악사의 일마저 그만두고 쉴 만큼 심한 가슴앓이를 했었다고 했다.

그전에 이따금씩 민주와 술자리를 가졌을 때마다 깊은 속내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녀가 지나가듯 했던 말들에서 민주가 뭇 남자손님들에게 당한 일들에 대해 진저리를 치던 모습들이 그의 머리 속에 수없이 떠올랐고, 그 영악하지 못하고 착하기만 한 그녀가 이제는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에서 조차 또다시 그런 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그로선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일들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동석의 입장에서 그녀를 도와 줄 수 있는, 그녀를 그 지경에서 구해낼 수 있는 다른 뾰족한 방도도 없는 터라 혼자만의 가슴앓이로 끝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시 유흥가의 떠돌이 악사 일을 시작하고 이제 민주에 대해 어느 정도 잊어가고 있던 박동석에게 또다시 그 ‘운명적인 사건’이 터진 건 민주가 일본으로 떠난 지 1년여가 다 되는 시점이었다.


박동석은 자신이 반주하러 순례하던 어느 술집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한 호스티스에게서 뜻밖에 민주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민주가 일본에서 알콜 중독으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망가져 있다는 이야기였다.

누군가 민주가 있는 토오쿄오의 같은 클럽에서 일하다 나온 여자가 민주를 알고 있던 그 호스티스에게 알려준 사실이었다.

박동석은 그만 눈이 뒤집히게 미칠 듯한 심정으로 그길로 단박에 일본에서 민주와 같이 일했다는 여자를 물어 찾아가 만나 그 이야기가 사실인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로 여권 신청을 했고 며칠 후 여권이 나오자마자 자신의 몇 푼 안 되는 예금을 다 털고 친한 몇 사람에게 간신히 빌려 모아 만든 수백만 원 정도의 돈을 들고 급한 대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와 같이 있다 나왔다는 여자가 세세히 가르쳐 주고 메모해준 것에만 의존해 전철을 몇 번 씩이나 갈아타며 그가 겨우겨우 토오쿄오 시내의 민주가 묵고 있던 코딱지만한 아파트를 찾아 갔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박동석은 그 자리에 그만 털퍽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민주의 모습과 맞닥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