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드러나다 (3)
나는 잠시 아내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민주의 남자관계에 대한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2, 30대 한창인 나이에 술집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의 과거사에 대해 나는 그동안 그저 내가 아는 상식적인 선에서 추측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속된말로 한 인물 하는 여자인데다 심성마저 여린 여자였으므로 자의든 타의든 뭇 남자들에 의해 때를 많이 탔을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그러면서도 민주에게 내가 더없이 정이 갔었던 것은 뭐랄까, 그녀의 과거를 그녀의 불행하고 어쩔 수 없는 숙명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관대하게 치부해버린, 하여간 그건 그녀로서도 불가항력적이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아두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나의 그런 상식적인 선에서의 추측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런데서 조사를 맡아 하고 그 보고서를 쓴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인간적인 자질로 보아 그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거기 적힌 내용대로라면 민주의 남자관계는 화려했고 상대한 남자들 또한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20대에 상대한 남자들로는 당시 모모한 국영기업체의 사장, 국내 굴지의 대기업 이사, 잘나가는 중견 연예인 등 4, 50대 장년의 나이로 흔히 우리 사회에서 성공했다거나 출세했다고 할 만한 사람들부터 중소기업의 창업자 겸 사장으로 재계에 떠오르는 별로 여러 번 매스컴을 탔던 30대 초반의 벤처 사업가와 재벌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막강한 사업체를 몇 개씩 가진 기업가 집안의 아들 이름 등, 나 같이 평범한 사람까지도 알만한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민주가 화류계의 여자로서 상품가치가 좀 떨어졌다 싶은 30대 초반 이후에 상대한 남자들도 그리 만만한 남자들이 아니었다. 민주가 마음만 먹으면 최소한 강남에 대형 아파트나 이름 있는 상가의 쓸만한 점포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사 줄 수 있는 졸부들이었다니까...
그런데 민주는 당시 자기에게 목을 맸던 그 잘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변변하게 실속을 못 차린 것으로 돼 있었다. 그 이유로는 엉뚱하게도 민주의 헤픈 남자관계를 들고 있었다. 그래서 ‘한 밑천’ 뚝 떼어 받을 수도 있는 그런 남자들을 죄 놓치고(이야기를 전해 준 여자들의 표현대로 ‘잘나갈 때 남자들 관리를 잘못해’...) 급기야 민주는 수년전부터 싸구려 술집을 전전했고 결국에는 70이 다 된 일본 노인의 현지처 노릇까지 하는 신세로 전락했었던 것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나는 그 보고서의 내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알고 또 내가 생각했던 민주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진 내용으로 판단될 뿐이었다. 그런 걸 조사했다는 사람의 자질과 또 민주에 대해서 자기가 잘 안답시고 이야기를 해줬을 사람들, 그러니까 민주와 어느 시점에서 같은 술집에서 일을 했었거나 또는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에서 민주를 지켜봤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여자들의 말이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느냐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일견 수긍이 가는 내용 또한 없지 않았다. 민주가 여자로서 한창 피어올랐던 20대 때였다면 장안의 한다하는 호색가들에겐 탐나는 먹이거리임에 틀림없을 테였고 그녀가 몸담고 있었을 당시 고급술집들에서는 쓸만한 상품으로 민주를 최대한 내세워 매상을 올리려 했을 것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라는 점이...
그러나 그렇게 잘나갔던 민주가(화류계 여성으로서의 인기) 실속을 못 챙긴 이유로 든 ‘헤픈 남자관계’에 대해선 나는 전혀 수긍이 가지 않았다. 물론 엊그제 박미숙의 입을 통해 들었던 민주가 ‘칸타타’ 운영에 실패한 이유에서도 손님들과의 헤픈 남자관계 때문이라는 공통점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그 부분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도, 아니 이해할 수도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생각되었다.
그건 내 짐작으로 민주 주변의 여자들이, 어쨌든 자기들보다 월등한 외모나 어떤 인간적인 면에서의 차별성이 시샘을 불러왔고 거기서 비롯된 악의적인 평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당신같이 순진한데다 외곬인 사람이 넋 빼놓고 푹 빠져들 만한 조건을 고루 갖춘 여자 같은 데...’
아내가 이젠 비웃음까지 얹어 내게 다시 던진 말이었다.
폐부를 콱 찌르는 아내의 그런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내는 내가 어떤 대응을, 도대체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 가가 잔뜩 기대가 된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점에서 달리 아내에게 아무런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그 차갑고 비웃음 띤 시선을 감당하지 못해 눈을 질끈 감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아내 앞에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이혼 해줘?’
기어코 아내의 입에서 이혼이란 말이 떨어졌다.
그런데 그 결정의 주체를 내게 미뤄버린, 나로서는 대답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으로...
‘당신만큼이나 당신을 정말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던데...’
나는 다시 또 한번 놀랐다. 아내가 민주를 직접 만났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처 들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의 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분노의 불꽃들이 금방 수많은 비수로 변해 내게 날아와 꽂힐 것 같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지금 당장 이혼해 줄 수도 있어... 그 여자가 당신을 다시 받아줄 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만났어?’
나는 간신히 입을 떼 아내에게 물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나는 아내가 민주를 어떻게 처음 알았고 또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가 궁금했다.
‘당신은 절대 바람피울 수 없는 남자야. 그렇게 허술하게 행동하는 데 눈치 못 챌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하고 아내가 간단하게 그동안의 핵심적인 과정을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남의 이야기처럼 말해주었다.
아내가 나의 행동이 어딘지 수상쩍다고 느낀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였다고 한다.
그건 내가 민주를 거의 처음 만났던 시점부터였었다. 아내는 단지 나에 대한 믿음으로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도 그런 일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빌었다고 했다.
그러던 차 결정적으로 꼬리를 잡은 것은 아내의 대학 동창,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창의 제보를, 한 다리 건너 좀 친했던 다른 동창을 통해 전해 들어서였다고 했다.
그건 내가 민주와 양품점 인수계약을 하러갔던 날 그 양품점에 손님으로 있었던 아내 또래의 두 중년 여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내의 동창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 여자였지만 그녀는 몇 년 전 아내의 대학 과(科) 동기들의 부부들이 많이 모였던 어떤 행사에서 나를 보았던 일을 기억해 냈고 그 사실을 아내와 친한 다른 동창에게 긴가민가한 일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확인하게 해보라며 친절(?)하게도 알려줬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러지 않아도 내게 혹시나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런 제보를 들은 이상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고, 최초의 제보와 그걸 다시 직접 전해준 동창들에게는 ‘잘못 본 것이다. 절대 그런 일 아니다’라고 강하게 반박을 일단 해 놓고는 바로 소위 ‘심부름센터’라는 곳에 일을 맡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과 열흘도 안 된 기간 만에 그 서류 봉투에 든 대로 수십 장의 현장 사진들과 한 묶음의 조사보고서를 받았고 이제 명명백백하게 들어난 나와 민주와의 불륜 사실에 정말 하늘이 두 쪽이 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평소의 아내답게 결코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 직후 아내는 원래 그녀의 맏언니가 참가하기로 했던 베이커리 본사에서의 연수를 자신이 대신 받겠다고 우겨 갑자기 출발했는데, 도저히 그 상태로는 내 얼굴을 마주보고 태연을 가장할 수 없었고 터져버릴 것만 같은 분노를 자제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해 일단 며칠이나마 분노를 삭이며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연수교육장이 있는 그 콘도에서 2박 3일간 교육은 건성 받으면서, 오로지 자신에게 닥친 그 황당하고 굴욕적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만 고민하고 고민했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연수교육장에서 2박3일간, 나의 배신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아내가 내린 결론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을 다시 한 다음 이혼을 하든 말든 결정을 내린다는 것과 최소한 아이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추하게 보이는 상황을 연출하지는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연수교육에서 돌아 온 아내는 다시 일주일 여를 치밀하게 내 동선(動線)을 체크했고 민주에 대한 주변 상황을 면밀히 체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먼저 민주를 내게서 떼어놓기로 했고 그 다음 문제를 나와 해결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민주를 만난 때는 내가 그녀의 집에 갔다가 민주를 못 만난 채 그녀가 남긴 메모를 발견한 날 아침이었다고 했다.
아내의 표현으로, 그날 아침 갑자기 들이닥친 아내 앞에서 민주는 당연히 당황스러워했고 이내 눈물로 사죄의 뜻을 표했으며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과 그날로 자신이 서울을 뜨겠다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서는 면을 보였다고 했다.
민주는, 당장 움직이는데 돈이 필요하다면 얼마간 경제적 도움도 줄 수 있다는 아내의 제의도 사양하며 자기 팔자는 원래 그런가보다면서 오히려 아내에게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으니 남편인 나를 부디 용서해주라는 부탁을 남겼다고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렇다고 나를 용서해줄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단지 시간을 좀 갖고 아이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줄 충격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 우리들의 이혼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으로 말을 끝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은 민주와 우리 부부 그리고 뒷조사를 맡았던 그 심부름센터 이외에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는 일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내게 다시 단단히 일러두었다. 과연 아내다운 처신이었다.
이제 공은 내게 넘어 온 것이다.
아내는 내 예측보다도 훨씬 더 냉정하게 이번 사태를 받아들였고 더 치밀하게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