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버릴 것 같은 날이다.
목놓아 울기엔 딱 좋은 날이다.
비내리는 공원 벤치에 수빈은 꼼짝도 않고 몇시간 째 앉아 있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내려다 보이고 경찰서도, 구청도 상가도 보였다.
간혹 지나는 사람들이 그녀를 흘깃했으나 수빈은 상관하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살아있음을,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물건...
은영 언니가...
보희가...
원우씨가... ...
보희의 협박성 짙은 문자... 보희가 어떯게 알았을까...
원우씨의 애절한 문자....
원우씨에겐 비밀로 해달랬는데.....
...채 수빈, 어디야?...
...문자라도 넣어줘, 제발...
... 당신...내가 미쳐 날뛰는 꼴 보고 싶은거요?...
...젠장!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
그러나 수빈은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비가 그쳤다.
그 여자...아버지의 여자.
그 여자가 자신에게 손찌검을 한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면서 철저히 이방인 취급을 했는데...
아버지의 아들을 낳고 당당히 그 권리를 주장한 여자...
아버지의 모든 것은 그 아들의 소유임을 귀가 따갑도록 내뱉은 여자...
필요없었다.
수빈은 아버지의 재산 따위, 바라지도 않았다.
엄마가 물려주신 것만으로도 그녀는 평생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일까?
쇼핑몰이...어쨌디고?
아버지와 그 여자 사이에 균열이 생긴걸까?
수빈은 머리를 저었다.
그들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뺨이 욱신거렸다.
그러나 뺨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그녀를 더 아프게 했다.
은영과 원영 앞에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는 것보다 그런 여자가 아버지의 새 부인, 그녀의 새 엄마라는 사실이 더 창피했기 때문에...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러나 수빈은 꼼짝하지 않았다.
문자가 들어왔다. 원영이다.
...언니, 전화주세요. 언니한테 꼭 할 말이 있어요. 오빠한테 얘기하지 않을게요...
망설이다 수빈은 원영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나랑...술 한잔 해요.-
[...아뇨, 원영씨. 오늘은...!]
-알아요. 하지만 나도 오늘은 이대로 못 가요. 나랑 한잔해요. 오빠에겐 비밀로 할게요.-
[...좋아요, 어디서...?]
-공원 잔디밭 어때요? 거기 조용하고 좋은데...?]
수빈이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앉아 있을때 원영이 그녀를 찾아 걸어오고 있었다.
은영 언니와 함께...
그럴줄 알았다는 듯 수빈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손에 들고 온 것을 내려 놓았다.
[그래...청승스레 비맞으며 생각 많이 했어?]
은영 언니의 첫마디였다.
[울적하고 외로울 땐 혼자보다 둘이 나아. 셋도 괜찮고... 그리고 빨리 훌훌 털어버려야 해]
수빈은 웃었다.
[네에...저도 다 털어버린 줄 알았어요. 고3때 엄마가 돌아가시고부터...
그여자를 다시 만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그 여자도 저를 만니기를 꺼릴줄 알았죠.
전 아버지와 인연이 끝났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어요.]
[엄연히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인연이야 끊을 수 있나...
그런데 그 여자는 생각밖이야. 보희씨한테 얘기는 들었지만 그렇게 젊을줄이야...게다가 성질이 보통이 아니든걸?]
[네에...젊죠..그리고 아름답고....]
[하지만 그 젊고 아름다운 것도 한 때라는 걸 남자들은 몰라. 안그래? 게다가 조강지처 상처 입히고 잘되는 놈을 못봤어. 자, 한잔해.]
은영은 수빈에게 술을 건넸다.
[근데, 이 아가씨 보기완 달리 술을 제법 하네?]
술이 어느 정도 비워지자 은영이 원영을 돌아보며 말했고 원영은 베시시 웃었다.
[저희 집안이 술이 좀 세요. 식구중엔 제가 제일 센 것 같고....원우 오빠가 제일 약해요. 술을 즐기지도 않지만...]
[그래? 그렇다면 오늘 한번 확인해보자. 얼마나 마시는지... 어때?]
원영은 대답대신 웃었다.
[사람 사는게 다 편하지는 않은 것 같어...누구나 아픈 과거는 하나씩 있는 것 같고...]
[내게도...떠올리고 싶지 않는 과거가 있는데... 궁금하죠?]
원영이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 궁금해. 말해봐]
[원영씨 지금 취했어요. 내일이면 후회할 말이라면 하지 말아요]
수빈은 은영 언니의 말에 얼른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원영은 고개를 저었다.
[언니, 나 취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말짱해요. 그 일이후 처음으로 내가 내 입으로 털어놓고 싶어져요. 그리곤...잊을래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원영씨...!]
[오빠가 얘기하든가요?]
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난요, 요즘 들어서야 알았어요. 굳이 떠벌릴 일도 아니지만 내가 그 일을 이제는 다 잊었다 하면서도 남이 알까봐 스스로에게 쉬쉬 한다는 것은 여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원영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고등학교 여름 방학때였어요. 혼자서 군대 있는 원우 오빠, 면회를 갔어요. 오빤 반가워하면서도 혼자서 겁도 없이 왔다고 호통치면서 어둡기전에 빨리 가라고 하더군요.
난 코웃음을 쳤고...
면회 끝나고 버스를 탔는데... 깜빡 졸았나봐요. 무언가가 내리 누르는 느낌에 눈을 떴는데 밖은 이미 캄캄하고...한 남자가 나를 깔고 서 있었어요.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입에 테이프가 붙혀져 있더군요...]
[세,세상에!]
전혀 뜻밖인 원영의 고백에 수빈은 놀란 얼굴로 숨을 죽였고 은영 언니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원영의 눈이 젖어 들었으나 의외로 표정은 담담했다.
[버스 운전기사였어요... 공포와 절망감에 난 기절을 한 것 같았어요. 그 놈이 날 겁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어느 길가에 나를 그냥 던져 놓고 가버렸나봐요. 길가던 한 아주머니가 발견하고 병원에 데려다 주었다고 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를 붙들고 말없이 울기만 하던 엄마와...
굳은 얼굴의 아빠와 무표정한 오빠의 얼굴이 보였어요.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떠올랐고...
머리속의 피가 다 빠져 나가는 기분...아세요?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아니 차라리 미쳐 버리고 싶었죠.
그러다 기절하고...깨어나면 그 공포스런 기억에 다시 기절하고...또 깨어나고....
찢어진 상태가 심하고 피를 많이 흘린 상태라 병원에 오랜기간 입원해 있었어요]
[세상에!...어,어떻게 그런 일이...!]
은영 언니가 눈물을 흘렀다.
[퇴원해도 그 남자 얼굴이...그 냄새를...잊을수가 없어서...여러번 기절을 했고 정신과 치료도 오래 받았어요.
물론 학교는 포기했고...사실, 자살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세상과 사람이 싫어지고 바깥 출입, 하기가 무서워졌어요.]
[그래, 그 쳐죽여도 시원찮을 놈은 잡았겠지?]
은영 언니가 입에 거품을 물며 묻자 원영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입을 열지 않았어요. 실어증 비슷한 상태였고 그 일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기 싫었어요. 집에서도 쉬쉬했고....
이상하죠? 내가 피해자인데도 난 가족들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어요. 가족들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겁이 났고... 날 보며 늘 우는 엄마를 보면서 정말 ...죽고 싶었어요]
[자기가 왜 죄인이야? 그런 생각 하는 자기도, 쉬쉬하는 자기 가족도 잘못됐어. 그런 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지. 그래야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지. 그 놈은 지금도 활개를 치고 다닐것 아니야. 그게 더 무섭고 끔찍한 일이라구!]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나만... 나혼자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된다...그랬는데...
오빠는 달랐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병원에 있을때 오빠는 군대 복귀하기 전에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그 일대 버스 운전 기사들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도 했대요.
그리고 간간히 확인도 했지만...진전이 없었나봐요. 당사자인 내가 거부를 했고 또 우리나라의 강간피해 상황이 솔직히 ...]
[그래...당한 여자, 두번 죽이는 경우가 많다더군....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했어?]
[오빠가 직접 나섰나봐요. 오빠 친구 재철씨 알죠? 그 오빠한테 부탁을 했대요. 그 지역에 가서 일단 버스 기사들 사진과 버스 번호판 사진을 다 찍어 놓으라고...
그리고 제대후 오빤 재철 오빠와 직접 그 나쁜 놈을 찾아 나섰어요. 결국 ... 찾았죠]
[정말? 이 형사가 직접? 세상에! 이 형사, 대단하네?]
수빈은 웃었다. 원우가 눈에 불을 켜고 그 운전 기사를 찾아서 동분서주 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경찰서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그 남자 앞에 세웠어요. 울고 불고 난리치는 나를...]
[오빠가?]
[네에...직접 눈으로 확인하라고 하더군요. 똑바로 두 눈 뜨고 확인하라고 하더군요. 난 싫다면서 몸부림쳤고...그 자리에 있다는 자체가 너무 끔찍했으니깐...
그런데 오빠가 뺨을 때리면서 말하더군요....
지금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앞으로의 내 인생은 없다고...
내가 여기서 물러선다면 나같은 여자가 수도없이 생겨날것이라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그 놈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라고...
오빤 내 눈을 보면서 그렇게 소리쳤어요.
오빤... 강간 당한 동생을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어요. 내 잘못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어요.
이상하죠? 그 순간 난, 내가 여기서 물러서면 다시는...다시는 오빠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사실이 내겐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두려웠어요.
난 몸을 떨면서 그 놈을 보았고 내 눈을 피하는 그 놈을 보는 순간 서서히... 공포심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분노가...미친듯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어요.
난 천천히 그 놈에게 다가갔고 어느 순간 난, 내가 그 놈의 얼굴을 할퀴고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주먹질을 하며 나쁜 놈이라고 소리치는 나를 보았죠.]
[잘했어. 잘했어! 자기가 그 놈을 때려 죽인다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힘없는 여자를 강간하는 놈은 사정봐줄 필요도 없다구!]
[그 놈은 자백을 했고...난 그제서야 못다 운 울음을 마음껏 울 수 있었어요. 그 놈...진짜 나쁜 놈이었어요. 내가 처음은 아니었어요. 아마...남은 평생은 감옥에서 보낼 것 같다고 오빠가 그러더군요.]
[아암!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자기 오빠, 정말 멋있다. 세상에 그런 오빠가 어디 있대?]
[난...평생을 두고도 못 갚을 빚을 오빠한테 진 셈이에요. 오빤 나때문에 어렵게 들어간 법대도 포기하고 대신 경찰 시험을 쳐서 경찰의 길을 택했어요.]
[어머나! 정말이야? 이 형사 진짜 괜찮은 사람이다.]
은영 언니는 감탄을 하면서 수빈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거봐. 내가 뭐랬어? 사람이 진국이라고 했지? 놓치지 마. 그런 사람 놓치면 자긴 정말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여자가 되는 거라구. 알았지?]
수빈은 말이 없었다.
[그 후로 오빤 내게 운전도 가르치고...검정고시로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장을 딸 수 있게 도와줬어요. 아마 오빠가 아니었더라면 난 ...]
생각하기도 싫은 듯 원영은 몸서리를 치며 수빈을 보았다.
[오빠가 언니 얘기를 했을때 난 진짜 궁금했어요. 오빠에게 어울리는 여자 이기를...
정말 오빠가 사랑할 가치가 있는 여자인지...난 확인하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수빈은 원영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요. 원영씬...참 대단한 오빠를 뒀어요. 부러워요...]
[난 언니가 좋아요. 언니와 오빠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난 언제든 환영이에요.]
그러나 수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맥주를 주욱...들이켰다.
...원우씨가...내겐 너무 과분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러모로 취하고 싶어지는 하루였다.
세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술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