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을 태운 비행기는 이른 새벽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미연은 고수가 대구행 국내항공으로 갈아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2박 3일간의 장거리 여행동안 시차를 견뎌가며 기내에서만 눈을 붙여야했던 미연은 피로가 몰려와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고수를 미국에 보낼때는 자신을 향한 마음을 돌려보려했던 것이었지만 고수가 그런 슬픈 사고를 당하고서야 마음을 접은 것은 절대로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채영이라는 고수친구의 여동생.
고수를 사랑했던 그 여자가 자기때문에 죽었다는 자책감때문에 고수는 미연을 포기하고 그녀의 사랑을 영원히 받아주기로 한 것이었다.
공항에서 고수와 마지막 포옹을 하며 후회와 걱정으로 뭉쳐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미연은 소리내 울고 말았다.
환승장으로 고개숙이고 걸어들어가던 고수의 무거운 발걸음과 애처로운 뒷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고수야...미안해...미안해...'
미연은 베게위로 눈물을 떨구다 깊은 잠에 빠졌다.
죽은 듯이 자던 미연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었다.
억지로 눈을 떠보니 오후 2시였다.
"여보세요..."
"미연씨? 저 영준이 누나예요."
"아...예...안녕하세요?"
"미연씨 지금 바빠요?"
"아뇨. 무슨 일이신데요?"
"김준필 변호사님 알죠? 저번에 우리집에서 뵈었던 분이요. 어머니 재산문제로 저한테 연락이 왔는데 변호사님이 미연씨도 찾더군요. 몇일 계속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고...오늘 마침 집에 있었군요."
"변호사님이 저를요?"
"예. 사무실로 나오시겠어요? 저도 지금 그리로 가는 중인데,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께요."
"예. 곧 가겠습니다."
미연은 영준누나의 전화를 받고 간단한 샤워를 하여 피로와 잠을 씻어낸 뒤 밖으로 나갔다.
김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가자 영준의 누나도 막 도착한 듯 혼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와요 미연씨."
"안녕하셨어요?"
"혹시 영준이한테 연락 없었어요?"
"아뇨. 무슨 일이라도...?"
미연은 덜컥 겁이났다.
회사가 부도난 후 영준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많았는데 고수 일로 미국에 다녀온 몇일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였다.
"오늘 결혼식에 안나타났다고 조금전에 유선아 집에서 전화가 왔어요. 얼마나 화를 내던지...참내, 영준이는 왜 갑자기 그애랑 결혼을...나한테는 얘기도 없었는데..."
"유선아랑...오늘이요?"
"아까 1시에 가족끼리 모여서 결혼발표하기로 했다는 거예요. 영준이가 왜 그랬을까? 유선아 걔가 혼자서 쇼를 하는건지, 정말 영준이가 결혼을 하려다 그만둔건지...그나저나 어디 가있는 거야, 얘는?"
"연락이 안되나요?"
"글쎄...전화를 꺼두었던데...쯧, 어디가서 머리식히고 있나봐요. 회사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겠지..."
그때 김준필 변호사가 들어왔다.
미연은 일어서서 인사를 하였다.
"오셨군요."하며 반가운 인사를 한 김준필은 테이블에 앉는다.
그리고는 미연과 영준 누나에게 영준의 어머니로부터의 재산상속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영준이 장미가 자기 아이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영준과 그 누나에게는 재산이 상속되지 않았고 장미와 미연에게 모든 것이 남겨졌음을, 또한 영준의 어머니가 영준과 미연 두사람의 결합을 유지로 남겼다는 이야기 듣게되었다.
영준의 누나는 놀라는 눈으로 미연을 보며 물었다.
"...그럼 장미라는 아이가...영준이 딸이란 말예요?"
미연은 장미와 자신에게 그 많은 재산이 상속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와 몸둘바를 몰랐다.
"어떻게...영준씨하고 누님께는 아무것도 남기질 않으시고 저희한테만..."
김변호사는 인자한 얼굴로 대답한다.
"그건 여사님께서 장미와 장미 엄마가 한가족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영준의 누나가 옆에서 중얼댄다.
"걔가 그래서 유선아랑 파혼을 했나보군..."
김변호사는 "그것도 그렇지만 또 다른 사정이 있지."하며 영준의 누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미연은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영준의 누나와 김변호사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명민에게로 찾아갔다.
퇴근시간이라 명민이 막 사무실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영준씨 지금 어디있는지 알아?"
"아니."
"어디 간다는 얘기 없었어?"
"아니. 너...갑자기 영준이는 왜 찾니?"
"걱정이 되서 그래...유선아하고 오늘 결혼하기로 해놓고 나타나지 않았대. 조금 전 누님을 만났었거든."
"유선아랑?"
명민은 놀란다.
"영준이가 아마 널 포기하는 마음으로 그랬었나보구나..."하고 근심어린 목소리로 말하더니 미연에게 "그나저나 미국에는 잘 다녀왔어? 그 친구는 어떻든?"하고 묻는다.
미연은 미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대충하였다.
"그렇게 되었구나...영준이, 무척 상심했었는데..."
"내가 고수 찾으러 간다는 얘기 영준씨한테 했어?"
"응. 내가 좀 경솔했지. 그날 너한테 화가 많이 났었거든. 게다가 영준이한테 가서 너 포기하라고...그딴 소릴 했지 뭐야."
"그래서 영준씨가...나때문에 마음아파했어?"
"당연하지. 넌 영준이한테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아직도 모르겠니?"
미연은 한숨을 쉬었다.
미연은 명민에게 장미와 재산상속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영준씨한테 남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데...게다가 나까지 그렇게 서운하게 했으니 어쩌면 좋니...?"
"몇일 기다려보자.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니? 어디 잠시 여행갔겠지."
몇일을 기다려봤지만 영준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매일 저녁 영준의 집으로 가보면 캄캄할 뿐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영준의 회사로도 가봤지만 역시 문을 닫은 채 그대로였다.
미연은 박영준을 아는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전화하여 물어보았다.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미연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져갔다.
저녁때 TV 뉴스를 틀어보았다.
혹시 뉴스에 무슨 소식이 있나해서였다.
"오늘 세 아이를 둔 가장이 생활고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부도, 실직, 그리고 가장들의 비관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미연은 그런 뉴스를 보니 마음이 더욱 산란해졌다.
영준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부과한, 말하자면 전재산을 맡겼으니 영준을 보살펴달라는 그런 의무가 아니어도 미연은 영준이 걱정되어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혹시 영준이 자기때문에 비관하여 자살이라도 했으면 어쩌나 싶어 미칠것만 같았다.
'어디로 간걸까...도대체 어디에...'
장미를 옆에 눕혀놓고 잠을 못자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엄마, 왜 그래?"
"장미 아직 안잤어?"
"엄마때문에 못자겠어. 왜 자꾸 한숨쉬어?"
"미안해. 그런데...걱정이 되어서 그래."
"무슨 걱정?"
"그 아저씨 있지...피아노 가르쳐주던 아저씨. 그 아저씨가 없어졌어."
"그 아저씨 저번에 왔었는데?"
미연은 벌떡 일어난다.
"언제? 언제 왔었어?"
"엄마 미국갔을때."
"와서 무슨 얘기 했어?"
"나보러 왔다고...그래서 피아노 다시 가르쳐줄거냐고 내가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그랬더니 엄마 오면 다시 가르쳐준다고 그랬어."
"엄마 오면?"
"응. 그래서 엄마 오기 기다렸는걸."
"그걸 왜 이제 얘기해?"하고 장미를 나무랐지만 생각해보니 미국에 다녀온 후 자신이 분주하여 장미랑 그동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미연은 영준이 왔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장미가 자기 딸이라는 걸 알고 보러왔을 것이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내가 오면...?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뜻인가?'
미연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척이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10년전 영준을 처음 본 그 장면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영준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어 그의 차안이었다.
그가 자기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는 운전을 하였다.
앞으로 펼쳐진 고속도로를 따라 한없이 달려갔다.
미연은 영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웃으며 '사랑해요, 사랑해요...'라고 계속 속삭였다.
미연은 그런 꿈을꾸다가 깜빡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사랑해요...사랑해요...'하고 속삭이던 자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미연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그와 같은 말이 솟아나왔다.
'사랑해요...사랑해요....사랑해요, 영준씨......'
미연은 그제서야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그 말을 마음속으로 실컷하였다. '사랑해요.'라고.
지금까지 억지로 감추고 눌렀던 그 감정을 더 이상은 막을 수가 없음을 미연은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염려해왔던가.
그리고 지금 이순간도 그가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치고 있는 것이었다.
영준의 생각으로 눈물이 났다.
울면서 방금 꾼 꿈의 광경을 되새겼다.
처음 만날 그날처럼 함께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던 영준의 모습....
그와 헤어지고 난 후 그토록 잊으려고 애썼던 그때 그 기억들은 하지만 아직도 미연의 머리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와의 입맞춤...그때 그 잊지못할 전율...그리고...
'맞아!!'
미연은 눈물을 닦으며 장미를 흔들어 깨웠다.
"장미야 일어나."
"왜그래...?"
"어서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입어."
미연은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였다.
장미가 옷을 차려입는 동안 미연은 전화를 걸었다.
"명민아, 나야."
마침 일요일 아침이라 늦잠을 자려고 했던 명민은 미연의 전화에 잠이 깨었다.
- "...미연이니? 이렇게 일찍 웬일이야?"
"명민아 나 좀 도와줘. 영준씨 어디 있는지 알거 같아."
- "그래? 어딘데?"
"내가 지금 너희집으로 갈께, 그동안 나갈 준비하고 있어줘."
미연은 장미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타고 명민의 집으로 갔다.
"영준이가 어디 있는 거 같아?"
"영준씨 처음 만난 날...그날 밤에 영준씨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었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휴게소같은 데에 잠깐 섰었거든. 그리고 다시 고속도로를 들어갔는데 아주 많이 가지는 않았던 거 같아. 콘도같은 건물을 지나 조금 들어갔더니 어떤 집이 있었어."
"거기가 어딘데?"
"몰라. 처음 가본 곳이었어.....하여튼 서울에서 아주 멀지는 않았던 거 같아."
"경부고속도로면..."
명민은 인터넷에서 가까운 경부고속도로 근처의 리조트를 뒤져보았다.
"콘도같은 게 있었다고? 가까운 데라면 용인이나 양지인 거 같은데...양지 리조트였나? 일단 가보자. 가다 보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잖아."
명민은 미연과 장미를 차에 태우고는 경부고속도로로 향했다.
양재동을 지나 넓은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미연이 내다보고 있는 차창밖으로 그 어떤 추억의 느낌이 몰려왔다.
영준이 차를 세우고 미연에게 입을 맞추었던 곳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고속도로 휴게소가 아니라 만남의 광장이었다.
미연은 그곳을 돌아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여기가 거긴가...?'
차를 몰던 명민은 미연에게 물었다.
"미연아, 너...영준이에게 진짜로 돌아가는 거지?"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민이 차를 몰아 양지 리조트 앞으로 갔는데 미연은 그곳이 전혀 생소하기만 하다.
"여기 맞는 거 같니?"
"모르겠어."
"저런 큰 건물에 갔었어?"
"아냐, 단층 집이었어...그런데 그때 저런 건물에 조명이 켜져 있었던 거 같아. 그 앞을 지나서 더 들어갔었거든..."
"그럼 별장이었나? 아, 그렇지, 잠깐만..."
명민은 전화를 건다.
"누나, 저 명민이예요. 누나네 양지 근처에 별장있어요?....네....네....네. 고마와요."
"누구야?"
"영준이 누나. 이 근처에 별장이 하나 있나봐. 가보자."
명민은 차를 몰아 영준이 누나가 알려준대로 한적한 지방도로를 따라 가보았다.
이내 숲속으로 집이 한 채 보였다.
미연은 낯익은 듯한 골목 어귀가 나타나자 "아... 여긴가보다."한다.
미연은 그 집앞에 세운 명민의 차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바로 영준이었다.
명민은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영준을 보더니 그를 향해 슬쩍 웃음을 던지고는 다시 차를 타고 떠났다.
"들어와요."
미연은 장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10년 전에 보았던 검은 색 그랜드 피아노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우아했던 그 식탁도 있었다.
장미는 그랜드 피아노를 보더니 달려가 살펴보기 시작한다.
피아노위에는 악보들이 널려있었다.
미연은 영준앞으로 다가가 서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영준은 미연을 품에 꼭 안았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게 돌아올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미연은 영준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