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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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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51


BY 제인 2003-12-02

회사 문을 닫은 후 영준은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명민이 찾아왔다.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 둘 다 회사일로 정신이 없어 지금껏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영준아,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안나."

"내가 도와줄 건 없는지... 뭐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라."

"....미연씨... 연락해봤니?"

"넌 미연이 생각밖엔 안하는구나."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

"지금 미연이 한국에 없어."

"어디 갔는데?"

"미국에."

"무슨 일로?"

"미연이랑 사귀던 남자 있었지? 그 친구가 미국에서 사고를 당했어. 그래서 오늘 그 친구한테 달려갔어."

명민은 그렇게 말렸는 데도 미연이 고수를 찾으러 간 것이 못마땅했다.

영준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데도 김고수를 먼저 챙기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영준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말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을 영준에게도 털어놓고 만 것이다.

영준은 미연이 그를 찾으러 갔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그런데 그런 영준에게 명민은 더 아픈 소리를 하였다.

"아무래도 미연이는 네게 오지 않을 거 같아. 너 아니? 이번에 소송걸렸던 그 노래가 그 친구를 위해 만든 노래였다는 거. 그 친구 생일날 그친구한테만 선물로 들려주려던 거였는데, 미래씨가 달라고 졸라서 취입한 거였다더라."

영준은 그 소리를 듣고는 기분이 상할대로 상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 친구 뒷전이라는 얘기야?"

"그래. 이제 미연이는 포기해라. 이게 뭐냐, 한 두해도 아니고, 기다리는 것도 한도가 있지... 그 소송때문에 부도나고 이렇게 되었는데도 너한테는 한번 찾아와보지도 않고 그 친구한테 가는 거 보면 볼짱 다 본거 아냐?"

영준은 한참 말이 없다가 한숨섞어가며 이런 소리를 내뱉는다.

"나 있지...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사는지...정말 왜 사는지 모르겠어."

 

명민이 왔다 간 다음 영준은 더욱 실의에 빠져버렸다.

'이젠 정말 그녀를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되는 건가...?'

그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영준은 넋이 나가 전화도 받지 않고 앉아있다.

벨이 여러번 울리더니 자동응답기가 작동하였다.

"안녕하세요, 여긴 김준필 변호사 사무실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김변호사께서 박영준씨를 만나고 싶어하시니 저희 사무실로 내왕해주십사하고 전화드렸습니다. 빠른 시일내로 꼭 찾아와주십시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영준은 올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제 이 집마저도 처분하려나 보군....'

영준은 저녁 먹는 것도 잊고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마루에 아까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귀에는 채칵거리는 벽시계소리만 들렸다.

몇시간째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소리가 크게 들렸다.

영준은 그 소리에 정신이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선아가 서있었다.

영준은 문을 열어주고 돌아들어오면서 마루의 불을 켠다.

그리고는 소파로 돌아와 앉아 고개를 돌리고 창밖쪽을 바라본다.

선아는 영준에게 다가와 앉았다.

"오빠, 그만 털고 일어나요."

"......"

"오빤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

선아는 고운 손등을 펴 영준의 앞에 보여준다.

"오빠, 이 반지 기억 안나?"

전에 영준이 청혼하며 선아의 손에 끼워주었던 반지였다.

그제서야 영준은 선아의 얼굴을 쳐다본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촉촉한 눈망울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선아.

처음 선아를 보았을때 왜 눈길이 그녀를 따라갔던가.

그건 바로 미연과 헤어지던 날 그녀가 입었던 옷차림을 선아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연에 대한 그리움이 선아에 대한 사랑으로 변하여 청혼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자기와의 사랑에 행복해했던 선아를 보며 영준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반지...아직도 끼고 다니니?"

"응. 영원히 끼고 다닐거야."

"내가 고백하나 해도 될까?"

"뭔데?"

"너한테 미안하다는 얘기...하고 싶어. 꼭 그말 하고 싶었어."

"미안한 건 난데, 왜 오빠가..."

"나...너희 집안하고 그런 일 아니었어도 너랑 결혼하지 않았을거야."

"왜?"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그거밖엔 안되었던 거 같아."

"알아요..."하며 선아는 훌쩍거린다.

"하지만...나...오빠 한번도 원망한 적 없었고...앞으로도 그럴거야."

눈물이 선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난 오빠 처음부터 사랑했고...지금도 사랑해. 오빠가 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난 오빠 영원히 사랑할거야."

영준은 선아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선아가 무슨 잘못이 있어 이런 고통을 당해야하는지.

잘못이 있다면 오히려 자기에게 있었다.

순진무구한 그녀를 사랑의 덫에 걸리게 만든 자신에게.

선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영준에게 말한다.

"내가 오빠 곁에 있어주고 싶어. 그래서 재기하게 도와주고 싶어요. 나랑...결혼해, 오빠. 이젠 아무도 막을 사람 없잖아. 지난 일은 다 잊고 다시 시작해요, 나랑."

영준은 미연을 잊어야 할 것 같았다.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그녀를 이젠 정말로 잊고 선아의 말대로 털고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유학선과의 사건 이후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자기 옆을 떠나지 않고 지금껏 기다려온 선아에게 고마운 생각마저도 드는 것이었다.

영준은 눈물젖은 선아의 얼굴을 보며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선아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다.

 

선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라 결혼식을 크게 하는 것이 싫었다.

또한 몇주일이고 몇달이고 기다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영준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래서 바로 이틀 후 조그마한 연회장을 빌려 가족끼리만 모여 조촐하게 결혼발표를 하기로 하였다.

영준은 김준필 변호사에게 찾아갔다.

자기 집의 윗어른으로는 누님과 김변호사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해달라는 이야기를 하러 간 것이었다.

"안녕하셨어요?"

김변호사는 영준을 보더니 먼저 위로의 말을 한다.

"왔군, 어서 앉게. 자네 회사 일은 얘기 들었네. 젊어서 사업을 하다보면 한두번씩 쓰러질 때도 있는 거야. 자네 뿐 아니라 지금 쓰러지는 회사가 한 둘도 아니니 너무 상심말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곧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 그 김미연씨하고?"

"아뇨. 유선아요."

"유학선의 딸?"

"네, 맞습니다."

김변호사는 안색이 변하여 영준을 노려보며 말을 했다.

"나는 그 결혼 반대하네."

"네?"

"흠...."

"유학선 그분의 딸이라 못마땅해 하시는 거 이해합니다."

김변호사는 뜽금없이 "자네, 장미알지?"하고 영준에게 묻는다.

"장미...라니요? 김미연씨 딸 말씀이신가요?"

"내가 사실은 어머니 재산 상속 건으로 자네에게 연락을 했던거네."

"집 처분하는 일 때문에요?"

"아니네."

"그거 말고도 또 다른 일이 남아 있었나요? 재산상속 문제는 끝난게 아니었어요?"

"아직 끝난게 아니었어. 지난 번 것은 어머니의 전재상 중의 일부였네. 세상에 알려진 재산은 대부분 사회로 환원하셨지만 그외 알려지지 않은 재산이 또 있었던거지."

"......."

"그 재산을 장미에게 물려주셨다네."

"장미에게요? 어째서요?"

"장미가 손녀딸이었기 때문이야."

"손녀딸이라뇨?"

"그래. 자네 딸일세."

영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부르셨어. 장미가 손녀딸인 것 같다고 하더군. 그러면서 아무도 모르게 친자확인을 해달라셨어. 확인이 되면 재산의 대부분을 그애에게 남겨주라 하셨지. 하지만, 단서가 있었네. 유학선,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안된다고. 그래서 여지껏 기다려온거야."

"친자확인까지 해봤다고요?"

"사람을 시켜 장미양의 유전자 감식을 의뢰했지. 여러군데 의뢰해봤지만 친자임이 확실하더군."

"어머니가 장미에게 얼마를 남기셨는데요?"

"약 10조원에 달하네."

영준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어, 얼마...라고요?"

"10조."

"....어떻게...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자네는 아무것도 몰랐겠지, 자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여사님은 자네나 주위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셨네. 물론 특이하게 살아오신 분이긴 하지만, 그런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김변호사는 영준에게 옛이야기를 시작한다.

 

영준의 외할아버지 최산은 이북출신으로 일제시대때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였다.

일본정부로부터 수주를 받은 군수공장이 한국과 일본에 수십개가 있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물론 그 이익을 일본정부와 나누어 갖는다는 조건으로 일본의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친일파 귀족이었다.

하지만 실지로 그는 독립군에게는 아주 큰 자금줄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명했고 애국심도 뛰어났는데 일제에 대항해 무턱대고 총을 들고 싸우다 죽는 것보다는 더 큰 힘을 길러 크게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어린 학생이었을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여 대학을 마친 후 바로 군수공장을 차리면서 일본 정부에 거짓충성을 하였다.

군수공장을 열은 이유는 바로 독립군에게 비밀리에 무기를 대주려 했던 것이었다.

물론 군수사업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일급 감시대상이었기에 당시에는 군사무기나 독립자금을 한꺼번에 많이씩 빼돌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일제말기에 해방되기 전까지 그의 활동이 독립군단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해방이 되기 전 그는 이미 일본이 쇠망했음을 직감하고 한일 양국에 널린 재산을 처분하여 가족과 함께 외국으로 도망을 쳤다.

그가 갑자기 횡령도주하였지만 일본 정부는 곧 패망을 하여 그를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몇년간을 외국을 떠돌며 숨어 지냈는데 그동안 최고은의 어머니는 병사를 하고 말았다.

일본이 패망한 후 그는 고은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불안한 정세속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한 그는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에 본격적으로 외국에 도처에 숨겨두었던 재산을 국내로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전쟁복구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는 몇해 지나지 않아 지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이 최고은이 스물 한살때였다.

죽기전 최고은의 아버지는 엄마없이 자라는 고은이 항상 불안하였다.

자신의 사업이 바빠 자주 돌보지도 못하였기에 더욱 그랬다.

고은은 예쁘장하여 어릴 때부터 남학생들이 집으로 쫓아오곤 하였다.

아버지는 그래서 늘 고은을 보면 이런 말을 하였다.

"얘야, 넌 꼭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남자들을 조심해라. 너처럼 예쁜 여자는 꼭 남자 조심해야해."

아직 미혼인 딸을 혼자 남겨두고 간다는 불안한 마음에 세상을 떠나면서도 그 말을 할 정도였다.

최산에게는 한국에 돌아와서 사업을 하다 친구가 된 사람이 있었다.

그가 김준필 변호사의 아버지 김성한이였다.

김준필의 아버지는 당시 국내 몇명 안되는 변호사 중 하나였는데 아주 심성이 곧은 사람으로 재산가인 영준의 외할아버지가 죽고나자 그의 딸을 수양딸처럼 키워주었고 그가 남긴 재산도 관리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후 역시 변호사가 된 아들 김준필이 그 일을 계속 맡아주었다.

그리하여 그들 부자에 의해 최산의 재산은 수십년동안 10조에 달할 만큼 불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자네 어머니는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후에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해졌던 것 같아. 남자들이 청혼을 하면 '돈때문인가'싶어 믿지 않는 습관이 들어버렸지. 그래서 염문만 뿌리고 정작 결혼은 하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유학선의 아버지와는 어떻게..."

"유길상이라고 하는 그 사람은 당시 장관직을 지냈는데 전에 자네 외할아버지와도 절친한 선후배 사이였네. 전후때 자네 외할아버지가 그 집안의 사업을 많이 도왔어. 그 유학선의 할아버지도 자네 외할아버지처럼 일제때 사업을 하며 비밀리에 독립군을 도왔던 동지였다네.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에 일제때는 친일귀족이었던 집안이긴했지만 유학선의 할아버지는 자기 집안하고는 뜻이 달랐던 거지. 그는 총독부의 총애를 업고 큰사업을 하면서 뒤로는 군자금을 빼돌려 독립군을 도왔던거야. 그러다가 자네 외할아버지와 알게되어 의부자 사이가 되었다네. 그래서 나중에 자네 외할아버지가 그 집안 사업이 기울었을때 유길상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거야.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서. 저번에 자네 구속되었을때 친일파 집안이라 들썩거렸지만, 사실 그런 내막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고 있지."

"그랬군요."

"그런데 어느날  우리 아버지가 유학선의 아버지를 우리집으로 초대했어. 그때 마침 자네 어머니도 있었어. 그때 성악과 졸업반이었던 자네 어머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아리아를 불렀지. 그때 그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네."

유학선의 아버지 유길상은 자기 집안에 큰 도움을 주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딸을 보고 너무나 반가왔다.

그런데 그 딸은 너무나 예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녀의 나이는 자기 자식들 보다도 어렸는데도 걷잡을 수 없는 연정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었다.

영준의 어머니 또한 품위있고 점잖은 그 노신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로 외롭게 지내면서 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늘 의도가 의심스러워보이기만 했다.

그런 젊은 남자들하고는 달리 이미 고위직에 있어 그럴 필요도 없고 아버지같이 따뜻해보이는 유길상에게 마음이 끌린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 날 이후 자주 만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딴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김준필의 아버지 김성한은 엄청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딸자식이나 다름없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유길상을 설득하여 헤어지게 하려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깊어진 후였다.

고지식하게 살아온 유학선의 아버지는 그런 일을 깜쪽같이 속이지를 못해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고 유학선이 쫓아와 행패를 부리고 협박을 하여 두 사람은 눈물의 이별을 하게되었다.

그때 유학선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엄청난 액수의 위자료를 주었다.

"하지만, 그건 자네 어머니 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였지. 그 정도 위자료가 합당한 거였어. 헌데, 그것도 사실 알고보면 자네 외할아버지가 자기 집에 꿔준 돈을  일부 갚은 거나 다름없었던 거야. 어쨌든, 자네 어머니는 이후로 성격이 몹시 불안정해져 갔네. 피해망상증에 시달려 정신과를 수시로 찾아다니곤 했는데 그 불안증세가 남성편력으로도 나타났던거지. 특히나 유학선한테 당한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수모였지. 어릴 적부터 보모의 치마폭에 쌓여 공주처럼 자라왔던 자네 어머니는 그런 험한 꼴을 당한 것이 아마도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거야.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외국에 나가 안들어 왔겠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 자네가 그 딸과... 자네가 그 유학선의 딸과 결혼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자네 어머니가 지하에서 통곡을 하실걸세."

영준은 아직도 김준필의 이야기가 실감이 나질 않아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김준필은 한 숨 돌리고는 이야기를 계속 한다.

"어머니는 장미 엄마에게도 재산을 남겨주셨네. 돌아가시기 전 장미 엄마가 곁에서 간병을 해준 것에 감복을 하셨더군. 그래서 자네가 살고 있는 집이며 별장등 부동산은 모두 김미연씨에게 주셨다네. 그리고 장미의 친모로서 장미가 성인이 될때까지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후견인의 자격도  갖게 되었네."

"......."

"어머니가 왜 자네에게는 한푼도 남기지 않고 장미양과 김미연씨에게만 재산을 물려주었는지 알겠나?"

"......?"

"어머니께서 김미연씨를 믿으셨기 때문이지. 그리고 어머니는 자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깨달으셨던 거야. 바로 따뜻한 가정이라는 것을 말야. 어머니는 자네가 김미연씨와 부부가 되거든 자네에게도 장미의 후견인 자격을 주라고 하셨다네. 물론 두 사람의 인연을 그렇게 돈으로 엮을 수야 없다는 거 잘 아네만, 그건 자네 어머니가 자네에게 김미연씨와 꼭 부부의 연을 맺기를 소원한다는 그런 뜻을 남기신 걸로 봐야할 걸세."

"하지만...선아와 결혼을 하기로 약속..."

영준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려는데 "또 한가지!" 하고 김변호사가 영준의 말을 끊었다.

"자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밝히신 것이 있네."

"무엇인데요?"

"바로 자네 누이 얘기야."

"누나가 왜요?"

"자네 누나가 바로 그 유길상이라는 사람의 자식이었다네."

"예?"

"그 사람과 헤어질때 이미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더군. 그래서 유학선을 피해 외국으로 나가 자네 누이를 낳은 것이지."

"하지만 누나의 아버지는 배우 누구라고 들었는데요?"

"그때 외국에서 그 배우를 만난 건 사실이지만 유학선이 두려워 만든 연막이었다고 그러시더군.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비밀을 돌아가시기 전에 처음으로 내게 꺼내셨던거야."

"그렇다면..."

"그래. 자네 누이는 그 유학선과 남매지간이 되는 셈이네."

 

영준은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김변호사의 사무실을 들어설 때는 모든 것을 잃고 난후 선아와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 다짐했던 홀가분한 마음이었는데 나올 때는 다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전보다도 더 혼란스러워졌다.

다른 어떤 것 보다도 장미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놀라왔다.

그 애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차를 몰아 미연의 집으로 향했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미연의 친정집 앞 길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영준은 차를 세우고 내려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장미가 있었다.

영준은 장미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장미는 영준을 보더니 반가와 소리쳤다.

"어? 아저씨! 안녕하세요?"

영준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장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미소를 한가득 짓고 있는 그 애의 모습이 몹시도 낯익어 보였다.

그런데 전에 봤을때보다도 많이 커져 있었다.

"엄마 만나러 왔어요? 엄마 지금 집에 없는데."

"아냐, 장미 보러왔어."

"저를요? 저 다시 피아노 가르쳐 주시려고요?"

영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잘됐다. 나, 저 앞에 피아노 학원 다니거든요? 그런데 거기 선생님 너무 싫어요. 아저씨한테 배우는 게 훨씬 좋아요. 그런데 언제요?"

"엄마 돌아오거든."

"엄마 오거든 그때부터요? 엄마 조금 있으면 온다고 했어요."

"언제?"

"내일이요."

영준은 미소지으며 장미를 한번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보내며 차를 타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