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비가 굵게도 오네. 한 며칠 가겠구만...]
[장대비가 따로 없다카이...재란아!]
방안에서 책을 들여다보던 재란은 엄마의 목소리에 방문을 빼꼼이 열었다.
[와?]
[나와봐라]
또 뭔일 시키려나...하는 생각에 재란은 입을 삐죽거리며 주방으로 나왔다.
엄마는 대뜸 김치통을 내밀었다.
[진수네 갔다줘라, 물김치다. 알맞게 익어서 먹기가 딱 좋다. 된장해서 비벼묵어라 그래라]
...그럴줄 알았다...
[퉁퉁대지 말고 퍼뜩 가라. 감자떡도 식기전에 무라카고]
영 내키지 않았으나 어린애처럼 가기 싫다고 떼쓰는 것도 우스워 재란은 우산을 펼쳤다.
*
[자가 아직도 얼굴에 근심이 그득하네요]
[그게 퍼뜩 잊혀지겠나. 강해보이는 것 같아도 자가 얼매나 여리노. 걱정이데이...]
[너무 걱정마소. 쪼매만 더 그냥 지켜봅시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은 딸에 대한 걱정으로 어두웠다.
딸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와 몇날 며칠을 울기만 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 한 쪽이 쩡- 했다.
진수는 주방에 있었다.
[뭐하냐?]
[어, 왔냐? 라면 끓이는 중인데 니도 물래? 근데...그건 뭐고?]
[물김치하고 감자떡]
[야, 맛잇겟다]
진수는 얼른 뚜껑을 열고 맛을 봤다.
[맛 쥑인다. 역시 너그 엄마 솜씨는 이 동네에서 제일이라 카이. 된장 넣고 비벼 묵으면 끝내줄긴데...]
[긇여 줄께]
재란은 진수네 냉장고를 뒤져 된장 끓일 준비를 했다.
그런 와중에 마음은 채 영에게 가 있었다.
집에 있는지...있다면 자고 있는지...아니면 책을 읽고 있는지...
[야, 이러고 있으니깐 꼭 신혼부부같다야]
진수가 옆으로 와서 한 말이다. 재란은 그런 진수를 노려 보았다.
[야, 까짓것 니 내 색시해라]
[농담이 지나치면 매를 부른다는 소리, 들어봤냐?]
재란은 국자를 들고 진수를 위협했다.
[방해하지 말고 사라져라, 응?]
[야, 그럼 약혼식이라도 할래? 결혼은 군대 제대하면 하고...최고의 남편이 될 자신이 있는데...]
[니가 거들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 사람이다. 그런 얘기, 하나도 재미없으니깐 고만해라]
[니는 내 얘기가 다 농담으로 들리나? 그라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잊을때도 안된나? 니 잘못도 아인데 언제까지 속에 담아둘기고?]
재란은 국자를 던져 버렸다.
홱 돌아서서 진수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진수가 아차 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미 늦었다.
[된장을 끓이든 고추장을 끓이든 니가 해라. 그라고 경고하는데 또...!]
재란은 말을 멈추었다.
진수의 어깨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서 있는 채 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재란은 진수를 밀치고 채 영을 외면하고는 얼른 밖으로 나와 버렸다.
숨이 막혔다.
그녀의 발길이 저절로 중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기분으로 집에 가기가 싫었다.
*
텅빈 학교 교실에 앉아 재란은 하염없이 비 내리는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창을 때리는 굵은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학교 일에 대해서는 마치 금기사항인냥 그녀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제일 친하다는 은숙이조차 조심스러 하는 문제였다.
정작 그녀에게 문제되는 건 그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그녀 혼자만이 풀어야할 숙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수였다. 진수는 재란의 고민이 단지 학교 일에만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재란은 진수가 자신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은숙이 또한 여러번 언급한 일이기도 했다.
진수는 그녀에게 있어 그저 친구일 뿐이다.
볼 것 안 볼 것 다 보고 자란 어릴적 친구...
거리를 둘까도 생각했었으나 그러면 더 어색하고 힘들것 같아,
그녀는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허물없이 대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게 먹혀 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재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몰래 짝사랑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재란이다.
그러기에 진수가 더 안타가운 것이다.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다.
사람 감정이 그렇게 쉽게 결정되어 진다면 얼마나 편할까...
[뭐가 문제니?]
조용한 교실안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재란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그 순간은 채 영이 반갑지 않았다.
[혼자 있게 내버려둬줘요...돌아가요...]
작지만 단호하게 재란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