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며칠 날씨가 좋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관광객들 발이 묶여 난리도 아니었다.
어떻하든 먼저 나가려고 대합실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도 생겼다.
[어멈아. 저녁에 반찬 좀 넉넉하게 해서 채영감집에 좀 갔다 줘라]
[글찮아도 생각하고 있엇네요]
오징어로 물회를 만들어 점심을 먹던 재란은 할머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할아버지집에 뭐하러? 아줌마도 계신데?]
[으응, 그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이 상을 당하셨다 아이가. 그래서 식구들이 급하게 서울로 오라간다 안하나. 손자놈하고 그 집 막내 아들만 남고 말이다]
[......]
[우리가 젤로 가깝은데 어른들 없을 때 신경 좀 써야 안 되겠나. 사내놈만 있는데 제대로 챙겨 묵기나 하겠나 어디]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잔심부름을 재란이 맡았다는 것이다.
기뻐해야 할지 ....
그녀 엄마는 그녀를 일찌감치 그 집으로 보냈다.
밥을 해주라는 것이다.
투덜대며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 갔다.
울릉도 사람들은 대문을 잠그지 않는다. 그럴바엔 뭐하러 대문을 만드는지 원...!
[진수야]
유리문을 열었다. 진수가 있기를 바랬다.
진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는동안 놀기도 뭣하고 해서 면사무소에서 사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시시한 얼굴로 진수가 나왔다.
[야 니가 뭔 일이고?]
[어르신들 서울 가셨다며? 너 굶을까봐 엄마가 가보래서 왔다 어쩔래? 밥도 안했지?]
[울 엄마가 한 대대가 묵어도 남을만큼 밥 해놨다 아이가. 근데 냄새 좋다 뭐꼬?]
진수가 얼른 그녀 손에 든 것을 빼앗아 식탁위에 놓고 열어 보았다.
해산물 튀김이랑 해물탕이었다.
[삼촌은? 어디 가셨냐?]
[2층 방에 계신다. 참, 니 우리 삼촌이랑 아직 인사 안 했제?]
[응?...으응...]
이상하게 사실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상 차릴테니 니가 올라가서 삼촌 좀 모시고 와라. 이참에 인사도 하고...]
[내, 내가?]
[어때서? 야, 우리 삼촌이 어릴때부터 니를 얼매나 이뻐했노. 갼찮다. 오른쪽방이데이]
쭈삣거리며 마지못해 재란은 계단을 올라갔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노크를 했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또 노크...
반응이 없자 재란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빼꼼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창가에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채 영이 엎드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 갔다.
예전부터 그의 방에는 책이 많았다.
한번 빙 둘러본 재란은 조심스레 침대가로 다가가 그를 내려다 보았다.
깨우려다 말고 재란은 살며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채 영을 관찰했다.
...어른도 잠이 들면 이렇게 순해 보이는구나...
그리고 그의 속눈썹이 상당히 길다는 것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었다.
채 영을 보고 있자니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아지랑이 같은 훈훈한 감정이 슬며시 피어올라 온 몸을 가득 채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또 가슴앓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애틋하고 애절한 감정이...
재란은 가만히 생각했다.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 이름할 수 있는 건지...라고.
[내 얼굴이 한숨 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에구, 깜짝이야!]
갑작스런 말소리에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자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맨발의 긴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려 놓으며 그가 살짝 웃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내려가서 저녁 드세요]
[우리 저녁 때문에 일부러 니가 온거냐?]
[정답!]
[그렇다고 겁도 없이 늑대 소굴로 들어와?]
[늑대? 누가요?]
그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채 영은 그녀의 허리를 나꿔채 끌어 당겼다. 순식간에 그녀는 그의 다리 사이에 갇힌 꼴이 되었다.
[남자는 다 늑대라는 소리 몰라, 꼬맹이?]
놀리듯 느릿하게 그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에 더 놀라 어찌할바를 몰랐다.
그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손만 뻗으면 안을 수도 있는 거리에...
그에게선 바다의 푸른 향기가 느껴졌다. 아찔했다.
거기서 벗어나야만 하는데...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늑, 늑대도 늑대 나름인데...]
겨우겨우 말이 밖으로 세어 나와준 게 고맙기 그지없었다.
[오빤...하나도 무섭지 않네요, 뭐...]
웃으며 그녀가 말했으나 그는 웃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꼬맹이...]
나직히 속삭이며 그가,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단지...기분탓인가...?
재란은 그의 품에, 그의 눈속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정지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삼촌! 이 재란! 뭐하노, 빨리 와라!]
밑에서 울려 오는 진수의 목소리에 재란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내 정신좀봐라...] 어색함을 감추려 재란은 호들갑스레 웃었다.
[오빠, 폼 잡지말고 빨리 내려와서 저녁이나 드세요]
재란은 낮은 채 영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 방을 나왔다.
진수가 부르지 않았다면 키스를...!
[에비 에비..]
재란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중얼거렸다.
*
아무일없이 채 영과 채 진수는 저녁을 먹었다.
간간히 진수와 재란은 말을 주고 받았으나 그는 말이 없었다.
[삼촌, 재란이 얘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거 아나?]
[으음...]
[야가 마이 이쁘졌제?]
[으음...]
[야하고 나하고 결혼하면 잘 살겠제?]
대답대신 이번엔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재란은 진수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 박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밥이나 먹어라, 채 진수]
진수는 길낄대며 웃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수의 진심이란 걸 재란도 채 영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설겆이를 하는 동안 진수는 커피를 끓였다.
채 영은 진하게 블랙을 마셨다.
[너 군대 가는 날이 언제냐?]
[한달 남았지. 니, 내 기다려줄거제?]
[내가 미쳤냐]
재란은 코웃음을 치며 일어났다.
[갈라고?]
[준비해서 도서관에 가야지. 니는 뭐하는데?]
[응, 선배들이 한 잔 산다고 저녁에 나오라카데?]
[하여튼! 너, 일주일에 술 안 먹는 날보다 먹는 날이 더 많제? 그러다 군대가면 술 생각나서 어쩔래? 적당히 자제 좀 해라, 채 진수....나 간다.....나 가요, 오빠]
채 영은 소파에 앉아 고개만 약간 끄덕여 보일뿐 다른 말은 없었다.
조금은 섭섭했다.
하지만.....!
그 섭섭함도 잠시, 10시가 조금 넘었을까 ?
그가, 채 영이, 워크맨이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내
재란과 은숙을 놀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