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 어쩐지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더라. 거봐라, 워크맨과 니는 인연이라카이]
얘기할까 말까 망설이다 고백을 하자 은숙은 마치 자신이 맺어준 일인냥 의기양양했다.
재란은 곱게 흘겨 보았다.
[당분간 나는 아침 운동 안할란다. 워크맨이 맨날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핑계거리 생겨서 좋겠다]
[야, 우쨌거나 잘해봐라]
[잘하긴 뭘 잘하냐? 오빠한데 여자있단 소리 못들엇냐?]
[글타고 결혼날짜 잡아 놓은 것도 아닌데 뭐...그라고 감정이란 게 믿을 게 못되서 떨어져 있음 변할지도 모르잖냐]
[그렇게 쉽게 변하는 사랑이라면 나도 싫다. 한 번 배신은 두번 세번도 한다는 거 모르냐?]
[가시나! 말을 해도 우째...!]
그 때 보건소 안으로 사람이 들어서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되었다.
[야, 간다. 수고해라]
[저녁에 도서관으로 가께. 묵고 싶은 거 없나?]
대꾸도 없이 재란은 휭하니 나갔다.
영에게 여자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재란은 자신의 기분이 자꾸만 위축되는 걸 느꼈다.
그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을 속으로 삭이려고 해도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그의 존재가 재란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가망없는 사랑이었다.
알아주지도 돌아봐주지도 않았던,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든가!
다가서지도 못하고 표현 한 번 못해본 바보같은 짝사랑...
그만두어야지...하면서 이제껏 끌고 온 것이다.
서러워 서러워
내 마음 서러워
미워 미워 미워서
내 마음 울린 네가 미워
한 마디 말없이 다가왔으나
떠날땐
작별이라도 할런지...
*
다시 새벽이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
짙은 어슴프레함 속에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재란은 그래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모자달린 얇은 점퍼를 입고 골목길에 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도..나와 있을까?...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괜한 기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재란은 새벽속으로 들어갔다.
터널을 지나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기대를 버렸으나 혹시나...하는 마음은 있었나보나.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지고 뛰어야 하는 고지가 멀고 멀게만 느껴졌다.
반환점을 돌아서 오면서 다시 한번 부두를 힐끔거렸으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세어 나왔다.
[힘내자, 이 재란! 한두번 경험한 실망도 아니면서 뭘 그러냐! 정신 차리자, 아자!!!]
스스로를 추스리며 고개를 든 재란의 눈에 영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바위 위에 걸터 앉아 오늘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죽은자가 살아난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걸음이 느려졌다.
...정신차려, 이 재란. 제발 진정 좀 해라 이 눔의 심장아...
그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그의 앞에서 재란은 멈추어섰다.
그는 여름용 검은 진바지에 하늘색 줄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아무리 흩날리듯 내리는 가랑비라지만...
[인사안해?]
정겨운 듯 그러면서도 놀리듯 그가 말을 꺼냈다.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안녕, 아저씨...근데 늙으면 새벽잠이 없다고 하든데, 정말 그런가보지요?]
[그런 너는 너무 팔팔해서 잠을 일찍 깼나보지, 꼬맹이?]
곧바로 그가 응수해 왔다.
[왜 비를 맞고 있어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소리 몰라요?]
젖기 시작한 머리를 그가 손으로 쓸어 넘겼다.
[이런 기분으로 비 맞아 보는것도 좋은데...]
[그거 알아요? 오빠 모습, 아주 지쳐 보인다는 거..예전 제 기억속의 오빠는 항상 활기차보이고 자신감으로 넘쳐 있었는데...]
그가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다시 오빠로 돌아온거냐?]
[인심썼어요] 이번엔 그녀가 웃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 기분 좋은데?...반대로 넌 변한 게 없구나]
[오빠 눈에만 그렇게 보이죠? 선보자고 얼마나 난리들인데...]
[그래서?]
[이래뵈도 제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요. 모두 퇴짜 놧죠 뭐]
영이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 틈을 타 재란은 그의 손에서 담배를 빼서 꺼버렸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일어나요, 늙은 오빠. 비 맞아서 좋을 건 하나도 없네요]
*
그 후
재란의 아침 조깅은 어느날보다 배로 즐거움이었다.
어김없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렸고
그 기다림이 그녀에겐 하루의 즐거움이 되고 있었다.
언제나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와 가까이 마주앉아 얘기를 주고 받게 된 것이다.
비록 영에겐 조카 친구이자 어릴적 가깝게 지낸 동네 동생 정도의 감정뿐이겠지만
그래도 재란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