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구, 내 새끼. 운동 가나?]
[응, 할매. 들어 가셔서 더 주무셔. 댕기 오께]
새벽잡이 없어신 할머니의 배웅을 뒤로 하고 재란은 새벽 운동을 나섰다.
다리 부근에서 한 5분...
은숙은 불참이었다.
...가시나. 또 땡땡이야...
한 며칠 열심이던 은숙은 언제부턴가 들쑥날쑥하기 시작했다.
분홍빛 새벽을 안고 재란은 가벼이 달렸다.
우뚝선 사자암이 시야 가까이 다가올수록 기분도 상쾌했다.
다리를 지나고 작은 터널을 지나자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왔다.
새벽을 안고 들어서는 오징어잡이배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바다를 끼고 달리자 다시 또 긴 터널이 나왔다.
터널을 돌아 나오면 작은 부두가 보인다.
오징어잡이배가 정박하는 곳이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아직은 한 척의 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재란은 갑자기 우뚝 섰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부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은 워크맨 채 영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지만 재란은 한 눈에 그가 영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일찍...?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재란은 이 새벽에 자신보다 먼저 깨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녀가 저만치 돌아서 왔을 때 영은 터널 옆,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주춤.
재란의 발이 잠시 멈추는 듯 했으나 모른 척 다시 뛰기를 계속했다.
못 본 척 그를 지나치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꼬맹이...]
멈칫.
맘추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영은 항상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지만 사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재란은 그 말이 싫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재란은 그가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게 우선 기분 좋았다.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긴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 그는 담배를 든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머리는 부드럽게 그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갔다. 긴 소매의 흰 셔츠가 눈부시게 보였다.
[꼬맹이 너, 인사 할 줄 몰라?]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왜 날 모른 척 하는거지, 꼬맹이?]
꼬맹이. 꼬맹이!
듣기 거북했다. 울컥.하는 반발심도 생겼다.
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가 내려다 보았다.
그는 앉아 있고 자신은 서 있는 상황이라 그녀는 유리하다 싶었다.
[스물 다섯살짜리 꼬맹이도 있나요, 아.저.씨!]
그가 당혹해하길 바란 마음으로 힘을 주어 놀리 듯 말했으나 올려다 보는 그의 표정은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나이 먹은 게 자랑은 아니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그가 일어섰다.
커다란 키를 죽 펴는 그 모습에 화들작 놀란 재란이 뒤로 한 발작 물렀다.
[그리고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서 내가 잠시 착각한 모양이다, 꼬맹이]
그녀가 영을 째려 보았다. 희미하게 그가 웃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담배 연기에 곧 가리워졌다.
[왜 아는 척 안 했어?]
[저같은 꼬.맹.이를 기억이나 할란가 싶어서 그랬죠 뭐]
재란은 자신이 영과 자연스레 얘기를 주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믿어지지도 않았다. 살짝 손을 뒷쪽으로 돌려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팠다.
...은숙이 알면 까무라치겠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것없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영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재란의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질것만 같았고 심장 박동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아 조마조마했다.
[매일 이렇게 달리는 건가?]
[새벽 공기가 좋잖아요]
그러자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헝클었다. 순간 재란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런 그녀완 달리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씁쓸했다.
[꼬맹이...이제 많이 컸구나...]
나즈막히, 들릴 듯 말 듯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