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나라 미술학원 간판이 저만치 보였다.
늘 지나 다녔지만 이젠 그 이층 건물이 내게 또 다른 인연으로 우뚝 서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 까지 했다.
미술학원이름이 붙어 있는 노란색 봉고 한대가 건물 앞으로 바싹 붙어 있다.
아직도 간단한 부엌살림 하나 없는 그 숙직실 같은 방에서 먹고 자고 하는 건지, 방이라도 좀 알아봤는지, 모두가 다 궁금해졌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하관이 뾰족하게 빠져서 그리 좋은 인상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는 젊은 남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학원차를 운전하는 기사라고 했다.
그 얘기를 그녀한테 전해 들으면서 괜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아직도 그 학원 뒷방 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 그녀에게 조금은 강한 어조로 함께 집 보려 다니자고 보채기 까지 했다.
그리고 이런 건물에 여자 혼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는 말을 그녀에게 거듭 강조했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넓은 작업실 하나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아라 했는데 살아 보니까 먹고 자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네...”
여전히 입가에 웃음이 베여져 그 웃음을 물고 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녁은 어떻게...”
“원장사모가 집에서 같이 먹자며 오라고 했는데... 어쩔까 싶다. 그냥 우리 여기서 뭐 시켜먹을까?”
“아니야. 분명 너 온다고 반찬 한 가지라도 더 해 놨을 텐데... 그런데 너 자주 가니? 그 원장님댁에?”
“거의 매일...처음 여기 내려 올 때부터 숙식제공이라는 조건을 학원 측에서 먼저 내어놓았었거든... 그런데 와서 보니까. 잠자리도, 먹는 것도 이 모양이라니까. 여기서 원장님 집까지는 또 얼마나 먼데...”
말하는 동안 간간히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거 데모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데모?”
내말에 그녀는 크게 웃었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한쪽 손을 높이 쳐들며 외치는 나를 보고 그녀는 학교 다닐 때 데모 꽤나 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 얼굴에?”
“하긴! 너 같은 얼굴을 하고 데모대에 끼어 있다면 그것도 좀 그렇지?”
“오늘은 우리 이것저것 다 무시해버리고 아예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가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 한번 먹어보지 않을래?”
나는 그렇다쳐도 그녀는 이러고 살면 안 된다 싶었다.
무슨 동정심도 아니고, 책임감도 아니고, 그녀에게는 그 청승맞은 한숨이 그다지 어울리지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내가 살께. 그 대신 첫 월급 받으면 그냥 슬쩍 넘어가지 말기다.”
나는 윤미의 팔을 끌어당기다 시피해서 밖으로 나왔다.
긴 생머리를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큰 키에 잘 어울리게 늘어뜨린 나드리 레스토랑의 여주인은 붉은 조명등 때문에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하기만 한 작은 룸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매우 친절했고 그 친절함이 우리를 특별한 손님으로 느껴지게 해주는 각별한 매너를 보여 주었다.
윤미는 처음 와 본 듯 보기 드문 미인이라고, 이런 후진 동네에 저런 인물이 있냐고 했다.
조금은 글래머 스타일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뭇 남성들을 사로잡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대답 대신 말했다.
그녀가 다시 주문을 받기 위해서 들렸을 때 그녀의 가슴 부근의 셔츠 단추가 조금은 미여지는 듯하게 큰 가슴을 내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자신감인가?
하지만 그녀의 허리는 큰 키에 맞게 완만한 곡선을 하고 있었다.
여자인 내가 봐도 꼴깍 침을 삼킬 정도였다.
“타고난 복이야.” 혼잣말처럼 했지만 윤미도 내말을 알아들었는지 나더러 부럽냐고 한다.
“응...”
나는 윤미를 다시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배시시 웃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난 솔직히 말해서 잘 생긴 사람만 보면 정신 못 차리거든. 여자든, 남자든...”
내가 한 말에 놀란 눈을 하고 윤미가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보기에는 얌전하게 생겼는데 말하는 거 들어보면 영 다른 사람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윤미보다 내 쪽에서 언제든지 말이 더 많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미스 리는 여름 내내 바람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윤미를 만나면서부터 나조차도 숙소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쏘다녔다.
색깔만 틀리지 비슷한 재질의 똑같은 스타일의 창 넓은 모자를 산 것도 그 때였다.
윤미의 검정색 모자와 꽃이 달린 노란색 내 모자가 함께 해수욕장을 찾았다.
배낭차림의 여름 피서객들이 구간 시내버스를 가득 메운 가운데 우리는 요란한 몸치장에도 불구하고 손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재잘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흥분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던 우리는 땅거미가 지고 서서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질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고 바다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윤미의 또 다른 모습 하나를 보았다.
그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시들을 외고 있었다.
괴테에서부터 국내 시인들의 시들까지...
특히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괴테라는 그 세계적 문호가라는 사실 외에도 꽤 깊이까지 파고 들어 갔었다고 했다.
나는 괴테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파우스트 그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것 전부라고 말했고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한때 시 동호회 같은데를 가입해서 자작시를 발표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 때, 허무라는 주제로 시를 썼었는데 그 동호회 회장이었던 사람이 자기 더러 자작시가 맞냐고 몇 번이나 캐물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이 쓴 시가 너무 난해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조차도 모르겠다며 결국 다른 시로 대치해서 발표를 했다고 했다.
그녀는 또 말했다.
파우스트에 한때 심취해 있었다고...
그 때 쓴 시가 아마 허무를 주제로 했다는 그 시였을 거라고 했다.
이야기 하는 동안 내내 그녀는 바다만 보고 있었다.
그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심오한 진리가 숨어 있기라도 하는 듯 나는 정신없이 그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