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곳에서 오래 머무르지를 못하고 함께 나왔다.
그녀가 먼저 말 놓고 친구처럼 지내면 안되겠냐는 제의를 해 왔다.
친구? 이런 객지에서 만난 친구?
쉽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우리는 금새 친구처럼 편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마땅히 방을 구하지를 못해서 임시로 학원 안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며 들렸다 가는 것이 어떻게냐고 했다.
나는 거절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미술학원이라면 그녀의 그림도 구경할 수 있겠거니 하는 호기심과 기대로 마음이 붕 떠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림만 그리는 미술선생으로만 이 곳에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아이들의 율동도 함께 해 주어야 하고 가끔씩은 아이들을 등원, 하원을 돕는 차에도 함께 타고 다니기도 해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아이들은 좋아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 하는 건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특별한 인테리어도 없고 매우 심플한 느낌을 받았지만 벽에 색색으로 만들어 부친 종이 접기와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한 벽면을 길게 줄지어 걸어둔 것이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것만 같은 생생한 현실감을 전해 주었다.
창가로 덩치 큰 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나는 그 피아노를 보자마자 가슴에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느껴야만 했다.
사뿐사뿐 걸어가야만 할 것 같은,
왈츠 곡이 금방이라도 저 피아노 위에서 춤을 출 것만 같은,
나의 몸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반들 위에서 내 손가락들이 조금씩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완벽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이 이 피아노였다.
어릴 적, 엄마가 풍금하나를 집에다 갔다 둔 것이 계기가 되어 딸만 셋이었던 우리집에는 늘 이 풍금 소리가 났었다.
엄마는 그 풍금을 우연찮게 가질 수 있었다고 하지만 엄마 역시 다른 어떤 것 보다 아끼는 물건이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컸을 때에는 이미 발판에 소리가 요란하고 건반도 제 역할을 제대로 못했지만 우리는 그다지 계의치 않았다.
그다지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었던 탓에 정식으로 돈을 주고 배울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우린 화음을 조금씩 넣는 방법을 알았고 중학생이 되면서 교과서에 있는 가곡들을 어느 정도는 소리를 낼 수가 있었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야 중고 피아노 한대가 풍금이 있었던 자리에 대신해서 놓여졌지만 우리 자매들이 붙어서서 서로 치겠다며 밀치던 그런 풍경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제각각 바쁜 아이들,
피아노는 순전히 나만을 위해서 들여 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 까지도 레슨비를 줘가며 제대로 피아노 공부를 하게 해 주었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곱게 자라 준 것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딸의 모습에서 엄마는 어떤 보상심리를 느끼는 것 같았다.
지나친 봉건주의에 사로잡혀 계셨던 외할아버지의 생각은 딸은 절대 공부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엄마!
하지만 엄마는 왠만한 한자까지도 다 읽을 만큼 스스로 자신을 지켜나온 것이다.
큰 딸은 어쩜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엄마는 나를 앞에 앉혀 두고 속내를 간혹 들여다 보여 주시곤 했다.
엄마의 첫사랑 얘기까지...
그 얘기를 하는 동안 엄마는 나보다도 더 소녀 같았다.
그 눈 속에 고여 지는 그리움이나 아픈 기억들이 방울져 잠깐씩 속눈썹에 이슬처럼 매달리기도 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좋아 보였는지 모른다.
엄마를 유독 많이 닮았다고 사람들이 그랬다.
내가 봐도 엄마의 처녀적 사진은 꼭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와아! 이럴수가! 보통 실력이 아닌데?”
윤미가 어느새 내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참, 나 좀 봐라. 챙피한 줄도 모르고...피아노 보니까 갑자기 왈칵 솟구치는 게 있어서...”
“나는 피아노는 전혀... 배우고 싶다는 생각만 있지 잘 안되네.”
피아노 건반을 만지작 거리면서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곤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것도 자세히...나도 엉겹결에 그녀를 가까이서 다시 보았다.
큼직한 이목구비가 시원했다.
그리고 웃음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좀 큰 듯한 입매가 언제나 그녀를 밝게 해 주었다.
“학교 때 그냥은 안 보냈을 것 같은데... 안 그러니?”
나는 그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불쑥 던진 말이었다.
그리곤 그녀가 기거한다는 내실이 있는 쪽으로 찾아 들어 갔다.
순전히 그림을 보기 위해서 였다.
“나 학교 때 학교 앞 다방에서 D.J 했었어.”
크게 기대하지 않은 대답이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그 때 생각이 많이 난다며 추억을 더듬는 듯 말에 여운을 남겼다.
“아니! 그게 사실이야? 나 그거 너무 하고 싶었다는 거 아니니? ”
우리는 무슨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금방 친해져서 우리의 얘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근데 미술을 한다는 사람이 음악다방 D.J를 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해 놓고 잠시 키득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선배가 날 추천해서 하긴 했는데...”
“목소리가 범상치 않으니 그럴만도 하겠다”
“흐흐흐 네가 생각해도 그러니?”
“그래. 샹송가수 같은 분위기에다가 목소리까지 그 분위기를 닮았으니...”
그렇게 말해 놓고 보니까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누군가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샹송가수 ‘나나무스쿠리’를 달았던 것이다.
긴 머리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옷차림새며.
풍기는 것이 그랬다.
그녀의 그림을 보지 못한 것이 서운했지만 조만간에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는 그녀의 말을 약속으로 받아 내고 그 곳을 나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도 서글퍼서 마음 같아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윤미 그녀와 조금만 더 가까워져 있었다면 그녀의 방에서 아마 신세를 졌을 것이다.
벌써 밤이 깊었고 정문으로 들어가기에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따로 챙기고 있었던 열쇠로 샛문을 따고 들어 갔다.
그녀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순간 가슴이 쿵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는데 대해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