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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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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BY 유수진 2000-06-24


죽음같은 터널속에서 빠져나와, 밝은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싶다.

생각은 또렷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꿈이었을까......

아니야, 그렇게 생생했는데....
아닐꺼야....
꿈이.........아닐꺼야.

영원히 이어질것같은 암흑에 익숙해질즈음, 이마에 느껴지는 향긋한 손길.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진재.......오빠........

" 진.........재.......오빠....... "

진재오빠는 약간 긴장하는듯 하더니,
예의 그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 내 이름을 왜 그렇게 불러....
숨막혀 죽는줄 알았네.
꿈속에서 나만 봤니?....
...................
기분 많이 좋아.......나..... "

내가 그랬었나..

조금, 창피했다.

" 나.........
어떻게 된거야?
여기, 어디에요?
병원이야? "

" 응......
몸살감기.......
좀 쉬면 괜찮아질거래...... "

'퉁.퉁....퉁퉁퉁퉁퉁퉁.........퉁...'

손을 움직이는 바람에, 링겔병이 쇠기둥에 가볍게 부딪쳤다.

" 어,어..
아직 움직이면 안돼... "

" ......................... "

" 이제 좀 살만한가 보구나.
삼일을 내리 잠만 자더니...... "

" 내가 그렇게 오래.......? "

" 응.....
좀더 안정을 취해야 한대.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다는데..... "


순간!
갑자기
스치는 얼굴!

하.현.수!

그와의 악몽같았던 ....

진재오빠를 쳐다봤다.

자상하게 링겔병을 고정시켜주는 그의 모습.....

난.....

더이상 그를 마주하면 안되는거였다.

내 이 더러운 몸뚱아리와 더러운 생각들로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안되는거였다.

이불을 '홱' 뒤집어 썼다.

다시 흔들리는 링겔병...

'퉁.퉁.퉁퉁퉁퉁퉁.......퉁.퉁.퉁...'

어쩌지....
어떻게 해.
어쩌면 좋아.....
난 어쩌면 좋아......

" 해인아? "

" ............... "

" 해인아, 왜그래? "

" .................... "

" 해인아........ "

하현수와의 더러웠던 교미들이 촤르르륵- 필름돌아가듯 이어졌다.
그위로, 들리는 하현수의 신음소리.....

' 으헉.....으허억.....헉헉............으허허허억.....
으으....으억....... '

" 아악! "

" 해인아!
왜그러니? "

나를 감쌌던 이불이 홱 젖혀지자 더 미칠것 같았다.

" 아아악-
오빠,
가만 놔둬...
가만 놔둬! "

" 해인아..... "

" 싫어! 싫단 말야......
나 그냥 내버려둬.
제발......
오빠! "

"............
가만있어.
의사 선생님 불러올께...... "

" 오빠, 아니.... "

황급히 나가는 오빠를 다급하게 불렀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더이상 진재오빠를 마주할 수 없었다.
더 생각할 필요없이 팔에 꽂힌 링겔주사를 '홱' 빼버리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온통 '뱅글 뱅글' 돌았다.

" 아아......
윽........! "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주저앉아 통증이 멎을때를 기다렸지만, 속이 울렁 울렁 한게 이번엔 구역질 까지 났다.

" 우욱......욱........웩! "

온몸의 오장육부가 다 쏟아져 나올것만 같았다.

" 웩!.............웩.......... "

순간!

내 어깨를 돌리는 강한 힘!

내 반쪽의 몸을 그 우왁스런 힘이 팽그르르 돌려 자빠뜨렸다.

자빠진체, 힘없는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벌건 분노로 가득찬 낯익은 얼굴이,
나를 죽일듯 내려다 보고 있다.

엄마!

엄마였다!

난, 잠시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됐다.

" 엄....."

'철썩!'

엄마의 매서운 손길에 동강난 내 몸뚱아리가 다시 나자빠졌다.

꿈은,
아니였다!

다시 내 어깨를 부여잡는 무서운 손길......

" 엄마! 왜 이러세요! "

누군가의 제지하는 목소리!

'철썩! 철썩!'

내 멱살을 잡고 때려대는 엄마의 무서운 힘에 난 거의 혼절 상태였다.

'철썩! 철썩, 철썩! 철썩!...'

" 엄마!
그만 하세요!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엄마, 엄마..... "

이 목소리는......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 들리는 이 목소리.
내 사랑하는 동생.

경빈이....

경빈이를
경빈이 얼굴을 봐야할텐데.....

" 놔!
놔!
저런년은 죽어야 해!
저런 더러운 년은 죽어....

이년아....

죽어!
죽어!

죽어.... "

경빈에 의해 엄마가 떨어져 나가자,
난 그대로 고꾸라졌다.

차가운 시멘트바닥위에서 '팔딱 팔딱' 거리는 내 심장이 신경 거슬릴정도로 크게 들렸다.

온몸이 땅속으로 꺼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 이년아...

너..... 그럴줄 알았어.

니가 해빈이 인생 박살낼 줄 알았어.

인간 말종같은게,

집 뛰쳐나가더니, 애까지 배 갖고 와..... "

해빈오빠.....?

애........?


엄마가 지금 무슨............... ?

"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할거야...
해빈이를 어떻게...
아흐흐흐흐흑.......흐흑......
아유~ 흐흑.....흑... "

엄마는 통곡을 했다.



" 아니!
무슨 일입니까?
왜 환자가..... "

" 어머니.......
경빈아,

해인아.......... "

진재오빠는 우리들 이름을 불러대더니,
엎어져 있는 내게로 달려왔다.

나를 안아 일으키는 그의 손길......

" 걔,
이리 내놔요! "

" 어머니.... "

" 어서, 이리 줘요!
경빈아 뭐해- "

" 어머니, 해인이 아직 치료 안끝났는데요. "

" 죽이든 살리든 내가 해요.
그리고, 진재 학생도 그만큼 했으면, 됐어.

걔 이리 줘요! "

" 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

" 이러지 말라구?

지금, 그말이 입에서 나와요.

다 진재학생 때문이야....

진재 학생이 쟤한테 쓸데없는 바람만 안집어 넣었어도,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어!

우리집하고 무슨 웬수가 졌길레.... "

나를 안은 진재오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어머니........

해인이,
여기서 치료 끝나면 보내드릴께요!
진정하세요. "

"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

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 해빈이
지금, 현수 때려서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데
내가 진정하게 생겼냐구!

그년 이리 내놔.

얼른!

그 더러운 년
이리 내놓으란 말야... "

진재오빠는 달려드는 엄마를 피해 나를 침대에 재빨리 눕히더니,
경빈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 경빈아!
해인이좀 보고 있어.

어머니..... "

" 뭐야!

이거놔......

이거 못놔!

놔! 놔! ....



으흐흐흐흐흐흑....흐흑....흑......

해빈아......

해빈이 어떡하면 좋아......... "

엄마의 울부짖음이 멀어져 간다.

해빈오빠......
해빈오빠......

왜......

왜 그랬어....

왜......

왜..........

뜨거운 눈물이 내 귀를 적셨다.

" 환자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

" 네.....네!
죄송합니다. "

경빈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의료진의 처치가 취해지는 내내 이게 꿈이기만을 바랬다.

그들이 처치를 끝내고 나가는 기척에도, 차마 경빈이 앞에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자꾸 눈물을 삼켰지만,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이 멈추질 않았다.

" 윽..........읍.....윽......윽..... "

흐느끼는 소리...

난 떠지지 않는 눈을 가까스로 움직여,
뿌연 안개속에 갇힌듯한 경빈을 응시했다.

경빈이 울고 있다.

난 그 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다 너무 안스러워
입을 열었다.

" 경빈아.... "

경빈은 잠깐 멈추더니,
벌개진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 경빈아.....
............... ? "

경빈은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턱수염은 깎지않아 듬성듬성 지저분했고,
이마에 여드름이 잔뜩 나있었다.

눈은, 예의 그 천진한 어린왕자의 빛이었다.

경빈은 그 어른같은 모습으로 내게 와락 달려들었다.

" 누나......
누나....... "

" 경빈아........ "

" 으허어어엉....엉.....엉엉...엉.... "

경빈의 눈물......

난.......



난 품에 엎드려 우는 경빈의 거친 머리결을 쓰다듬었다.



그래......

난.......

하현수의 아이를 잉태한 것이다!

그 저주의 씨앗을.........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