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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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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BY 유수진 2000-04-09



"이건,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이야.
어때, 멋있지! 음..... 그리고 이건, 강원도 삼척의 바다,
또, 또...................."

진재 오빠가 제주도에서 찍은 작품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설명이 뚝 끊긴걸 느끼고 그를 쳐다봤다.

"그 사진이 마음에 드니?"

"...............................
이런곳에 울타리도 이렇게 허술한 집이 있으니, 잘때 얼마나 무서울까, 생각했어요."

오빤 눈이 동그래지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난 내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 사진을 다시 들여다 봤다.

멀리, 섬 저쪽에 갈매기가 점점이 날고 있고, 이쪽 섬에는 푸른 초원이 강을 이루고, 허술한 울타리의 돌집 두채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바로 옆에서 말 두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돌집 앞에는 검은 바위가 듬성 듬성 밖혀있고......

오빠를 쳐다봤다.
웃음을 가득 머금고, 나를 쳐다보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화끈거리는 얼굴을 얼른, 사진속으로 다시 떨궜다.

"해인이 다운 천진한 생각이야."

"이것들, 그려보고싶지 않니?
난 이미 현지에서 그렸던 곳들이지.
내 작품옆에 사진을 다는 버릇이 있어.
어떤 교수님은 별로 안좋은 버릇이라고 하고, 또 어떤 화백님은 새로운 발상이라고 반겨주시기도 하더라고.
이래뵈도, 유명 전시회 까메오로 ?炳?걸린적도 있다...."

흐믓하게 웃고 있는 그에게 대답대신 고개만 한번 끄덕여줬다.

"해인이 작품은 .......
부드러운선을 극도로 절재했던데.....
아주 거칠고, 굵고, 도전적이고....
테마를 집어넣는게 서유림화백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같기도 했고......

하지만, 두사람의 그림은 완벽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강했어."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듯하다가, 그는 이내 심각한 얼굴을 고치더니, 살짝 웃으며, 바리톤 음성을 부드럽게 조절했다.

"나중에, 너의 그림에 대해 뭔가 얘기해 줘.
기다릴께."



그의 작품 사진들을 책상 서랍속에 소중하게 집어넣는데 그가 일어섰다.

"자아~ 가야겠다.
모두들 해인이 방쪽에만 신경들을 쓰고 있는것같은데....
너무 오래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라."

진재오빠는 나를 잠시 내려다 보더니, 손으로 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난, 순간 '움찔'했지만, 큰 반항은 하지 않았다.

어느새, 서서히 그에게 마음을 열고있었다.

"당분간 좀 고생되더라도 참고, 꿋꿋해야한다.

뭐, 해인이 나한테 하는거 보면, 꿋꿋하다못해, 꼿꼿하니까, 잘 해낼수 있을거야."

난 살짝 눈을 흘기고, 호탕하게 웃는 그를 배웅하려고 휠체어 방향을 틀었다.

어느새, 내 휠체어를 밀고 있는 그의 단단한 손.

이손이라면......

나의 인생을 전부 맡겨도 정말 든든할것같았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우리를 살벌한 눈빛으로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경진이............

내 은은한 미소도, 경진의 살벌한 표정과 같이 변했다.

우리의 불꽃같은 시선이 불이되어 타오를 즈음, 진재오빠의 목소리가 우리 두사람의 시선을 가로질렀다.

"경진이,
오랜만!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거야.
팔..........
깁스 풀었네."

경진은 싸늘한 내 시선에서 눈도 떼지 않은체 낮은목소리로 대꾸했다.

"진재오빠........
너무 심하신거 아니에요."

"..............
무슨............?"

어리둥절해서 물어보는 진재오빠의 물음에 경진의 목소리가 히스테릭하게 갈라졌다.

"동정이 너무 지나치신거 아니냐구요!"

난 눈에 힘이 들어가는것을 느끼며, 그녀를 내 시야에 꽉 붙잡아두고 있었다.
이렇게 내앞에서 당당히 저런말을 할 수 있다는건 아직도 날 사람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다른 사람 앞이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진재오빠 앞에서.......

"경진이,
경진이야말로 너무 심한거 아냐.
동생앞에서 말이 너무 지나치잖아!"

"동생이요,
누가요!
쟤가 그래요? 내 동생이라구.....
저앤 내 동생아니에요.
물론, 저애도 날 언니로 생각안하구요."

내입에서 습관처럼 빈정거리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잘 아네!
알면, 됐어!"

"해인아!"

진재오빠의 나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진이만 눈앞에 나타나면, 감정 컨트롤이 전혀 안됐다.

그게 진재 오빠 앞이어도.......

"보셨죠!
저모습이 저 애의 진짜 모습이에요.
오빤 저런 애가 좋다고 하시는거에요?

진재오빠....."

"그만!
나중에 얘기하자!"

"계속해봐!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거야."

"해인아!
너까지 왜이래!"

"가만 놔두세요.
나중에 무슨 얘길 한다는 거에요.
저에 대한 얘기니까, 직접 듣겠어요.
이경진!
계속해봐!"

경진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진재오빠......."

그와 난 갑자기 뭔가에 얻어 맞은듯 벙벙했다.

잠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들썩이는 경진을 바라보다, 진재오빠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난처한 눈빛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손으로 경진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저.....
경진......."

경진은 갑자기 진재오빠의 품으로 뛰어들더니 정신없이 주절대기시작했다.

"진재오빠....
진재오빠가 좋아요.

좋아하고있단 말이에요.

우리집문앞에 서 있는 오빠의 모습을 처음본 순간부터 쭈욱-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에요. 이게 뭐냔 말이에요. 어떻게 이럴수가 ......

그동안 오빠의 눈빛, 저만의 착각은 아니였어요. 저만의 .......흑..."

품에 안긴 경진을 사이에 두고 나와 진재오빠는 더이상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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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진재오빠가 선물했던 그림도구와 이젤을 챙겨 하얀 눈위에 겨울햇살이 눈부시게 반사되어, 무지개빛을 발하고 있는 2층 거실 배란다로 나갔다.

하지만, 난 다시 휠체어를 방쪽으로 부랴부랴 돌렸다.

언제나 습관처럼 왔던 이자리!

하지만, 내겐 이제 그릴만한 풍경들이 수없이 많아졌지!

진재오빠가 줬던 그 작품 사진들......

난 책상서랍에서 그 제주도 사진을 꺼내, 방 중앙에 화구 자리를 잡았다.

오빤, 풍경을 완성한후 사진을 찍었기때문에 모르겠지.

사진을 보고 그리는게 얼마나 따분한건지......

사진은.....
풍경을 그릴때마다 달라지는 생생한 색의 생명감도 없고, 분위기도 없었지만, 생소한 다른 풍경을 접한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진재오빠가 찍어준 사진이라는......

스케치를 하며 떠오르는 상념들......

경진의 고백에 나도 놀랐지만, 진재오빠는 더욱 놀란것 같았다.

어쩔수 없이 그의 발길은 뜸해졌고, 어쩌다 한번 와도 경진이가 없는 오전에 잠깐 들렀다 바로 가곤했다.

때론, 경빈이를 통해, 편지를 서너차례 전해받기도 했다.

우리의 사랑은 이 겨울의 추위만큼이나 거세져갔다.

경진이가 원하는 사랑을 내가 가질수 있다는 쾌감에 미소가 감돌기는 했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니까.....

스케치가 완성된후 그가 선물해준 하얀 파레트를 폈다.

그런데.......

파레트의 중앙을 조금 빗겨 금이 쫘악 가있었다.

'앗뿔사!

그때.........떨어뜨렸을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