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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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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유수진 2000-03-16



"충성! 이 상철 회장님의 장남 이 해빈.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건강하게 제대하였음을 신고합니다."

"그래, 장하다 내 아들. 이렇게 듬직하게 변하다니 몰라보겠구나."

"해빈아 아유~ 어쩜... 고생 많았지."

"어유~ 엄만 남들 다 가는 군대 다녀왔는데 뭘 그렇게 수선이유. 오빠, 군대에서 순 땡땡이만 치구 짠빱만 먹었수? 약간 불은거 같애."

"이 녀석이..."

"형..."

"어구~ 우리 어린왕자. 웬 키가 이렇게 컸어. 이젠 안아올리지도 못하겠는데..."

"당연하지. 이젠 어엿한 고등학생이라구.
3년전 그 팔씨름의 치욕 잊지 않았어. 다시 하는거다!"

"얼마든지... 자신 만만한데..."

"얘들아, 해빈이 피곤해. 자, 자 어서들 들어가자.
아줌마, 해빈이 목욕물 받아놨죠?"


이렇게 집안이 시끄러웠던 때가 어제 였던가. 해빈 오빠가 군에 입대하기전... 그래. 그때도 이랬었지.

가장 아끼는 당신의 아들이 나라의 부름을 받고 그 험한(?) 군대에 가게된 이유로 엄마는 통곡을 하셨고, 해빈오빠가 없던 3년간은 마치 무덤속같은 침묵만 영원히 이어질것 같았다.

이제, 이 집안의 기둥, 엄마의 사랑하는 장남, 나의 큰 오빠가 햇볕에 그을려 더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앞에 다시 서게 된것이다.

애석한 것은 그런 오빠의 건강한 모습을 2층 맨 구석방인 조그만 창으로 몰래 훔쳐 봐야한다는 사실이다.

엄마가 오빠의 팔장을 끼고 재촉해서 앞 뜰을 지나 현관문으로 사라지고, 아빠와 경진이(나보다 네살이나 더 먹었지만 난 그렇게 부른다)도 사라질즈음, 맨 뒤로 쫓아가던 경빈이 내쪽을 힐끗 올려다 본다.
난 커튼 뒤로 숨겼던 몸을 경빈이 잘 볼 수 있도록 창밖으로 조금 내밀었다.
경빈은 손을 흔들고 빙긋 웃어주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고 휠체어를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오빠를 좀 더 보고 싶었기 때문에 엄마가 나오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2층 경빈이 방 입구쪽에서 내려다 보면 아래층에선 내가 잘 안보일것이다.
휠체어 바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 조심 입구쪽으로 다가 갔다.
"하나도 안변했네요. 우리집은.....
아줌마도 여전하시네요. 그동안 안녕하셨죠."
"아이구~ 해빈학상. 참말로 해빈학상이가? 더 건강해졌꾸마."
"아줌마, 물...."
"야, 벌써 준비했심더. 시간에 맞출라꼬 쪼메 뜨겁게 안 맞춰놨능교. 지금
적당히 식어 있을기라예."
"해빈아, 얼른 씻고 저녁먹자."
"지금 아홉신데 저 때문에 모두 식사 안하신거에요?"
"당연하지. 엄마가 먼저 먹게 했을거 같아. 빨리 씻어. 배꼽 시계가 북소리 내고 있단말야."
"경진아, 오빠한테....
해빈아 느긋하게 씻고 와. 아줌마 저녁준비!"

"아이고 사모님예, 지 혼자 할께예. 이리 나오시이소."
"아줌마는 식탁 준비 하세요. 해빈이 좋아하는 닭도리탕은 제가 양념해야 잘 먹어요."
"어머나~ 그림만 그리시던 울 엄마 3년만에 주방 들어가시네. 오빠, 오빠 덕분에 엄마 닭도리탕 3년만에 먹어 보겠네."
"넌 얼른 오빠방에서 옷이나 가져와."
"알았어요. 경빈아 들었지?"

휠체어를 돌려 내방으로 돌아왔을때 난 조금 울고 있었다.

저들에게 난 없는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해빈오빠가 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것이 조금 서운했다.

'오빠 이제 나에대한 자책감은 빨리 잊어줘. 오빠가 그러면 그럴수록 이집에서 견디기가 더 힘들어져. 난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단 말야. 제발...'
눈물은 어느세 흐느낌으로 변해 있었고, 아득한 저멀리......

난...... 저 모습은......
10년전 8살때의 내 모습.......
경진이와 난 각자의 자전거를 기우뚱 기우뚱 타고 있다.
해빈오빠가 집앞 내리막길에서 우리 자전거를 양손으로 한대씩 잡고 발바닥을 질질 끌며 천천히 내려오고 우린 땀과 웃음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오빠를 부르고 있다.
"아하하하하하~ 오빠 나 조금만 더 하면 균형잡을 수 있을거 같아."
"경진아 안돼. 여긴 내리막이란 말야. 저 아래 공터로 가서 맘껏 타자."
"잇 싫어! 놔 노란말야. 정말 자신있단말야."
"어어..어.. 야! 가만있어."
순간!
오빤 경진이의 자전거를 잡느라 내 자전거를 놓치고 난 정신없이 달리다가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려 힘껏 밟는순간 급 커브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와 정면으로 ..........
내 몸은 공중으로 튀어 올랐고 순간 난 정신을 잃는다.

다리의 심한 통증으로 울먹이며 눈을 떳을때, 엄마, 아빠, 가족 모두의 핏기 없는 얼굴들....
저들이 나를 위해 마지막으로 베풀었던 염려.......

"아악~ 창피해, 창피해, 저 징그러운게 내 동생이야, 싫어 싫어 싫단말야,
친구들이 보면 뭐라고 해. 으아앙~"

"해인아, 넌 엄마가 지시하기전엔 절대로 위층에서 내려오지마, 해빈오빠 실어증 고칠때까지야, 알았지."

"해인아, 나오지마, 엄마 친구들 왔다!"

"해인아, 들어가지 못해! 사람들 있잖니."

"해인아, ...하지마,.... 해인아,.... 조용히해,.... 해인아... 해인아.
...지마.....지.....마"



똑!! 똑!!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침대에 굳어 있는데 경빈이 빼꼼히 머리를 디민다.

꿈이었구나, 또다시 이어지는 악몽.....

"뭐야, 밤 샌거야? 얼굴이 왜그래?"
"휴우~ 놀랐잖아. 벌써 일어난거니?"
"벌써는...
지금 여덟시야. 이러다 지각하겠어."
"그럼 빨리 가지않고..."
"...... 누나 어떤지 보러왔어........해빈형......
되게 멋있어졌지."
"...............으응............"
"어제.....
해빈형이 누나 안부 물어보어라."
설령, 경빈이 말이 나를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해도 난 너무 기뻐서 그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
고마워, 경빈아.....
어서 가, 정말 지각하겠다."
"오늘 토요일이니까 오전수업만 받으면 돼. 하얀 포스터칼라 떨어졌던데 올때 사가지고 올께."

경빈이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제부턴 그나마 맘대로 다녔던 뒷뜰에 나갈 수 없게 됐다는 생각이 스쳤다.
해빈오빠와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말아야하니까....
경빈이와 뒤 뜰에서 놀다가 군에 간 해빈오빠의 방 창문안을 기웃거리며 '오빠가 빨리 왔으면'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오빠가 왔기 때문에 그나마 있었던 자유를 잃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야가, 무신 생각하는데 문도 안여나. 니 밥 안묵을기가?"
"..................
해빈 오빠는......."
"학교 복학 신청하러 안갔나. 자자 퍼뜩 묵고 일나게 내리가자."
내 머리에서부터 잘린 허벅지까지의 짧은 몸뚱아리가 가볍게 들어올려졌다.

식사는 벌써 진행중이었다.
아빠와 해빈오빠, 그리고 경빈이가 벌써 나가고, 엄마는 나를 힐끗 보시더니 계속 식사를 하셨다.
경진이는 내가 맞은편 식탁의자에 앉혀지자 수저를 '탁' 놓고 일어서서 나가버린다.
이미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진 나는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사모님예 더 드이소. 안즉 닭고기 많이 남았는데예 더 드이소."
"됐어요. 아줌마 빨리 식사하고 치우세요. 조금 있으면 해빈이 올거에요."
난 갑자기 가슴이 콱 막혀서 더이상 밥알을 삼킬 수가 없었다.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