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엄지 척
전기 압력밥솥이 고장이 났다. 마침 AS센터가 가까이에 있어서, 오늘 주말을 이용해서 아들이 다녀왔다. 밥이 한 솥 가득히 들어있는 채로여서 내가 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말의 단잠을 반납하고 아들이 나 대신 고생을 했다. 조금 뒤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밥솥이 뚜껑도 안 열리지만, 앞에 센서도 고장이 났데요. 고쳐도 오래 쓸지도 장담할 수도 없다고 하네요. 그러구 며칠 걸린다고 해요.”
뚜껑만 열리면 만사형통하리라 짐작했던 일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고치는 값이 새로 사는 값을 거의 육박하려 한다고 한다.
“그냥 하나 사야겠어요.”
아들의 목소리로는, 나간 김에 시방 새 밥솥을 들고 들어올 기세다. 아직 새 것으로 장만할 만큼 오래 쓰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일까.
그래야겠다고 하면 아들은 새 밥솥을 들고 들어 올 게 뻔하다. 사더라도 내가 사야지. 제 주머니에서 계산을 하게 해서는 안 되지. 엄연히 제 살림과 내 살림이 다른데 말이다. 그러나 아이를 밥솥이 즐비한 대리점에 세워놓고는 쉬운 설명이 먹히질 않을 것 같다.
“이층 방에 전기밥솥이 또 하나 있다. 솥에 든 밥도 버리고 밥솥도 버리고 그냥 오너라.”
“밥솥이 또 있었어요?”
겨우 이층에 올라와서 꼭꼭 포장을 해 놓았던 비닐을 벗기고, 밥솥을 들고 내려오는데 아들이 들어왔다. 곧장 이층의 내 거실로 들어선 아들이 내 손에 들린 밥솥을 받아들었다.
“키친프라워? 이게 언제 적 거예요? 상표도 들어보지도 못한 건데요.”
“이거, 방송국 프로에서 엄마가 상품으로 탄 거다. 한 20년도 더 됐을 걸?!”
“아이구~. 압력도 안 되는 솥인데.... 엄마는 현미밥 드실 텐데....이 밥솥으로는 안 되잖아요.”
“아냐. 나도 요즘 알았다. 현미밥은 소주를 넣어야 영양도 더 좋아지고, 소주현미밥은 압력솥에 하면 온도가 높아서 영양 손실이 많다더라.”
‘그게 정말이예요?’ 하는 듯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웃는다.
“정말이라니까. 너, 지금 내 방에 인터넷 보여줄게.”
아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으며, 밥솥을 든 채로 내 방으로 향하는 내 뒤를 따른다.
부지런히 컴을 켜고는 <소주현미밥>을 두들겼다. 아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내 어깨 위로 얼굴을 들여민다.
“자 봐라. ‘영양손실을 막기 위해 그냥 전기밥솥에 밥을 짓는 게 더 좋다.’지 않니? ”
“정말이네요.”
그러나 아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컴을 자세하게 이리저리 살핀다.
“그래서....나, 그냥 내려가도 된다고요?”
“그러~엄.”
“그래도 압력솥이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아요?”
“왜? 아빠는 전기밥솥에 한 밥은 자시지도 않는데. 필요 없어.”
이래서 나는 20년이 넘은 밥솥을 다시 꺼내고는, 아들의 엄지 척 손 인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