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건 30대 후반부터 였던 것 같다.
양쪽 이마 끝 부분부터 새치처럼 조금씩 나기 시작 했는데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40 중반을 넘고 부터는 그 부위가 차츰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가르마를 타면 하얀 길이 생겼다. 검은 머리와 대비되어 흰머리가 더 부각되었다.
어쩔 수 없이 3주에 한 번씩은 뿌리 염색을 하고 있다. 매 번 미장원에 가기도 번거로워 집에서 셀프로 하다 보니 이젠 거의 뿌리 염색의 달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염색은 매번 귀찮고 번거롭다. 한 번은 그냥 백발이 될 때까지 길러볼까 하고 흰머리가 자라도록 내버려 둔 적이 있다. 두 달을 넘길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흰 머리에 눈이 가고 공연히 나이도 더 들어 보여 결국은 '아유 지겨워' 하면서 다시 염색을 했다.
얼마 전 흰 머리가 자연스러운 k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실버 전문 강사 과정을 수강 하는 수강생 중의 한 명이다. 수업 첫 날, 수강생끼리 서로 인사하며 자기 소개를 했는데 그녀는 첫 수업에 결석을 했다. 두 번째 수업부터 출석한 k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어찌나 붙임성이 좋고 싹싹한지, 낯가림이 심해 새로운 친구 사귀기를 잘 못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부를 때 언니, 언니, 하는 것이 조금 못마땅했다. 백발은 아니지만 머리카락의 90% 정도는 흰머리여서 인지 아무리 못 되어도 60 중반은 되어 보이는데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 언니라니....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아니면, 원래 아무나 보고 언니라고 부르나?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그녀의 살가움에 살짝 경계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k쌤, 생각보다 저 나이 많지 않아요. 제 나이가 더 어릴걸요?"
"아유, 언니. 딱 봐도 나 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요. 뭘!"
"몇 살인지 물어보면 실례가 될까요?'
"하하 언니, 내 머리 때문에 오해 하셨구나. 저 00살 이예요."
마스크를 살짝 내려 얼굴을 보여 주는데 과연, 흰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금은 앳된 얼굴 이었다. 안 그래도 머리 때문에 종종 할머니로 오해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다. 특히 지하철을 타면 경로석에 앉으라는 권유를 많이 받는다며 웃었다. 새치가 많아 30대 중반부터 염색을 하기 시작 했다는 그녀는 염색을 포기한지 1년이 되었다고 했다.
"어머, 친정 엄마나 시어머님이 아무 말 안 하세요?"
"언니, 염색 하는 게 싫어서 내가 00살 되면 더 이상 염색하지 않겠다고 미리 선언을 했거든요."
"뭐, 어쩌겠어요. 제가 편하면 된 거 아닌가요? 언니도 염색하지 말고 자연스레 그냥 둬 봐요. 얼마나 편한데요."
글쎄다. 아직 나는 염색을 하지 않을 용기가 없다. 내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머리 염색 만큼은 잊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미장원에 들러 흑발을 고수 하시는 시어머니 앞에 흰머리를 하고 마주 대할 자신도 없다. 평생 죽을 때까지 염색할 생각은 없지만 번거로워도 당분간은 염색을 계속 이어가려 생각 중이다.
그렇지만 나도 k처럼 나이를 정해 놓고, 그 나이 되면 염색을 졸업하고 멋진 백발의 할머니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