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께서 지어 주셨는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흔하디 흔한 '자'자로 끝나는 평범한 이름도 많은데 하필이면 여자애한테 이런 이름이 뭐냐며 공연히 엄마한테 신경질을 부린 적도 있다.
가장 싫었던 때가 언제였느냐 하면 매년 새 학기 첫 수업이 있던 날이다. 선생님께서 아이들 얼굴을 익히신다며 한 사람, 한 사람 호명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호명되어 기계처럼 앉았다 섰다 할 때 딴 짓을 하고 있던 아이들이 내 이름 석자가 불리우자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 봤다. 선생님은 혹 잘못 읽은 게 아닌가 하고 탁자에 놓았던 출석부를 다시 손에 들고 꼼꼼히 확인하신 후 한마디 하셨다.
"어머, 이게 니 본명이 맞니?"
"도대체 누가 이런 이름을 지어 준거야?"
"그런데 넌 평생 OO밖에 못하겠다야!"
선생님의 농담에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그때마다 마음 속으로
큰아버지를 크게 원망했었다. '이름을 지으시려면 이쁜 이름으로 지어주실 것이지,
OO이 뭐람. 놀림거리나 되고....'
그런데 이름 때문에 곤혹을 치룬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 이름이 '김 입분'인데 발음상 '김 이쁜'이 되는 거였다. 입분이는 이름이 호명되어도 한 번에 벌떡 일어난 적이 없었다. 선생님이 어디 보자, 얼마나 이쁜가 한 번 보자 하며 어딨어? 라고 재차 이름을 부르면 그제서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며 마지못해 일어서곤 했다.
입분이는 키가 크고 깡마른 체격에 눈은 작고 주근깨가 많은 아이였다. 안타깝게도 한창 크느라 그랬나 이름과는 상당히 먼 외모를 하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다 아무 말없이 시선을 돌리는 선생님을 따라 아이들의 시선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홍당무가 된 입분이가 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이름에 대한 컴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나, 나는 대학교 다닐 때 미팅 한 번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남학생에게 내 이름을 말하기가 죽어도 싫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회사에 다닐 때도 이름 때문에 종종 오해를 받았다. 그 당시엔 기안서, 보고서 등 모든 문서를 대부분 손으로 썼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가 아닌 타 부서에 협조
문서를 보내거나 하면 기안자 란에 쓰여진 내 이름을 본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한다.
"아니, 이 사람 뭐야, 도대체 누구지? 참 희안한 사람이네."
" 자기 직책이 뭐가 대단하다고 본인 이름을 안 쓰고 직책을 써?"
어떤 부장님들은 본명을 쓰지 않았다고 건방지다며 불쾌해 한 분들도 있었고, 심지어 아랫 직원을 시켜 누군지 알아보라 하신 분들도 있었다. 문서로만 오가며 일을 하던 사람들과 우연찮게 얼굴을 대면하게 되면 많이 놀라곤 했다. 직책이 아니라 이름이라서, 그리고 당연히 남자라 생각했는데 남자가 아니라 여자여서.
결혼을 하고 나서는 딱히 내 이름으로 불리울 일이 별로 없었다. 누구 엄마로 모두 통했기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름에 대해 덜 민감해지기도 했다. 특별히 가이드 일을 하면서 부터는 '그래, 오히려 잘 됐지 뭐. 남들이 내 이름은 잘 기억하겠네.' 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을 소개 드릴텐데요. 제 나이 쯤 되면 고참 부장님, 아니면 이사님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여태 승진을 못하고 평생 같은 직책에 머무르고 있는 이름이예요. 제 이름은 뭘까요?"
여러 사람이 갖은 직책을 갖다 붙였다. 꼭 한, 두 사람은 맞히기 마련이어서 그 직책이 내 이름이라 하면 진짜냐고, 웃기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책에다 성을 붙여 (성을 강하게 발음한다) 내 이름을 정식으로 소개하면 사람들은 와르르 웃곤 했다. 낯선 여행객들과 가이드의 첫 만남이 한바탕 웃음으로 시작되면 어색함도 사라지고 분위기가 훨씬 편안해졌다. 처음으로 이름 덕을 보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고 이제는 낯선 자리에서 내 이름을 소개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어느 자리에서나 내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이름이 이상하다고 대놓고 웃거나, 푸웃 하고 자기도 모르게 웃으려다 얼른 입을 틀어막고 어머, 이름이 독특하네요 라고 한다.
며칠 전, 10여명이 참여하는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강사님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주고 본인이 본인 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짝이 상대방을 소개 하라고 했다.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짝을 소개 했다. 드디어 내 짝의 차례가 되었다.
"제 짝꿍의 이름은 OOO입니다. 그 나이 먹도록 만년 OO이지만(여기 저기서 ㅋㅋ 웃음 소리) 외모 만큼은 임원급인 OOO님을 소개합니다."
라며 시작되는 짝궁의 내 소개를 들으면서 참 말을 재밌게 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로 3분의 2가 가려진 내 얼굴이 어찌 생겼나 짝꿍이 알 리가 없으니 당연히 이쁘다는 말은 아닐테고, 아마 잘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로 해 준 말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소개 해 준 경우가 간혹 있는데 기억에 남는 소개 중에 하나가 될 듯하다.
상담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막 가을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 사이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만약에 내 이름이 불려지던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이 이상한 이름이라며 웃음거리로 만드는 대신에,
'어머, 너 이름 참 특이하구나. 누가 지어 주셨는지는 모르지만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좋은 이름이네. 네가 벌써 OO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커서는 사장님이 되어야지? 정말 멋진 이름이야. ' 라고 해 주었다면, 어쩜 나는 이름 때문에 주눅이 들거나, 맘 고생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나 못지 않게 자기 이름 불려지길 싫어했을 입분이 에게도,
'너는 참 개성 있고 매력적으로 생겼네. 이름처럼 앞으로 점점 더 이뻐질거야. 사람이 이름 따라 가거든. 게다가 너는 키가 커서 앞으로 멋진 모델을 해도 되겠는 걸.' 꼭 이렇게 좋은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빤히 쳐다보다 실망한 듯한 얼굴로 시선을 돌려 버리는 행동 만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입분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이 의도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비수가 되기도 하고, 그저 평범하게 한마디 했는데 그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되기도 한다. 말로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가시 박히는 말, 비꼬는 말, 위하는 척 하며 자존심을 뭉개는 말,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의 말, 따뜻한 위로의 말, 사랑의 말,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