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변하지 못할 것 같던 영감이, 혹하게 앓고 나더니 많이 변했다. 좋게 말하면 착해졌다고 하겠고... 아무튼 많이 변한 건 확실하다. 철이 나자 망령이 난다더니 이제 망령이 날 때가 온 것일까. 안 되지. 그건 안 되지. 나도 망령이 날만큼 됐으니, 나도 당신만큼 부려 먹고 싶걸랑.
가장 눈에 뜨이게 달라진 것은 먹는 것에서부터다. 원래도 잔소리는 없던 위인이기는 했다. 먹는 것이 입에 맛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다.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으면 그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징조다. 그렇다고 다른 걸 청한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역정이라도 내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다.
돌솥밥에 한이 맺혔는가 싶을 정도로 평생 돌솥밥을 고집했다. 냄비밥을 했다고 심술을 부리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알아서 삼시세끼를 지어 대령(?)하는 게 심사가 편했다. 고슬고슬 자르르 기름이 도는 밥을 준비하면 반찬은 별로 투정을 않는 양반이다. 그러니 이런 저런 신경을 쓰기 싫어서 돌솥밥을 익혔더라는 말씀이야.
아이들이 토스트를 먹고 싶다고 해서 식빵을 구워도, 영감은 따로 돌솥밥을 지어 올렸다. 이제 영감과 단 두 식구가 되었어도 내 밥은 압력밥솥으로 지은 현미밥이어야 하고 , 영감은 여전히 돌솥밥이어야 했다. 번거러움에 화가 나서 주방에서는 주걱을 내려치더라도, 영감을 위해서는 돌솥밥을 지으며 내 신상을 볶았다.
어느 날, 오랜만에 아이들이 먹던 토스트가 생각이 났다. 계란에 적신 식빵을 마가린 두른 후라이팬에 구우니, 오랜만에 구수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다. 돌솥밥을 앞에 놓고 앉은 영감이 말도 없이 토스트 한 조각을 집어 든다. 신이 나서 나는 딸기 쨈과 애들이 피자에 발라 먹던 소스를 내놓았다.
얼라리~. 영감이 구워놓은 토스트를 가르키며,
"더 먹어도 되나?" 어린아이같이 포크를 빨며 내 눈치를 살핀다.
"응. 더 구우면 되지." 나는 신기한 볼거리를 본 듯 반갑게 일어나, 식빵을 구워 냈다.
이렇게 점심 한 끼가 토스트로 대체 되는 날이 늘었다. 한 끼의 반찬 걱정을 덜었으니 그게 어딘가. 이제 내친김에 지난 끼니에 남긴 밥도 마다하지 않고, 끓인 밥도 말 없이 비우더라는 말이지. 허긴 내가 그렇게 길을 들였는지 모른다. 영감의 식사는 반드시 금방 지어서 담은 것이라야 한다고 스스로 작정을 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이제는 영감이 이쁜(?) 시간이 많아졌다. 영감의 조그만 선심에도 나는 곧잘 감격한다. 청소기를 돌릴 때면, 말없이 손잡이를 받아 든다. 나는 이 작은 선심에도 가슴이 뭉클하고, 늘상 비워주던 쓰레기통인데도 요새로는 더 고맙다. 영감은 이제 앓기 전보다 집안일을 더 많이 돕는다. 왜냐고? 내가 영감 수발을 아주 아주 정성껏 했걸랑?! 히히히.
아직은 혼자서 못 살 것 같은데, 영감이 혼자 영원히 멀리 가버릴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