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에 궁궐 구경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은데다 비까지 오락가락하니 걱정이 앞섰다. 얼마 전 다쳐 수술한 팔에 깁스를 풀지 말라는 의사 선생에게 사정사정해서 대신 장착 하기로 한 보조대를 끼다가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때마침 비가 멎고 그곳에 도착했다. 길게 늘어선 인파를 보면서 그곳을 나처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권력의 중심에서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던 곳, 출입 금지구역으로 신성불가침이었던 곳이었다. 무려 70여 년 동안 주인이 바뀌고 바뀌던 그곳을 들어서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과 식물들을 보면서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청색 지붕의 본관이었다. 대통령 집무실과 영부인집무실을 지나 돌아 나오면서 그곳을 거쳐 간 전직 대통령들이 이곳을 떠날 때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주어진 권력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행사하고 아무런 후회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나올 수 있었던 대통령은 누구였을까? 이 나라의 천하 제 일인이 나다. 내가 하면 못 할 것이 없다. 라는 오만과 독선으로 수많은 사람의 삶을 쥐고 흔들며 자신의 이득만 취한 사람도 있고 잘해보려 애를 썼지만, 정치라는 괴물 앞에 대의명분을 버리고 당리당략을 따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느냐? 보은의 정치를 하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국민의 삶과 직결된다.
한때 최고 권력자였다는 오만으로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의 오류는 타인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자신만은 속이지 못한다. 잘못된 신념으로 잘못된 판단을 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죽기 전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 전직 대통령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죽음은 허다한 모든 죄를 덮는다지만, 끝내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 떠나버린 사람도 있다. 퇴임 후 교도소를 가야 했던 불행한 전직 대통령들과 고인이 되신 분들이 그곳에 사진으로 남아있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그곳을 나와 정원의 소나무가 멋진 자태를 뽐내는 관저로 향했다.
내가 태어나보니 그분은 대통령이었다. 사춘기를 거쳐 꽃다운 스물이 될 때까지 그분은 대통령이었다. 학교에 가도 그분이 있었고 관공서 어느 곳을 가도 그분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세뇌가 되어서인지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대통령은 오직 그분만 있는 줄 알던 시골 계집아이였다. 그때에는 뉴스 시간이면 대통령의 가족들이 종종 T.V 화면에 등장했었다. 활짝 웃는 대통령 내외와 레이스 달린 양말에 구두를 신고 원피스를 찰랑거리며 웃는 자매가 있었다. 조끼에 반바지를 잘 차려입은 귀공자까지 삼 남매가 푸른 잔디밭을 뛰어다니던 그림 같은 풍경을 볼 때면 어린 나는 가슴 뛰게 부러웠었다. 그 잔디밭을 하염없이 바라보자니 그때의 기억이 안개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잔디밭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푸르른데 열린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관저는 휑하니 크기만 했다. 이 공간에서 전직 대통령의 식구들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일상을 나누었구나! 공간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절이나 교회에 가면 조용하고 엄숙해지는 마음도 공간이 주는 느낌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 공간을 가장 오래 머물렀고 가장 긴 재임 기간으로 우리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그분이었다.
어려서 가족과 함께 살던 그 집에서 가족이 해체되고 34년 만에 그 집에 다시 들어갔지만, 파면이라는 전대미문의 전직 대통령이 되어 그곳을 떠나온 사람, 어린 내가 부러워 마지않던 그 사람도 이젠 초로의 여인이 되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나이가 되어 문이 활짝 열린 대궐을 바라보며 내가 태어난 나라의 역사와 그 역사가 지금까지 나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지나친 욕심으로 해외로 망명하거나 부하직원의 손에 죽거나 퇴임 후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전직 대통령들의 역사를 우리는 모두가 안다. 최근의 대통령조차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 같은 역사를 쓰고 있다. 이 대궐을 버리고 용산 시대를 택한 대통령께 바란다. 새로운 곳에서는 부디 같은 역사를 쓰지 마시라고 지금까지 기록된 대한민국 대통령의 치욕스러운 역사는 이곳에 모두 묻고 오직 국민의 편에서 정의로운 선택으로 기록되는 대통령이 되시라고 꼭 당부드리고 싶다.
앞으로 살아나갈 젊은이들이 내 나이가 되어 대한민국의 역사와 집권자가 나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며 깊이 감사하고 존경하는 참된 정치를 펼쳐 나갔으면 좋겠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줄 알 듯 좋은 정치를 보고 자란 세대가 좋은 정치를 하고 좋은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 믿는다. 모략과 술수로 대중을 기만하는 못된 정치를 학습하는 젊은 정치인이 더는 발붙이지 못하길 바란다. 위장 탈당으로 정족수를 채우는 비열함, 야합으로 위성정당을 만드는 꼼수 정치는 이제 모두 버리자.
새로운 장소에서 새롭게 태어난 대한민국은 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과정은 정의롭고 결과는 공평하길 바란다. 공정과 정의를 화두로 내 세운 새로운 대통령이 지난 대통령처럼 말로만 끝나는지 기필코 실천하는지는 일억 사천 만개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다시 쓰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바른 정치로 젊은이들의 꿈과 미래를 담보해주길 젊은이들이 마음껏 자신의 희망을 노래하길 바라면서 내 어릴 적 꿈의 궁전이던 그곳을 천천히 걸어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