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내인생에 터닝포인트가 필요했다.
그해 가을은 내 심장 만큼이나 산천이 붉게 타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학교를 다녔는지
정말 총맞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학교를 다녔다.
충청남도 천안시 호서대학교 심리학과 졸업반.
어찌 내가 이길을 달려올수 있었을까?
졸업을 앞두니 눈물이 났다.
이제 3달이 지나면 학교 졸업이다.
아쉽고 나 자신이 정말 대견스럽다.
졸업을하려고 보니 교수진이 더더욱 빵빵하다.
교수님들과 정도 들었지만 교우들과도 정이 두터워서 가슴이 벅차올라 가슴찡한
감동의 눈물이 맺힌다.
하 ~ 다시 돌아올수 없는 대학시절이구나.
친정엄마를 돌아 보았다.
울엄마는 꼭 내 나이에 아버지와 영정 사진을 찍으셨다.
돌아가셨을때 63세에 찍어놓았던 영정사진이 너무나 젊이 예쁘고 화려했다.
도대체 나는 엄마보다 얼마나 더 살기를 바라기에 이나이에 대학공부를......
내가 대학을 들어가게 된 동기가 있었다.
사찰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보다.
우리 소도시 모든 불자들이 나를 따돌렸다.
물론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너무 잘 알고있다.
그러나 잘해보고자 하는 나의 열정이, 아니 밝고 적극적인 성격이 나를 왕따로 만들었다.
너무나 억울했다.
더구나 잘해보려고 한 일에 몽둥이를 맞은 샘이다.
우울로 치달아, 슬프고 아프다 못해 내 인생 자체가 저 밑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공항장애가 왔다.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평소에 늘 대학을 못 간것이 한이 되었던 나는 과감히 대학문을 두드렸다.
먹고 공부하고 먹고 공부하고..
시험의 스트레스와 ,1시간 가량의 버스통학으로 인하여 어려움도 있었지만
새로운 지식과 교수님들의 지극한 보살핌과 교우들의 우정이 있으니 만학이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학교 특성은 대학에 발만들여 놓으면 서로 서로 협조하여 대학을 중퇴하는 법이 없다. 그만큼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친밀하고 교류가 원활하다.
대졸 학위 받을 날이 얼마남지 않았으니 정말로 감게 무량하여 눈물이 나온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미술치료사 1급 자격증,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
시험도 보았다. 그밖의 도형삼담 에니어그램, ....기타등등 많은 상담기법을 배웠다.
삶이라는 것은 참으로 알수없는 일이며
또한 걸림돌이 확실한 디딤돌이 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절에서 왕따가 된 세월이 4년이 넘었다.
그러면 내가 왕따를 면했을까?
그러나 지금도 내가 왕따를 면한것은 아니다.
워낙 큰 사건에 휘몰렸으며 , 또한 집행부 간부들의 눈밖에 난 일이기때문에 100% 회복이
되지 안았다.
4년 내내 눈물도 흘렸다. 지금도 눈물은 흐른다.
그러나 그 눈물이 거름도 되었나보다.
그냥 그러려니..
아니면 마취가 되었는가? 그럭 저럭 살아간다. 견딜만하다.
세상 사람들에게 조금 미움을 받는 것도 나쁘진 않다.
신상이 살짝 편하다.
지금은 내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왕따가 되어야 했을까를 분석한다.
어린시절 나는 공부를 못했다. 몸도 약하고.더구나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아서
집안에서 늘 아슬아슬 손이가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어른들과는 사이가 좋았다. 착착 감기고 애고있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친정 부모님께서는 늦게라도 내가 사람구실을 하게되니 물심양면으로 내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그러다 보니 내 궁둥이에 꼬리가 났나보다.
너무 꼬리를 흔들었나보다.
그리하여 덕놓으신 형님들께 박살이 난것이다.
나는 잘해보려고 뭐든지 잘해보려고 꼬리를 흔들었는데 이것이 잘못되어 사실 된것이다.
대학 공부를하면서 심리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내가 왜이렇게 되었는지 알것같다.
학교에서의 나는 적당히 천박하지 않을 만큼 수다스럽다.
교우들과 잘 놀 줄안다. 학교에서 교수님들 뒷치닥거리를 많이한다.
교우들을 위해서 향상 찻잔을 들고 다닌다.
항시 커피내려 원없이 마시게 한다.
공부를 죽지 않을만큼 한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에게 여한없이 컨닝을 시켜준다.
나는 잠이 없다. 조금 자다 공부하고 조금자다 공부하고 공부를하면 에너지가 나온다.
나는 내가 왜 왕따가 됬는지 안다.
나는 섬김을 잘한다.
너무 오랫동안 부모님 수발을 해오던 것이 습관이 됬나보다.
그 습관이 어느만큼이냐면 언젠가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여행을 갔던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차 문을 모두 열어주고 그들이 타고나면 내가 맨 마지막이 탔다.
"야 너는 왜 차 문을 열어주냐?"하던말이 생각난다.
4년전으로 돌아가서
내 성격이 섬김을 잘하다보니 사찰에서 스님들 치닥거리도 잘 할수밖에 없다.
노인들 치닥거리도 열심히 했다.
적당히 수다스러워서 스님들과도 그냥 편하게....
노인들도 많이 안아드리고 볼도 한번씩 부벼주고..
나의 친절에 꼬리가 났다.
나는 부모님 말을 잘 들어서 스님 말씀도 잘 들었다.
그런데 왕언니들 말을 잘 안들었나보다.
내 깐에는 열심히 여얼심히 들었는데
모르겠다.
어쨌튼 나는 궁둥이에 꼬리가 매달려서 절집에서 무리가 일어났다.
참고로 조금 억울한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스님들과 외출해서 단둘이 차를 마셔본적이 없으며
식사를 한적도 드라이브를 한적도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참고로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본적도 없고
몸무게도 60키로를 넘어 거기에 3-5키로가 더 언져진 까닭에
이미 여자에게서 벗어났으며 그냥 평범하다.
나이먹고 늙어서 ...킥킥............ 아마도 수다가 병이었나 보다.
밥사야지
영광이다야.
어쨋튼 그때 절에거 임원을 내려놓고 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참 잘했지롱.
난 잘해보려고 한일이 잘못되어 왕따도 돼고 눈물도 흘렸지만 ,그동안 변화도
많았었고 ,친구도 많이 생기고 남자친구들도 생기고 선배 후배 막 생겨나고...
4월 초파일이 얼마남지 않았다.
다시 절로 들어와서 책임을 맞아 봉사를 하라고 이사람 저사람이 소낙비를 퍼붙는 듯 하다
그런 속에서도 그 절을 계속다니며, 나름대로 설겆이는 열심히한다,
그러나 간부를 맞아 책임을 짓는 일은 하고싶지 않다.
한번 흘러간 물이 역류할수는 없다.
나중에 더 흠씩 늙어서 주지스님이 목간통에서 샤워하다가
"보살님 여기 수건 좀 갖다줘유"할정도로 늙기전에는 간부를 맞지 않는다.
타고난 성격이 그러니 된서리 맞았어도 여전히 히히덕 거릴테고,
섬김이 몸에배서 이사람 저사람 치닥거리 할테고 그것이 또 잘 난척하는걸로 보일테고....
조금 아쉬운것은
새로오신 스님께 향상 철벽을 치고 대해서 죄송스럽고
우리 남편과 딸들이 가끔씩 절엘 드나들었는데 그것이 싹 없어져서 아쉽다.
그러나 초파일엔 우리 가족이 모두 절에가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봉축행사를 한다.
세월이 지나고보니
이것도 추억이고 더 늙고보면 아쉬움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이러한 사유로 인하여 대학생이 되어서 분하고 억울함을 참기위해 공부를 했다.
내가 심리학을 했다고 모든것이 다 풀린것은 아니지만 많은 억압과 스트레스와 분노는 많이
줄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사람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 너무 가까워도 안되고 너무 멀어도 안된다는
말이다.
너무가까우면 데죽고 너무 멀면 얼어죽는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부처님이 좋아서,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서 그리고 스님들을 너무 좋아해서
너무 가까이가서 그런 일이 생겼던것 같다.
아 좋다.
대학원도 갈 생각이다.
어느대학원을 선택할까 고민이다.
동국대학원과 공주 교육대학원 두군데를 놓고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