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서둘러 길을 나섰다.
햇볕은 투명하게 나무를 걸쳐 땅으로 내려와 있었다.
가을은 깊고 맑아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호수 같다.
세워보지 않고 눈으로 대충 봐도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잎보다 땅으로 떨어진 잎이 많다.
떨어진 나뭇잎 숫자에 따른 가을의 물러감을 실감했다.
집 앞 사거리까지 차를 가지고 오기로 한 진희씨는 삼십대 초반에 혼자가 되었다.
남편을 사고로 잃고 어린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데
큰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엄마가 아이들에 대한 정성이 남다르다.
둘이 나눠서 할 몫을 혼자서 씩씩하게 잘 해 나가고 있는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기고 말하는 것이 더 예쁜 진희씨.
사거리에 있는 아파트 정원에 유난히 빛이 나는 나무가 있었다.
아직도 잎이 푸르고 빨간 열매가 오소소 달려있는 산수유를 진희씨가 올 때까지 올려다봤다.
어릴 적 비스듬한 밭 가장자리에 산수유나무가 많았다.
큰이모네 밭에 있었으니 큰 이모가 심었을 것이다.
먹음직한 붉은 열매의 유혹에 입에 넣어보았지만 그냥은 먹을 수 없는 열매였다.
나뭇잎이 다 떨어져도 열매는 매달려 있던 밭을 지나면 잔디가 넓은 산소가 나왔다
산소 둔턱에 햇살을 마주 보고 앉아서 날 고구마를 입으로 베물어 먹곤 했었다.
산수유 열매는 텁텁하고 떨떠름했지만 고구마는 물이 많고 달았던 물고구마였다.
먹을 수 없지만 단풍이 곱고 열매가 대롱대롱 달려 있는 모습이 유난히 예쁜 산수유,
그 기억이 지금도 빨갛고 말갛다.
산수유열매를 보니 나무 밑에 앉아 햇볕을 올려다보며 날고구마 한 잎 베물고 싶다.
오늘은 워드프로세서 실기 시험 보러가는 날이다.
워드프로세서란 쉽게 말해 자판을 주어진 시간 내에 얼마나 잘 치느냐 보는 것이다.
글을 오년 동안 썼느니 이 시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고 봐야한다.
근데 자신감을 언제 엿바꿔 먹었는지 사라지고
한겨울 시린 몸처럼 손끝이 떨려서 떨어졌다.
시험이 끝났어도 떨려서 말이 떨려 나왔다.
“자... 자... 자판이 왜 그... 그... 그리 시꺼먼 자판이냐고...글자 포...폭이 좁고…….”
센터에서 연습하던 자판도 집에 있는 자판도 하얀색인데 시험용 자판은 검정색이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뒷말이 없는데, 못하는 학생일수록 핑계거리가 많다.
진희씨도 떨어지긴 마찬가지였다.
같이 공부한 사람들은 이번 주엔 자신이 없다고 다음주로 미루고
우리 둘만 오늘 시험을 치렀고,
나는 당연히 붙을 거라고 교실 안에 소문이 났었는데…….
다음에 시험을 보러 갈 때는 신경안정제를 먹고 가야겠다.
원래 남 앞에 나서서 내 소개도 다리가 후둘거려 못하고,
발발발 떨면서 노래를 불러서 떨치인데다가
산에 바위만 내려다봐도 가슴이 덜컥거려 엄마야를 불러대고,
자전거를 타고 지하도를 내려가지 못해서 걸어서 내려간다.
엄마에게 떨려서 떨어졌다고 하니까
나랑 똑같네, 하신다.
별게 다 유전이 돼 가지고 쉬운 실기 시험을 똑 떨어지게 만드냐고…….
산수유를 닮아 잎도 열매도 끈질기게 붙어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산수유는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이었다.
비탈진 밭두렁에 산수유 꽃이 피어날때면
땅이 녹아 걸을 때마다 치덕치덕 질척질척 소리가 났다.
이른 아침 안개에 싸인 산수유 꽃은 무채색이었던 산골마을을 유채색으로 번지게 만들었다.
산수유 꽃의 시작으로 봄은 속이 다 비치는 치맛자락을 화사하게 넓게 펼쳐 놓는다.
계절은 걷힌 치맛자락 밑으로 겨울이 손끝쯤에 와 있다.
손끝이 시려 손과 손끼리 주물러주고, 손바닥을 마주대고 비벼본다.